[우거지다] 편집위원 오월
공간은 물리적이면서도 비물리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을 한다. 처음엔 마냥 낯설던 자취방이 이제는 편안한 공간이 되었을 때, 불편하던 기숙사 생활이 룸메이트들과의 기억에 섞여 좋은 추억으로 변한 걸 깨달았을 때, 무심코 틀었던 노래가 내 지난 기억들을 줄줄이 물고 나와 버스 한 구석 내 자리가 갑자기 추억이 상영되는 영화관이 되었을 때 특히 그렇다. 공간은 납작한 물리적 개념에서 시작해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과 기억을 켜켜이 쌓아놓은, 물리적인 동시에 비(非)물리적인 개념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공간과 친해지고 싶을 때 서둘러 기억을 끌어모아 여러 번 공간에 덧씌운다. 계속해서 추억을 환기하고 그 때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서.
이번 여름에 친해진 공간은 광주 근처의 작은 시골 마을, 우리 할머니댁이었다. 나의 할머니 오복순 여사는 전라남도 화순군에 위치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작은 슈퍼를 20년도 넘게 운영하고 계신다. 할머니의 작은 슈퍼는 동네의 사랑방과도 같은 곳이었고 그래서 할머니는 명절에도 꾸준히 슈퍼를 운영해 오셨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슈퍼는 연중무휴다. 할머니의 슈퍼는 정류장 역할도 겸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버스 승차권이 카드로 대체되기 전까지 계속 버스표를 판매하셨고, 나는 그 모습을 할머니 슈퍼 카운터에 앉아 구경했다. 젊은 사람들이 슈퍼에 와서 할머니께 익숙하게 인사를 드린 뒤 몇 시 어디요, 하면 할머니는 익숙하게 표를 끊어다 주셨다.
나는 그 익숙함이 꽤나 부러웠다. 일 년에 고작 두어 번 오는 시골이 나는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항상 버스가 아니라 아빠 차를 타고 시골과 집을 오갔기 때문에 길도 하나도 몰랐다. 차에 타서 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면 시골 집 앞이었고 다시 차에 타서 눈을 감고 뜨면 내가 살던 아파트 앞이었다. 그냥 나에게 할머니댁은 덩그러니 있는 동네였다. 대전과 화순 사이의 길고 긴 도로를 대체로 까만 무의식으로 지나온 세월이 10년도 넘었다.
반면 나를 제외한 모든 친가 사람들은 할머니댁에 익숙했다. 나 빼고 모두가 익숙한 곳, 그곳이 화순이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며 탐험하고 싶었으나, 어린 아이였던 내가 혼자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을 부모님은 쉽게 허락해주지 않으셨다. 게다가 내가 나이를 먹어 두 번째 교복을 입게 된 후로는 할머니댁에서 하루 자고 가는 일조차 흔치 않아, 동네를 살펴볼 틈조차 없었다. 화순에 갈 때마다 우리는 서둘러 안부를 묻고 의식처럼 밥을 먹은 뒤 잠시 쉬다가 집을 나서곤 했다. 서둘러 기억을 끌어와 공간에 덧씌우기엔 비슷한 기억이 너무 많았고, 추억이 되기에 그 기억들은 얕은 구석이 있었다. 아빠를 따라 잠시 다녀간 시골의 기억 속에서 내 주체성을 찾아보기는 어려웠고 그에 따라 온전한 ‘내 기억’도 자연히 적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얕은 기억의 조각만 갖고 살아가던 어느 날, 연희동 모 스터디카페에 틀어박혀 밤새 시험공부를 하던 나는 문득 광주 여행을 결심했고 동시에, 화순 할머니댁을 혼자 가보기로 결심한다.
인터넷 지도를 통해 찾아보니 할머니댁으로 가는 길은 오래 걸릴 뿐 쉬워보였다. 1) 기차역에서 내린다. 2) 지하철을 타고 버스 정류장까지 간다. 3) 버스 정류장에서 화순행 버스를 탄다. 서울의 어려운 교통에도 적응했던 나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이 적응기는 공일오비 17호 ‘ㄷㅈㄱ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사히 두 단계를 끝내고 3단계로 넘어간다. 1번과 2번을 수행하는 동안의 여행은 순탄하고 즐거웠다. 기차를 타고 바라본 바깥 풍경은 청량했고,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는 흥겨웠고, 미친 듯이 내릴 거라던 비는 감감무소식이었고, 날은 덥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내려서 처음으로 바라본 광주는 낯설었으나 낯섦이 익숙함으로 변할 과정을 생각하니 그마저도 좋았다. 그저 ‘친척 집이 있는 곳’이 아닌, 나만의 기억으로 빼곡해질 광주. 그동안 머릿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던 광주가 돌연 선명한 흰 도화지로 변해가는 순간이었다. 이제 흰 도화지를 차근차근 채워갈 일만 남은 것이다. 낯선 도시 광주에서 익숙한 버블티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섰다. 익숙하게 주문한 후 익숙한 네이버 지도로 몇 번이고 검색해보았던 경로를 다시 확인하면서, 나는 이 여행이 너무 순탄한 것에 쾌재를 부르면서 내 여행의 부분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내일 오후에 다시 광주에 돌아와 도화지를 다채롭게 칠하겠다 계획하며 다시 화순으로 가는 길을 나섰다. 그러나 지하철을 타고 내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앞으로의 여행이 완벽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그러다 지대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nnn 버스를 타야 했던 내가 nnn-1 버스를, 그것도 행선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타버린 것이다. 당시 나는 행선지가 약간 다른 버스를 택해 할머니댁 앞 대신 큰할머니댁에서 먼저 내린 후, 큰집 근처 마트에 가서 선물을 사고 큰집에 들린 다음 할머니댁에 걸어가야겠다고 계획을 변경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 변경과 순탄한 여행에 대한 믿음은 도시 사람의 오만이자 어린 여행객의 패기에 불과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시골 버스는 타기 전에 버스 앞에 붙어있는 행선지를 꼭 확인해야 한다. 한 버스가 시간에 따라 여러 노선을 겸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정류장에 도착한 잘못된 노선의 버스를 탄 뒤 헤드폰을 낀 나는 간간히 버스 안내 방송에서 들리는 정류장과 인터넷 지도가 알려주는 정류장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며 창 밖 풍경이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분명 중간 지점, 화순 종합 병원까지만 해도 행선지는 동일했다. 버스가 화순군 정류장에 이르러서는 더 신나기까지 했다. 여기가 화순군이구나! 화순에서 매번 논과 밭, 그리고 단층집들만 보던 내게는 낯선 아파트 단지도 보였다. 낯선 마을이었지만 오래된 간판, 오래된 건물들이 정감 가득했다. 작은 도심을 거쳐 다시 국도로 넘어간 버스는 내게 녹음 가득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헤드폰 속 노래는 청량했다. 마음이 청량해지고 두근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신이 났다. 이 순간을 더 진득하게 즐기고 싶어 헤드폰 음량을 더 키웠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됐다. 버스가 두 갈림길 사이에서 왼쪽을 택했을 때부터 여정이 산으로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헤드폰 음량을 키운 후 음악을 즐기며 풍경을 보다 핸드폰으로 친구와 연락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곡과 곡 사이 잠깐의 적막에 얼핏 들린 버스 안내 방송이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번쩍 들어 창 밖을 보니,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인터넷 지도에서 알려준 정류장 순서대로 가고 있던 버스는 어느새 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길이 익숙치 않은 나라도 버스가 산 위로 가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기에 당황스러웠지만, 곧이어 ‘내 감보다는 인터넷이 더 정확할 거야’ 라는 생각이 든 나는 버스가 산 위로 완전히 올라갈 때까지 태평하게 앉아있었다. 산 위로 올라간 버스는 몇 번의 정거장을 더 거쳤고 그제서야 나는 내가 완전히 잘못 온 것을 알았다.
내려야겠다는 결심이 섰을 때 곧장 내렸다. 내리고 보니 처음 보는 마을이었고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제서야 약간의 걱정이 생겼다. 할머니댁까지 걸어갈 수는 없었다. 족히 네 시간은 걸렸고, 차가 휙휙 지나다니는 도로 옆을 하염없이 걸어야 했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할머니 댁까지 가지? 택시는 잡히나? 나 노숙하나? 버스는 어떻게 타고 가나? 버스를 어디서 타야 맞는 걸까? 몽글몽글 생기는 걱정에 불안감이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아빠께 전화를 드리니 아빠는 크게 웃으시고는 길 가시는 어르신께 여쭤보라고 하시면서 그게 지도보다 나을 거라고 하셨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에 있는 생명체라고는 논에 있는 벼와 이따금 지저귀는 새, 그리고 어딘가에서 짖어대는 개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또 다른 정류장을 찾은 후 인터넷으로 다시 길을 찾아보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인도 없는 삼거리의 정중앙을 가로질러 걷고 계셨다. 가서 할머니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길을 여쭤보았다.
대강 답을 듣고 정류장에서 무작정 기다리다가 할머니 생각이 났다. 예상 도착 시간을 한참 지났는데 걱정하고 계시지 않을까? 할머니께 전화하니 할머니는 놀라시다가 크게 웃으시고는 근처 어른한테 택시 부르는 방법을 알아본 다음 택시 타고 오라고 하셨다. 그 이후 콜택시 번호를 알아보러 간 우체국에서 얼떨결에 버스를 타게 된 나는 대신 할머니가 보내주시는 택시를 타고 할머니댁에 가기로 계획을 변경하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택시를 타기로 한 정류장까지 찾아가는 것. 중간에 또 다른 착오가 있긴 했지만 길가 커피집 사장님께 여쭙고, 버스 기사님께 여쭈어 겨우겨우 택시를 타기로 한 곳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버스 기사님이랑 말을 터서 택시를 타기로 한 정류장 근처에 도착하니 버스 기사님이 알려주시기도 했다. 그 후 버스에서 내려 무사히 택시를 탄 나는 마침내 할머니댁에 도착하게 되고, 나의 실수로 시작된 할머니와 나의 007 작전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혹자는 계획형(J) 인간이라 속으로 비명을 질렀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내가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이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했을 때 나의 J 친구들은 나의 대책 없는 여행에 황당함을 넘어 신기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불필요하게 소모된 시간을 통해 오히려 이 여행의 본 목적을 달성했다. 잘못 탄 버스는 나를 화순 곳곳에 퍼져 있는 여러 시골 마을을 보여주었고, 광주에서 화순까지 오는 길을 빠짐없이 보여주어 내 까만 무의식을 지워주었기 때문이다. 정방형 카메라로 찍은 것 같던 공간을 파노라마로 길게 이어주었다고 하면 내가 느낀 것들이 설명될까. 파노라마처럼 주변을 속속들이 보여준 버스 덕분에 나는 큰 지역구 화순군에 속해있는 여러 마을들을 알 수 있었고, 동시에 할머니가 동네를 빠삭하게 잘 아신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언제나 가게에 계시거나, 혹은 가게 뒷방에 계셨다. 유치원 선생님은 언제나 유치원에 있을 것이라 착각하는 어린 아이처럼, 나는 마을 밖의 할머니를 크게 상상한 적이 없었다. 타지역으로 이동하실 때는 주로 고모부나 삼촌, 혹은 우리 아빠의 차를 이용하셨고 대체로 집에만 계셨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오토바이가 있었지만 나는 그게 당연히 할머니 것이 아니라 삼촌의 오토바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평생을 화순에서 보내셨다는 걸 알면서도, 바보처럼 할머니가 평생 그 작은 마을 하나에서만 살아가셨을 것이라 속단했던 것이다. 그러니 걸어서 4시간은 족히 걸리는 먼 거리의 마을도 할머니께서 빠삭하게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순에 도착한 날 밤 아빠와 전화하며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자 아빠는 ‘할머니 댁에 오토바이가 왜 있겠니.’ 하시며 웃으셨다. 한 때 오토바이 라이더의 꿈을 갖고 있던 나에게 할머니가 빛나 보이는 순간이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광주와 화순을 잘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전라도 출신의 사람을 만나면 크게 반가워했고, 전라도 사투리를 정겨워했으며, 광주와 화순에 혼자 2박 3일동안 가 있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초보 여행객의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 나는 나의 이 모든 행동들이 광주와 화순, 더 크게는 전남 지방에 대한 애정 없이 설명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가깝고도 먼 전남을 이토록 사랑하고, 화순/광주라는 공간을 재구성할 여행까지 떠나게 되었을까. 아마 아빠와의 관계 덕분일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 아빠와 친했고, 아빠의 말과 행동에서 보이는 진한 전라도의 향도 당연히 사랑했다. 자연히 아빠의 옛날 이야기에서 들리는 광주와 화순의 단상은 전남에 대한 내 애정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아빠의 도시’라는 인식이 전남 지방에 대한 막연한 애정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낯선 ‘아빠의 도시’는 동시에 내가 사랑하는 ‘아빠의 도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아빠와의 관계가 낯선 공간을 재구성해주는 것과 반대로, 내가 화순을 익숙해하면서도 여전히 낯설어했던 건 할머니와 내가 그만큼 친밀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멀리 사는 만큼 서로를 낯설게 대하는 듯했던 할머니와 나는 서로 간간히 나누는 안부 전화가 1분 안팎에 그치곤 했고 우리 둘의 대화는 몇 가지 단편적인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빠나 다른 중간 세대의 어른들 없이 오직 할머니와 나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관계는 부쩍 가까워졌다. 고작 하루 남짓 되는 시간동안 나는 할머니의 자부심이 어떤 것인지를 엿보기도 하고, 내가 뭔가를 하려 할 때마다 ‘할 수 있겠어?’ 라는 할머니의 장난 가득한 질문과 표정을 받기도 했고, 할머니가 오후 7시에 자서 오전 2시 반에 깨는 엄청난 생활 패턴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우리는 파리와 파리채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그러다가도 시골의 한갓진 시간을 즐기다 둘 다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다이나믹하면서도 한갓진 시골에서의 하루는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미 화순이라는 공간을 재구성해주었다. 처음으로 아빠의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 자체를 만나게 해준 시간은 어느새 할머니와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공간을 재구성해주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공간은 물리적이면서도 비물리적이다. 그리고 공간은 세월과 기억을 켜켜이 쌓아가며 만들어진다. 할머니댁의 불편한 화장실에서 혼자 씻던 22살의 나는 사촌 언니와 같이 어설프게 씻어보던 5살의 나 위에 쌓이고, 오랜만에 할머니와 같은 방에서 자던 22살의 나는 부모님과 함께 뒷방에 가서 자던 지난 날의 나 위에 쌓인다. 앞으로 이 위에는 어떤 기억이 세월이 가며 쌓여갈까? 공간과 친해져보겠답시고 억지로 여러 기억을 불러오기도 전에 매동작마다 기억들이 서둘러 눈 앞에 달려오는 걸 경험하며, 나는 그 기억들이 몇 번이고 재구성할 오복순 사장님의 슈퍼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집위원 오월(chlsunny@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