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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134호> 취미열전 Ⅰ

수습편집위원 빈칸, 초록

by 연세편집위원회
KakaoTalk_20230412_021718617_03.png 흰색 배경에 연두색 박스가 가운데 위치해 있다. 연두색 박스 안에는 짙은 초록색으로 '취미열전'이 적혀 있고, 박스 바깥에는 로마자로 숫자 1이 적혀 있다.


수습편집위원 빈칸 avecyr@yonsei.ac.kr

사람들에게 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면 꼭 돌아오는 질문이 몇 가지 있다.

Q. 언제부터 그렇게 꽃을 좋아했어?

A.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Q. 무슨 꽃을 제일 좋아해?

A. 그때그때 다릅니다.

Q. 나 꽃 추천해 줄 수 있어?

A. 예? 제가요?

꽃을 좋아한다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얼렁뚱땅인 것 같지만, 꽃을 좋아하는 마음은 주변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사람으로서 내가 어떻게 꽃을 즐기는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산책과 함께하는 꽃구경

산책하면서 꽃 사진을 찍으면 나이가 든 거라고 어느 드라마에서 그러더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20대에 이미 산신령이 된 걸지도. 이 글을 쓰려고 갤러리에 ‘꽃’을 검색했더니 사진이 이천 장 넘게 나왔다. 길을 지나가다 꽃을 발견하면 “어! 이거 00이다!”라고 하고 사진을 찍는 게 내 버릇이다. 그럴 때마다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그 자리에서는 그냥 내가 꽃을 좋아해서 기억하게 된다고 답했다. 그렇지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꽃을 하나하나 기억하면, 지지부진해 보이기만 하는 일 년이 정확한 이미지로 잡힌다. 꽃의 이름과 생김새, 피는 시기가 각각 계절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겨울이 지겨워질 때쯤이면 매화1가 봄을 알린다. 개강할 때가 되면 산수유2와 개나리가 핀다. 버스를 타고 정문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노오란 꽃들은 학교 가기 싫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여 준다. 개강에 익숙해지면 언더우드관과 연희관 앞에 목련3이 흐드러진다. 그다음으로 피는 건 벚꽃4. 꽃말은 중간고사라던가(그렇지만 기후위기의 여파인지, 최근 몇 년은 벚꽃의 꽃말이 개강 5주 차가 된 것만 같다). 벚꽃이 필 때쯤이 되면 조팝나무5 이팝나무6와 라일락7 튤립8이 너 나 할 것 없이 여기저기 핀다. 오월이면 새빨간 장미9가 존재감을 뽐내고, 유월이 되면 수국10과 해바라기가 초여름을 알린다. 여름에 길을 걷다가 발치를 잘 살펴보면, 핑킹가위로 꽃잎 끝을 자른 것 같이 생긴 패랭이꽃도 찾아볼 수 있다. 날이 쌀쌀해지면 국화가 가을 냄새를 풍긴다. 겨울이 오면 다른 꽃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지지만, 그래도 동백11만큼은 여전히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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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1 매화, 2 산수유, 3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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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4 벚꽃, 오른쪽은 5 조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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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차례대로 6 이팝나무, 7 라일락, 8 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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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차례대로 9 장미, 10 수국, 11 동백

게다가 계절에 상관없이, 꽃을 관찰하는 일은 즐겁다. 붉은 철쭉의 꽃잎 안쪽에는 흰색 무늬가 있는데, 흰 철쭉에는 연두색 무늬가 있다는 걸 발견할 때 신기하다. 꽃잎이 다섯 개인 ‘럭키 라일락’(일반적으로 라일락 꽃잎은 네 개다)을 찾으려고 라일락 나무 앞에서 한참을 찾아보게 된다. 얼핏 보면 비슷하게 생긴 매화와 벚꽃과 살구꽃과 복숭아꽃을 구분해내는 뿌듯함이 있다. 나는 더 많이 알게 되면 세상의 해상도가 높아진다는 말을 믿는다. 그래서 세상의 아주 세밀한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즐겁다.



꽃시장 나들이 다녀오기

주변 산책만으로는 부족하다! 실내에서도 꽃을 즐기고야 말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든다면 꽃시장에 다녀올 때가 왔다. 서울에는 꽃시장이 여러 군데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고속터미널 꽃시장만 여러 번 가봤기 때문에, 고속터미널 꽃시장을 기준으로 작성해보려고 한다.

고속터미널 꽃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면, 서로 다른 꽃집 열다섯 군데를 한 번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넓고, 꽃이 많고, 종류가 다양하다. 일반적으로는 꽃시장 하면 생화를 떠올리지만 조화 코너도 생화 코너만큼이나 넓다. 꽃과 관련된 물품이라면 꽃병부터 시작해서 포장지, 리본, 바구니까지 모두 구비되어 있다. 그렇지만 역시 내 관심사는 생화다. 산책과 마찬가지로, 꽃시장에서도 사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봄에 방문하면 프리지아나 튤립, 카네이션 같은 꽃들을 만나볼 수 있고, 여름에 가면 작약, 해바라기, 수국, 작약, 스위트피 같은 꽃들이 들어와 있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리시안셔스나 장미 같은 꽃들은 사계절 내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지만 꽃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다양성을 자랑한다. 리시안셔스는 매번 꽃시장에 갈 때마다 흰색, 연두색, 연분홍색, 진분홍색, 연보라색, 흰색과 보라색이 섞인 것까지 색이 다양했다. 장미는 더하다. 처음 꽃시장에 갔을 때 ‘가브리엘라’니 ‘마르코 폴로’니 ‘마릴린 먼로’니 하는 장미 품종들이 다 다른 꽃의 이름인 줄 알았을 정도니 말이다. 그만큼 꽃시장에서는 꽃집에서 찾기 어려운 여러 종류의 꽃들을 만나볼 수 있다.

꽃시장에 있는 수많은 꽃 중에서 마음에 드는 꽃을 골랐다면, 이제 꽃을 다듬을 시간이다. 나는 꽃을 정리할 때마다 미나리 같은 나물을 다듬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접근한다. 우선 바닥에 신문지를 펼쳐두고, 마음속으로 구역을 나눈다. 첫 번째 구역은 아직 다듬지 않은 꽃, 두 번째 구역은 다 다듬은 꽃, 마지막 세 번째 구역은 버려야 할 잎이나 줄기들을 모아두는 곳으로 정한다. 구역을 다 정했다면 가장 먼저 잎부터 다듬기 시작한다. 잎은 맨 위쪽에 있는 두세 개를 제외하곤 모두 떼어낸다. 이때 줄기 방향대로 잎을 죽죽 내려버리면 줄기 겉면이 벗겨지기 때문에, 줄기와 수직이 되는 방향으로 떼어내야 한다. 잎을 모두 정리하면 꽃을 꽃병에 담아 보면서 줄기의 길이를 결정한다. 마지막으로, 줄기 끝을 사선으로 자른다. 줄기 끝부분의 표면적이 넓어져서 물올림이 잘 되기 때문에 꽃을 좀 더 오래 즐길 수 있다.

꽃시장에서 꽃을 데려오면, ‘그냥 꽃’이 될 수도 있었던 게 ‘내가 직접 고르고 다듬어서 꽂아둔 꽃’이 되어서 꽃 한 다발이 더 소중해진다. 그래서인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한참 노려보다가도, 고개를 잠깐 돌려 꽃병에 꽂힌 꽃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금세 평화로워진다. 다른 사람들도 식물에 눈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한다.



<꽃시장 입문을 위한 간단한 Q&A>

Q. 꽃집과 꽃시장의 차이는 뭔가요?

A. 꽃집은 소매, 꽃시장은 도매다. 그래서 꽃시장은 꽃집보다 꽃이 훨씬 싸고, 싱싱하고, 다양하다. 그렇지만 꽃을 구매할 때 꽃시장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꽃집에서는 꽃을 알아서 포장해 주시지만, 꽃시장에서 꽃을 포장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목적에 따라 꽃집에 갈지, 꽃시장에 갈지를 결정하면 된다. 여러 종류의 꽃을 조금씩 조합하고 싶거나 꽃다발 포장이 필요하다면 꽃집에 방문하면 된다. 반대로 한두 종류의 꽃을 사서 오래오래 보고 싶거나, 포장이 필요 없다면 꽃시장이 더 적합하다.


Q. 꽃시장에 갈 때 준비해야 할 게 있나요?

A. 꽃시장에 가서 꽃을 살 예정이라면, 현금결제 혹은 계좌이체를 준비해 가야 한다.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수증 처리는 해달라고 하면 해주시는 걸로 알고 있다(하지만 나는 쫄보라 한 번도 요청해보진 못했다).

또 중요한 것 한 가지. 흰 바지는 금물이다. 꽃집에 가면 줄기의 끝부분을 포장재로 잘 감싸 주지만, 꽃시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고무 물통에 꽂혀있는 꽃을 꺼낸 뒤 신문지로 둘둘 감아서 주시는 게 끝이다. 그 말인즉슨, 줄기 끝에서 물이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자칫하면 바지에 풀물이 들 수 있다. 나는 꽃시장에 흰 바지를 입고 갔다가 연두색으로 염색한 전적이 있다. 만약 바지 군데군데 연두색 염색을 원하는 힙스터라면 흰 바지 착용을 시도해봐도 좋겠다.


Q. 꽃을 물병에 다 꽂았는데, 더 신경 써줘야 할 게 있나요?

A. 꽃병의 물은 매일 갈아주는 게 좋다. 꽃병 안에 담겨있는 물이 깨끗해 보이지만, 사실은 줄기에서 나오는 물이나 시들어서 떨어지는 이파리 같은 것들이 섞여서 생각보다 탁하다. 매일 갈아주면 꽃을 더 오래 볼 수 있다.

또, 차가운 물에 꽃을 꽂아야 더 오래간다. 여름에는 쉽게 물 온도가 올라갈 수 있으니 꽃병에 얼음을 넣어주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지만 너무 욕심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수준으로 얼음을 넣으면 안 된다. 꽃이 놀라서 오히려 시들어버릴 수 있다. 꽃병의 크기에 따라 적당히 한두 개 정도만 넣을 것.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 중 하나인데, 꽃은 직사광선에 취약하다. 햇빛이 꽃잎을 투과하는 모습은 무척 아름답지만, 필요한 만큼 감상한 뒤에는 그늘로 옮겨주는 게 좋다.


Q. 꽃이 다 시들어버렸어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

A. 꽃은 음식물쓰레기가 아니라 일반쓰레기로 버려야 한다. 꽃이 다 시들었다면 눈물을 머금고 종량제 봉투에 고이 넣어준다. 꽃을 정리하고 나면 꽃병의 물을 비워내고, 물병도 안쪽까지 뽀득뽀득 씻는다. 앞서도 말했듯, 꽃병의 물은 생각보다 더러우므로 꽃병도 세척이 필요하다. 세척을 마치고 꽃병을 햇볕에 잘 말리면 다음 꽃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다 끝났다고 볼 수 있다.






편집위원 초록 annerosemary@naver.com

고어텍스 등산복은 없다. 등산용 장갑도, 선글라스도, 등산스틱도 없다. 발에 잘 맞는 트레킹화 하나 신고 훌쩍 한 바퀴를 돌았다. 어디를? 서울을 크게 도는 157km의 서울둘레길을.



서울에 있는 둘레길

'서울' 하면 하늘을 찌르는 빌딩숲과 도로를 달리는 차들, 밤에도 환한 메트로폴리탄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사실 서울은 세계의 도시들 가운데 산이 무척 많은 축에 속한다. 예로부터 한양도성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싼 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북악산을 내사산(內四山)이라, 도성 외곽 각 방위에 위치한 용마산/아차산, 관악산, 덕양산, 북한산을 외사산(外四山)이라 불렀다. 이 외에도 일자산, 삼각산, 우면산, 수락산 등 많은 산들이 '서울'이라는 행정구역 내에 자리잡고 있다. 하천 역시 풍부하다. 한강을 비롯해 중랑천, 성내천, 안양천, 양재천 등이 흐른다. 서울의 산과 강을 끼고 마을이 들어섰고, 사람들의 역사가 쌓이며 산과 강과 마을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었다. ‘숲길’, ‘하천길’, ‘마을길’로 구성된 서울둘레길은 그 이야기를 따라 서울을 빙 둘러 있다. 156.5km의 길을 걷는 동안 서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내 안에 쌓인다.



서울둘레길 1~8코스

서울둘레길은 산과 강을 경계로 총 8개의 코스로 나뉜다.

각 코스마다 길이와 난이도와 볼 수 있는 자연/문화유산 등이 다르다.

1코스는 수락/불암산을 끼고 늘어진다. 2코스는 예술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망우묘지공원을 거쳐 아차산 자락으로 내려온다. 온갖 괴담의 무대였다던 ‘망우리공동묘지’가 멋스럽게 재탄생해 방문객을 반긴다. 3코스는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지나 완만한 일자산으로 안내한다. 4코스는 대모/우면산 코스. 강남의 마천루가 그리는 스카이라인과 투박한 산길이 멋진 불협화음을 낸다. 5코스는 ‘샤’자 모양 서울대학교 정문을 지나 관악산으로 이어진다. 겨울에 5코스를 걸었던 필자는 새하얀 설산의 고요가 아직 생생하다. 6코스는 한강의 지류하천 중 하나인 안양천을 따라 걷는다. 안양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두물머리는 바다를 연상시킬 만큼 강물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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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코스에서는 월드컵공원 메타세콰이어길을 걸은 다음, 마포문화비축기지를 끼고 봉산/앵봉산 산길로 접어든다. 날것 그대로의 자연도 좋지만, 사람들이 복작복작 만들어놓은 공원과 건축물 역시 사랑스럽다. 길이가 가장 긴 8코스는 서울이 북쪽 끝을 맞댄 북한산을 둘러 나 있다. 평창동의 으리으리한 저택부터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잠들어있는 4.19 국립묘지까지 흔치않은 볼거리가 기다린다.



서울둘레길을 걷기 전에

집에서 가깝거나 좋아하는 코스만 돌아도 좋지만, 기왕 서울둘레길을 완주하기로 했다면, 우선 스탬프북을 마련해야 한다. 실물 스탬프북은 1코스 시작지점인 서울둘레길 안내센터 (창포원), 양재 시민의 공원에 있는 서울둘레길 안내센터 (양재), 아차산관리사무소, 관악산관리사무소, 그리고 서울시청 1층 열린민원실에서 무료로 받을 수 있다. 또한 서울둘레길 어플을 통해 QR코드로 스탬프를 받는 것도 가능하다. 28개의 스탬프를 모두 찍으면 서울둘레길 완주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스탬프북과 안내지도를 챙겨가자.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 가운데에서는 이미 등산을 취미로 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다양한 등산장비를 갖춰두신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필자에게 장비라고 할 만한 것은 트레킹화 하나 뿐이었다. 그래도 충분하다.

한 번 다른 운동화를 신고 갔다가 그날 밤 발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겪어본 바, 발을 잘 받쳐주는 아웃도어화는 갖추는 것을 추천한다. 등산스틱이 꼭 필요한 가파른 코스는 많지 않지만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 필자는 필요한 경우 산에서 나뭇가지를 주워서 등산스틱처럼 짚고 다녔다. 물, 김밥과 간식, 안내지도와 스탬프북을 넣은 작은 배낭을 챙기자. 반팔 한 장으로 충분한 여름이 아니라면 옷을 겹겹이 입어 상황에 따라 체온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 참, 만약 겨울에 눈이 쌓인 산에 간다면 아이젠(스파이크)은 필수다.



서울둘레길을 걸어보자

서울둘레길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접근성이다. 모두 서울 내에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둘레길은 내가 걷기를 시작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자가용보다 대중교통이 훨씬 편리하다. 필자의 경우 미리 어디부터 어디까지 걸을 것인지를 계획해두고 오고 갈 때 이용할 대중교통을 찾았다.

시작지점을 찾았다면 그때부터는 표식을 찾아야 한다. 주황색 리본이나 안내판, 바닥의 표식 등 다양한 길잡이가 우리를 이끈다. 길잡이가 아주 촘촘히 늘어서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길 잃을 염려가 없다. '어, 왜 표식이 없지?'라고 생각하면 보통 이미 길을 잘 못 든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필자가 심각한 길치라 그 촘촘한 안내판에도 불구하고 몇 번 길을 잃었기 때문인데, 그럴 때는 네이버 지도를 켜서 걷고 있는 둘레길 코스를 입력하고 현위치를 확인해보면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서울은 웬만한 산 정상에서도 인터넷이 된다.

한참 걷다보면 스탬프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반가운 존재, 빨간 우체통이 보인다. 빨간 우체통에서는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각 스탬프에는 지역을 나타내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 재미를 더한다. 이를테면 아차산 스탬프에는 온달과 평강공주가 그려져 있다.



걷는다는 것

둘레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2020년 초부터였다. 코로나19가 세상을 덮치며 헬스장은 문을 닫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위험한 일로 취급되던 때였다. 그때 둘레길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산 중턱에서는 슬그머니 마스크를 벗고 숨을 맘껏 쉬었다. 신선한 바깥 공기를 크게 들이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꽤나 신나고 해방감이 들었다. 갈 때마다 짧게는 5km, 길게는 20km 가까이도 걸었고, 운동으로 덥혀진 몸과 뭉근한 근육통은 묘한 성취감을 주었다. 시키는 사람도 보상도 없지만 시간을 내어 산을 찾고 길을 걷고 그렇게 서울을 한 바퀴 돌았다.

걸을 땐 내 생활을 한 걸음 바깥에서 볼 수 있었다. 생각이 많을 땐 비우고, 생각을 해야 할 땐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산에서 분노를 달랬고 강변에서 두려움을 마주했고 마을길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길을 잃는 연습을 했고, 충분히 당황하되 빨리 다시 길을 찾는 연습을 했다. 길을 잃고 찾는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여정임을 깨달았다. 인간을 삶 쪽으로 밀어주는 무언가 있다면, 나에게는 길을 걷는 일이 그 무언가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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