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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an 26. 2023

<133호> 우리의 슬픔이 종결을 만들 수 있다면.

수습편집위원 빈칸


과거의 얼굴을 한 현재의 재난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4년 10월 21일, 한강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무너져내렸다. 이 사고로 출근하고 있던 시민 49명이 한강으로 추락했고 그 가운데 32명이 사망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5년 6월 29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총 1,445명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사망자는 502명, 부상자는 937명이고, 6명은 실종되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인근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되어 침몰했다. 탑승자 476명 중 172명이 구조되고 304명이 사망 및 실종되었다.


2022년 10.29 참사

2022년 10월 29일 오후 10시 15분경,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턴 호텔 앞 좁은 골목길에서 대형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2022년 11월 14일 오전 6시 기준 사망자는 158명, 부상자는 196명을 기록했다.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재난이 발생했다. 그것도 과거와 아주 비슷한 모습으로. 1994년 성수대교, 1995년 삼풍백화점, 2014년 세월호에 이어 지난 10월 29일 밤까지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거대한 재난 앞에서 인간의 몸은 너무도 유약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이야기하듯이, 이런 재난들은 우리로 하여금 “상실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취약성으로서 몸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쏟아지는 뉴스 보도들을 접하면서, 내가 그 자리에 있기만 했더라면 나도 얼마든지 죽거나 다쳤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때마침 연고전이 열리고 있었고, 그래서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은 이태원 대신 안암에 있었다. 그걸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남은 건 오로지 운이 좋아서였다. 시스템이 아니라 운이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상황 앞에서 나는 무력해졌다. 이런 참사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취약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의 무력이 오로지 내 죽음의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그의 칼럼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죽기 위해 사는 법>, 78쪽)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194쪽)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158명의 죽음은 절대 158명만의 죽음일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일부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참사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나는 참사 이후로 지하철을 꺼리게 됐다. 지하철을 타고 등교하면 버스보다 십 분 정도 일찍 가는데, 수업에 간당간당하게 도착할 걸 알면서도 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타야만 하는 상황이 왔을 때는 숨을 들이켜게 되었다. 참사 직후 9호선을 타려고 스크린도어 앞에서 기다리는데 평소만큼 사람이 많지 않아서 마음이 울렁했다. 전에는 마구 밀어 가며 타던 사람들이 그날은 한 발짝 물러서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걸 보면서 또 한 번 울렁했다. 이 죽음들은 일상의 감각을 바꿔놓았다.



우리는 어떻게 슬퍼는가

우리는 이 거대한 슬픔을 어떻게 소화했을까.

정부는 참사가 일어난 다음날인 10월 30일 브리핑을 통해 “오늘부터 11월 5일 24시까지를 국가 애도기간으로 정해 사망자에 대한 조의를 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여기저기 합동분향소가 설치됐고, 분향소의 위치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렸다. 애도 기간 동안 전 공공기관과 재외공관에서는 조기를 게양했다.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들은 애도를 표하는 리본을 패용했다. 전 부처 지자체 공공기관들은 애도기간 동안 시급하지 않은 행사는 연기하기로 했고, 그에 따라 각종 지역 축제나 공연들이 속속들이 취소됐다.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신촌 연세로에도 ‘버스킹 금지’ 현수막이 걸렸다.


일주일간의 국가애도기간이 설정된 이후 여러 군데서 비판이 일었다. 천안함 피격사건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국가애도기간이 설정되었는데 이 기준은 어디서 오느냐부터 시작해서, 국가가 애도의 기간과 방식을 정할 권리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공연예술 금지는 온당한 처사인지까지. 혹자는 국가애도기간을 ‘애도의 계엄령’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고 싶은 부분은 다른 데 있다. 국가애도기간은 국민에게 정해진 방식으로 애도하라고 강제하기도 하지만, 애도의 종료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애도기간은 프로이트적인 관점에 입각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상실을 겪고 슬픔에 빠져 있는 상황을 비일상적이고 병리적인 상태로 진단한다. 따라서 상실을 경험한 자는 죽은 자에게 투자했던 리비도를 살아있는 자에게로 옮겨오는 과정을 거쳐 슬픔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애도를 끝맺고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애도기간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국가애도기간은 11월 5일까지 슬퍼하고, 11월 6일부터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너 이 정도 슬퍼해. 그만하면 됐어. 이제 상실은 끝났어. 다 고쳐졌어. 이제 돌아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10.29 참사와 같은 죽음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면,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외면이나 회피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애도가 취약하고 무력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애도가 취약하고 무력하지 않으려면, 참사의 반복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연구자 문강형준은 애도가 정치적 성격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첫째는 희생자가 눈에 보여야 하는 가시성, 둘째는 죽음을 유발한 원인에 대한 책임소재의 확정, 셋째는 상실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할 제도적 변화의 요청이다.

가장 먼저, 한 사람 한 사람이 ‘희생자’로서 가시화되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참사 직후, 피해 당사자들은 이런 비난을 마주해야 했다. “그러게 왜 서양 명절에 거길 놀러 가느냐” “사람 많을 거 뻔한데 왜 갔냐” 놀다가 죽은 거 아니냐”는 폭력적인 말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메아리쳤다. 이런 말들 속에서, 참사로 인해 죽고 다친 이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그냥 어쩌다 보니 안타깝고 어이없게 죽은 사람들’이 됐다. 국가애도기간 설정 이후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서도 희생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가시성의 과제가 좌절된 것이다.

다른 한편, 희생자 전원의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시민언론 민들레 “희생자들을 기리는 데 호명할 이름조차 없이 단지 ‘158’이라는 숫자만 존재한다는 것은 추모 대상이 완전히 추상화된다는 의미”라고 밝히면서, 지난 11월 14일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 그러나 희생자 명단은 유족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공개됐다. 물론 희생자 한 명 한 명을 가시화하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요한 과정을 건너뛰고 재빠르게 공개하는 데만 집중하는 일방적인 명단 공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뼈아픈 사회적 죽음이었기에, 더더욱 유족의 이야기를 경청했어야 했다. 이처럼 좋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해서였지만, 그래도 현재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어느 정도 희생자를 희생자로서 가시화하는 데까지는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가시성의 조건을 충족했다면, 그다음으로는 참사의 책임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 가장 먼저 참사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목되었던 것은 한 남성이었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참사 직후 온라인에는 ‘토끼 머리띠 남성’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5~6명의 무리가 주도해 사람들을 밀기 시작했다” “토끼 머리띠를 한 남성이 밀라고 소리쳤다” “‘밀어!’ 소리 후에 사람들이 넘어지기 시작했다” 등 증언이 등장했고, 일부 네티즌들은 ‘토끼 머리띠 남성’ 찾기에 열중했다. 그러나 경찰청 특별수사본부는 남성의 휴대전화 위치와 CCTV 영상 등 자료를 확인하고 ‘혐의없음’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 일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박희영 서울 용산구청장은 지난 10월 31일 용산구 녹사평역 광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한 뒤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 이건 축제가 아니다. 축제면 행사의 내용이나 주최 측이 있는데 내용도 없는 그냥 핼러윈 데이에 모이는 일종의,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축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청 차원에서 관리할 의무가 없었다는 것이다.

행정안전부는 10.29 참사 다음 날인 10월 30일 각 지방자치단체에 사고 이름을 ‘이태원 사고’로 통일하고, 피해자 대신 “사망자” 혹은 “사상자”로 쓰라는 내용의 공문을 내려보냈다.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라는 의미를 담은 ‘참사’ 대신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뜻하는 ‘사고’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강제하는 것은, 결국 이 사안에 대해 누구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암묵적이면서도 명시적인 의견 표명이다. 그 누구도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참사 발생 25일 만인 11월 23일, 여야는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국정조사가 제대로 진행된다면 참사의 책임소재를 명확히 할 수 있을 테다.



우리의 슬픔이 종결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럼 이제 우리의 애도는 어디를 향해야 할까. 문강형준은 애도의 최종적 단계로 제도적 변화를 제시한다. 과거와 똑같은 이유로 사람이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제도적 변화다.


번역가 황석희는 11월 2일 인스타그램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giving them a closure”라는 표현이 있다. 직역하면 “종결을 주다”라는 뜻인데 사법의 영역에선 관계 당국이 범인을 잡아 정당한 죗값을 치르게 하여 피해자, 혹은 유가족에게 일종의 ‘맺음’을 주는 것을 말한다. (...)
남겨진 자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은 타인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외부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납득할 수 있는 종결을 주는 것이다.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책임을 묻고, 사후 조치를 확인시켜 주는 것. 유가족에겐 저런 시스템상의 종결이 완전한 종결이 되지 못함을 너무나도 잘 안다. 다만 그런 종결이라도 있어야 개인적인 맺음을 향한 첫걸음이라도 뗄 수 있다. 그 걸음이 평생이 걸리더라도 그 계기는 될 수 있다. (...)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납득할 수 있는 종결이다.


이런 작업은 일주일 만에 이뤄질 수 없다. 애초에 기간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우리의 애도는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끊임없는 실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제까지 슬퍼하고만 있을 것이냐?”라는 지극히 프로이트적인 질문에, 이제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우리의 슬픔은 과거의 재난이 반복되지 않도록 막는 데 있다. 따라서 애도는 ‘끝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애도의 기억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사회가 존속하는 것은 애도의 지속이 될 테다.

그리고 애도하는 우리에게는 ‘납득할 만한 종결’을 만들어낼 충분한 힘이 있다. 그것이 온전한 마침표이자 모든 슬픔의 끝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의 슬픔이 변화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유가족들에게 반점을 찍어줄 수는 있지 않을까. 숨 쉴 틈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문형준. 「재난 시대의 정동: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여성문학연구』 제35호, 2015, 42쪽.

정경훈, 「애도, 우울증, 상실을 다시 생각하다 : 프로이트, 라캉, 클라인, 신경과학의 통합적 접근을 향하여」. 『현대정신분석』, 제23(2)호, 2021, 116쪽.

조주영, 「‘취약성’ 개념을 통한 상호주관적 인정관계의 재구성 : 인정에 대한 버틀러의 논의를 중심으로」, 『한국여성철학』, 30호, 2018, 48쪽.


“10.29 참사(이태원 참사)에 대한 한국심리학회 성명서”, <한국심리학회>, 2022년 10월 30일.     

“삼풍백화점붕괴사고(三豊百貨店崩壞事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0.

“성수대교붕괴사건(聖水大橋崩壞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0.     

"11월 5일까지 국가 애도기간…공공기관·재외공관에 조기 게양”,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2년 11월 24일 - 접속날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 <한겨레> 2016년 10월 14일,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5782.html, (2022년 11월 24일 – 접속날짜)

“오늘부터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대통령실 일부 포함 45일간”, <조선일보>, 2022년 11월 23일, https://www.chosun.com/politics/politics_general/2022/11/23/V5OMXEXIDVGWLAZA3LNFTO3NFI/, (2022년 11월 29일 - 접속날짜)

“용산구청장 "역할 다 했다"‥"축제 아니라 현상"”, <MBC뉴스>, 2022년 11월 1일,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today/article/6422633_35752.html, (2022년 11월 25일 – 접속날짜) 

“이태원 참사 사망자 1명 늘어 158명… 부상 196명”, <한겨레>, 2022년 11월 14일,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1067075.html, (2022년 11월 24일 – 접속날짜)

“‘이태원 참사 ‘토끼 머리띠’ 남성 “얼굴 공개한 사람들 다 고소”, <중앙일보>, 2022년 11월 7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15219#home, (2022년 11월 25일 - 접속날짜)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합니다”, <민들레>, 2022년 11월 28일, http://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7, (2022년 11월 30일 – 접속날짜)

“‘참사’ 아니라는 행안부…이태원 압사에 “사고” 또 책임 회피”, <한겨레> 2022년 11월 1일,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65282.html, (2022년 11월 25일 - 접속날짜)

“'토끼머리띠男' 무혐의…특수본, 토끼머리띠女·각시탈男 찾는다”, <중앙일보>, 2022년 11월 7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15473, (2022년 11월 25일 – 접속날짜)


“가족 잃은 자를 위한 종결”, 번역가 황석희 인스타그램, 2022년 11월 2일. https://www.instagram.com/p/Ckci5k8Lm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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