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세편집위원회 Jan 26. 2023

<133호> 이름에게

수습편집위원 초록


등장인물.

다은(17): 할머니와 둘이 살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고등학생. 편의점 창고에서 일어난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혜민(17): 다은의 같은 반 친구. 전교 1등. 다은이 일하는 편의점 사장 부부의 딸. 특별과외 멤버.

한결(17): 혜민네 편의점이 입점한 건물 주인의 손주. 특별과외 멤버.

재우(17): 혜민, 한결의 친구. 다은이 일하던 시간에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감. 특별과외 멤버.

연주(17): 다은의 친구. 다은이 죽고 난 후, 특별과외에 합류함.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고등학생 ‘다은’이 안전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편의점 사장의 딸인 ‘혜민’과 편의점에 세를 준 건물주의 손주인 ‘한결’은 이 죽음이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다은의 친한 친구였던 ‘연주’는 혜민과 한결의 특별 과외에 합류해 그들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 특별과외 멤버였던 ‘재우’는 과외를 그만두는 것으로 자신이 친구들과 다름을 보여주고자 한다. 죽은 친구보다 다가오는 중간고사가 더 중요한 아이들. 굳게 닫힌 다은의 사물함에서 참을 수 없는 냄새가 진동한다.

왼쪽부터 연주, 다은, 한결, 재우, 혜민을 연기한 배우들(출처: 연극 스틸컷. 촬영 차채은)

(*이 글은 연극 <사물함>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1월, 연세대학교 무악극장에서 사회과학대학 극회 '토굴'이 연극 <사물함>(작가 김지현, 연출 차채은)을 올렸다. 작가는 세월호 사건 때 어른들이 지켜내지 못했고, 여전히 보호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했다. 막을 수 있었으나 막지 못했고, 누군가 책임져야 했으나 책임지지 않았고, 애도할 수도 없었던 죽음. 연극이 뜻밖에 무거운 시의성을 띠게 될 줄, 연극을 기획하던 때에는 알지 못했다. 공연을 준비하던 10월 29일,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158명이 숨지고 196명이 다쳤다(MBC뉴스, 2022.11.14 기준). 현실을 담아낸 연극이 다시 현실에 펼쳐졌다. 수많은 다은이 스러졌다. 혜민과 한결과 연주와 재우에게 ‘그만 슬퍼하고 할 일이나 해’라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필자의 귀에도 들려왔다. 연극 <사물함> 속 아이들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오는 듯했다. 필자는 가까스로 그들에게 답할 말을 짜내야 했다. 우리는 애도해야 한다고. 애도란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이 우리 세계를 만들어왔음을 깨닫고, 서로에게 생을 의탁하는 인간의 본질을 인식하는 과정이라고.


<애도란 무엇인가>


혜민: 딴 애들이 수군대지 않을까?

한결: 눈치보는 게 더 웃겨. 우리는 놀면 안 되냐? … 우리 잘못도 아닌데. 꼭 너랑 내가 잘못한 거 같잖아. 벌써 보름이나 지난 일을.

다은이 죽은 후, 부모들은 한결과 혜민에게 심리상담을 받게 한다. 한결은 상담을 받느라 과외를 중단하고, 친구들이 자신과 혜민을 두고 수군대는 이 상황이 불만스럽다. 한결에게 과외를 재개하는 것은 다은의 죽음으로 멈춰있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것, 애도의 시간을 끝맺는 것과 같다. 프로이트(S. Freud)는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어서 우리 곁을 떠나면 그와의 감정적 고리를 끊음으로써 그에게 투자했던 심리적 에너지를 회수해 다른 사람한테 다시 투자해야 한다고 보았다. 『영어영문학』에 실린 왕철의 논문 「 프로이트와 데리다의 애도이론-“나는 애도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에 따르면, 프로이트적 맥락에서 애도란 상실한 자를 향한 리비도(성충동)를 거두어 다른 타자, 또는 자기 자신 등 살아있는 자에게 투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작업이다. 그에 따르면 상실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다른 살아있는 자를 사랑할 때, 슬픔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프로이트는 상실의 슬픔에 빠져있는 시기를 ‘병리적 상태’로 묘사한다. 사회는 죽음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될 경우, 그 사람의 부재를 슬퍼하되 과도하게 집착하지는 말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훌훌 털고 일어나 이 후의 삶을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면 정상, 그렇지 못하면 비정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전자는 애도에 성공한 경우고, 후자는 애도에 실패한 경우다.

 과외를 쉬고 상담을 받는 2주는 부모들이 정해준 애도의 기간이다. 한결은 다은의 죽음이 그와 무관하다고 믿고 애도하지 않는다. 혜민은 다은의 죽음에 마음이 무겁지만, 자신을 향하는 다른 친구들의 시선이 더 신경쓰인다. 2주가 지난다. 한결과 혜민은 과외를 재개하고, 어른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잊고, 내 할 일 열심히 하는 게 부모님 도와주는’ 거라고 한다. 한결은 다은을 상실해 흐트러진 시간을 끝내고 일상으로 복귀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실은 한결 본인에게도, 다은의 죽음은 끝나지 않은 듯하다.


<어떻게 애도해왔는가>


편의점에 안전 문제가 있다는 것이 여러 차례 암시된다. 창고에서 물건이 자꾸 떨어진다며 무서워하던 다은은 결국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막을 수 있었고 또 막아야 했던 죽음이다. 다은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이유는 점주(혜민의 부모)가 안전문제를 알고도 방치했고, 청소년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취약한 위치에서 다은은 자신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다은의 죽음을 초래했다. 그렇기에 다은의 죽음은 사회적 재난이 된다. 연구자 문강형준의 「재난 시대의 정동: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따르면, 애도라는 정동이 정치적 성격을 가지려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희생자가 눈에 보여야 하는 가시성, 죽음을 유발한 원인에 관한 책임소재의 확정, 마지막으로 상실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할 제도적 변화의 요청이 그것이다. 사회적 참사에 대한 정치적(공적) 애도란 애도해야 할 희생자를 특정하고, 막을 수 있었던 죽음을 막지 못했던 책임을 묻고, 그들을 처벌하고 재발을 방지할 대책을 요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 사회가 겪었던 사회적 재난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스러진 생명 앞에 어떻게 애도해왔는가. <사물함> 속 아이들의 뒤틀린 목소리가 우리의 현실을 재현하는 듯하다.


<사물함> 속 다은은 그가 생전에 남긴 인스타그램 라이브의 형태로 무대에 오른다. 다은의 죽음은 자극적인 컨텐츠로 소비된다. 희생자는 ‘순수하지 못함’을 이유로 애도받을 기회를 박탈당한다. 다은을 죽게 만든 사회구조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어렵게 만든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애도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다은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탈인간화’된 처지에 놓인다.


재우: 애들이 그러더라. 정다은 사물함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냐고.


다은이 죽고 난 후, 다은이 찍었던 인스타 라이브 영상이 화제가 된다. 다은이 '혼자 쇼하는' 모습은 다은을 재난의 희생자로 애도하는 일을 방해한다. 친구들은 죽음의 책임소재를 밝히는 대신 라이브를 돌려보며 사물함 비밀번호를 알아내려 하고, 사물함에서 나는 냄새를 억측하기 바쁘다. 희생자가 담긴 영상, 그들이 ‘왜 죽었는가’에 답을 줄 것만 같은 컨텐츠를 소비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이라영의 논평 '애도의 윤리'(한겨레, 2018.10.24)이 말하듯,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실’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고통을 대하는 윤리를 압도하는 순간 타인의 고통은 소외된다.


혜민: 생각해 봐. 아르바이트생이 일하러 왔으면 일만 해야지. 영상 찍고 올리고. 근무 태만이잖아. 그리고 동의서에 보호자 싸인도 안 받았대. 걔도 잘 한 거 없어.


‘걔도 잘 한 거 없어’의 수사학은 죽음의 책임을 다은에게 떠넘기며 책임을 회피하는 혜민의 전략이다. 혜민은 다은이 라이브를 찍었던 것을 ‘근무태만’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가족은 ‘차상위’였던 다은을 고용하는 것이 ‘위험한 거 감안하면서, 그래도 힘들어서 써준’ 것이다. 혜민은 자기와 자기 가족에게 죽음의 책임을 묻는 것이 억울하다고 토로한다. 혜민은 ‘사고의 희생자’의 위치에 다은이 아닌 자신을 놓는다. 희생자의 ‘순수하지 못함’을 비난하며, 그 ‘순수하지 못한’ 희생자가 마치 가해자인 양, 애도하지 않는다.


연주: 더 솔직히 말하면 나. 너무 조용해서 온 거야. 다은이가 죽었는데, 지금은 너무 조용하잖아. 한결이나 재우, 아니면 네가 죽었어봐. 그래도 이렇게 조용할 수 있었을까?

다은의 죽음이 애도되지 않는 이유는 다은을 죽게 만든 질서가 혜민이, 한결이 누리는 것들을 만들어낸 규칙이기 때문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폐기 음식 먹방을 찍고 할머니와 둘이 살며 남은 급식을 집에 싸가는 등, 취약계층이었던 다은은 책임을 전가하기 쉬운 대상이다. 경제적 계급의 문제가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연주는 다은이 아니라 혜민이, 한결이, 재우가 죽었다면 다르지 않았겠냐고 묻는다.

주디스 버틀러는 저작 『위태로운 삶』에서 9.11테러의 희생자들과 달리 이라크 전쟁에서 희생된 민간인의 죽음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추모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 ‘애도의 위계’에 대한 논리를 전개한다. 어떤 죽음은 모두가 함께 슬퍼해야 한다는 공적 권위를 부여받는 한편, 어떤 죽음은 정치적, 경제적 논리로 인해 애도의 기회를 상실한다. 이라크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의 죽음은 언론이 보도를 거부했기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부시 정부가 ‘테러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라고 말했기에, 그들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었다. 버틀러는 담론의 거부가 그 결과로서 탈인간화를 초래한다고 본다. 그들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고 애도하지 않을 때, 희생된 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간주된다. 죽은 이가 우리와 같이 이 세상에 존재했던 인간임을 망각할 때, 즉 ‘탈인간화’할 때, 애도할 희생자를 특정하고 함께 바라보는 ‘가시성’의 과제는 좌절된다.


다은의 죽음을 자극적인 방식으로 소비하고 다은을 흠집내는 것으로 책임을 모면하려 해도, 그 죽음이 자신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감각,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중간고사를 준비하는 것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부채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다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임자 찾기는 문강형준이 ‘정치적 애도’에서 언급한 책임소재의 확정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들은 서로를 상처입힌다.


혜민: 너네 건물 안에 있는 거잖아.

한결: 너네 편의점.

혜민: 건물에서 생긴 일이잖아.

한결: 편의점에서 생긴 일이겠지.


한결과 혜민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다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은의 죽음에 대한 부채감을 느끼지만, ‘더러운 건 질색’이라며 특별과외를 나가는 재우도, 다은의 친구였던 자신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특별과외에 들어오는 연주도 그 책임감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재우: 난 걔네랑 달라.

연주: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연주: 나를 모르는 사람한테 나는 다은이 친구일 뿐이고. 나를 아는 사람한테도 나는, 다은이 친구였던 애일 뿐이야.

재우: 더 심한 욕 안 먹는 걸 감사하게 여겨.

연주: 왜 욕을 먹어야 돼?

재우: 네가 선택한 거잖아. 너가 먼저 과외 들어오겠다고 했다며.

아이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묻는 상황이 기이하고 뼈아프게 다가온다. 혜민의 부모는 안전문제를 알고도 방치했다. 한결의 부모는 새로 짓는 건물에 혜민 부모의 편의점을 입점시키는 것으로 건물 관리 소홀의 문제를 입막음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잊고, 할 일 열심히 하는 게 부모님 도와주는 거’라며 애도하지 못하게 한 선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등장하지 않고, 아이들만이 다은의 죽음이 서로의 잘못이라고 비난한다. 결국 다은의 죽음에 책임지는 자는 아무도 없다.


문강형준이 말한 두 번째 과제, 정치적 애도를 위해 책임이 있는 자들을 가려내고 책임소재를 묻는 일은 또다시 좌절된다. 사회적 재난을 애도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다은을 죽게 한 어른들의 책임을 따지고, 다은의 할머니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다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시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희생자를 탈인간화하고 책임을 회피했던 <사물함> 속 아이들은 제도적 변화로 나아가지 못했다.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 진다고 주장했다. 상실은 애도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극복되는 병리적 상태가 아니다. 상실이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은이 떠난 자리, 끊임없이 다은을 환기시키는 사물함처럼. 사회적 재난을 겪은 사회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재난을 애써 잊고 그 이전으로 복귀하려고 해도, 재난은 동시대를 겪은 이들의 마음에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재난을 만들어낸 구조적 문제를 성찰하고,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사죄와 위로를 전하고, 재난을 반복하지 않도록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다은: 제가 다시 안 온다고 얼마나 알아주겠어요? 계속 해달라니까 기분 좋긴 한데, 지금 이렇게 말해도 저 안 오면 그냥 안 온가보다, 하고 말거잖아요. 며칠이나 생각하려나. 며칠이 뭐야. 하루도 안 할 거 같은데. 아마 바로 내일? 다 까먹을 거면서.

연극 <사물함>의 마지막 장면, 처음으로 라이브를 켜본 과거의 다은이 등장한다. 해맑게 이어나가는 다은의 대사가, 다은의 죽음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오버랩된다. 극장을 나서면 곧 다은을 잊어버릴 관객에게 가 닿는다.

재난 희생자들에게,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 ‘잊지 않겠다’라는 말은 제도적 변화가 수반될 때 의미를 얻는다. 사회적 재난의 희생자를 기억하겠다는 말은 그의 죽음을 초래한 재난을 잊지 않고, 그러한 재난이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이다. 재난을 만들어낸 부조리를 성찰하고, 다시는 같은 이유로 사람이 죽지 않게 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사표현이다. 문강형준이 논문에서 말했듯, 애도에서 촉발된 대중의 힘이 열정과 분노라는 적극적인 정동과 결합할 때 우리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사회가 변화하는 일, 곧 재난이 새시대의 변혁으로 이어지는 역전을 기대할 수 있다.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 것인가. 데리다(Derrida)는 ‘슬퍼하고, 다시 정상적 일상으로 복귀하는’ 프로이트식 애도의 실패가 곧 성공적 애도라고 본다. 애도란 죽은 타자와 소통하려는 몸짓이며, 죽은 타자가 우리를 봐주기를 소망하는 마음이다. 타자는 타자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나' 의 형태로 내면화되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애도가 타자를 '마음에 묻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 이라면, 데리다의 애도는 마음 속 타자에게 묻고 그 대답을 기다리는 끝없는 과정이다. 그러니 애도가 끝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애도가 죽은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려고 하는” 무모하고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인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가 타자를 향해 아무리 확장되어도, 우리가 말하거나 행하거나 울먹이는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남아 있으니”(Derrida 1991, 203), 그래서 더욱 그를 향해 손을 뻗어야 하고 달려가야 한다.


수없이 잃었던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멈추지 않을게 몇 번이라도 외칠게

믿을 수 없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아이유, “이름에게”


버틀러는 상실을 통해 인간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존재임을 깨닫는다고 보았다. 인간의 몸은 폭력에 취약하다.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타자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스스로 노출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해왔다. 내 옆의 타자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서로를 인정하고 환대하면서. 나의 세계는,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다른 타자들에게 의탁하고 있다.

상실은 ‘나’의 세계가 깨지지 않게 지탱하는 타자의 역할을 이해하고 관계성을 성찰하게 한다. 내가 너를 잃는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도 이해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나의 세계는 너로 인해 만들어졌는데, 너 없이 나는 누구로 존재해야 하는가? 특히 폭력이나 재난으로 인한 상실을 마주했을 때, 육체적 취약성을 인식하는 것은 타인의 취약성을 배려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죽음을 만들어낸 거대한 질서를 인식하게 될 때, 애도는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투쟁으로 격상될 수 있다.

<사물함>의 퇴장 음악은 아이유의 ‘이름에게’였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왔던 <사물함> 속 아이들과 비슷한 질문을 품고 공연장을 찾았을 관객들에게, 애도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캄캄한 새벽에서 다은을 불러내어 그를 기억하고, 또다른 다은이 죽지 않을 새로운 아침을 찾아가야 한다. 다은을 호명하고 그의 상실을 곱씹으며, 취약한 우리의 몸을 인식하고 다은과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꺼이 세계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답하고 싶었다.


*이 글에 인용된 문강형준 중앙대 전 교수는 2018년 성폭력 의혹으로 고발된 바 있음을 알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32호> Q.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