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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Mar 29. 2020

<123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기고자 최한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수험생활이 이어지면서 나의 세계는 섬이 되어가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보신각에서는 제야의 종이 울렸고, 작년의 마지막 나는 텔레비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면 너머에는 새해를 기념하기 위해 종 앞에 모여든 사람이 있었다. 종이 치기를 바라며 모인 사람을 보며, 문득 내가 일하기를 희망하는 행정과 종소리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 울리고서야 새해인  알았습니다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시간을 헤아리는 일은 예전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던 듯싶다. 백여 년 전 조선에 발을 들였던 의사 알렌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종각의 큰 종이 울리면 문이 닫힌다. (…) 관리와 그 수행원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남자도 밤거리에 나올 수가 없다.” 조선 초 세종실록에서는 자격루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기계의 한 끝이 통 안으로부터 스스로 시간을 맡은 신의 팔을 치받으면, 곧 종이 울린다.” 왕명을 받고 자격루에 관한 글을 지은 김빈은 이렇게 평가한다. “종과 북과 징 하나씩을 나누어 가지고서 닭의 울음 대신하니, 그 소리 질서 있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통일신라로 가면, 종은 단지 시간을 알리는 그 이상의 역할을 갖고 있었다.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성덕대왕신종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고 한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바깥을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으며,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하므로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설을 열어서 삼승의 심오한 가르침을 관찰하게 하고 신령스런 종을 내걸어서 일승의 원만한 소리를 깨닫게 한다(夫至道 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 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 是故 憑開假說 觀三眞註 之奧載, 懸擧神鍾 悟一乘註 之圓音.).”

    결국 사바세계에 사는 인간이 피안의 진리를 직접 깨닫기는 어려우니, 이를 감각적 경험으로 전달해 주는 게 바로 종소리의 역할이 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12월 31일과 1월 1일은 종소리가 있기에 전혀 다른 시간이 된다. “장미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을 알고/무궁화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인 줄을 알고”(황인찬, 「아카이브」 중에서) 종이 치는 것을 보며 새해인 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때 보신각에 모여든 사람들은 종소리를 들었기에 새해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꽃이 지고서야 봄인 줄 알았다는 누군가의 한탄처럼, 시간은 종소리가 울리고서야 비로소 감각화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정치와 행정에 대한 유비이기도 하다. 추상적이고 때로는 애매모호한 공익과 가치는, 땀과 종이로 이루어진 행정을 통해서만 실재가 된다. 2008년 이전의 여성들은, 동사무소에서 호적등본을 떼면서 이 땅이 어느 한 쪽에게 편파적인 공간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떤 남성들은, 2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통장에 찍히는 군인 월급을 보며 이 나라가 자신을 이 정도 값으로 치부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2020년의 우한 교민들 역시 전세기를 타면서, 드디어 이 공동체의 시민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마치 보신각에 모여든 이들이 종소리를 듣고서야 2020년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꼈던 것처럼.

    요컨대 나는 현대의 종지기가 되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는 셈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공무원이란 공화국이라는 시민종교의 사제이며, 엄숙한 예식의 집전자이다. 서품을 눈앞에 둔 가톨릭의 사제들은 고개를 숙이고 제단 앞에 엎드림으로써, 속의 세상에서 죽고 성의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오직 신 외의 다른 봉사의 대상은 없다는 준엄한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듯이. 가톨릭에서 신부들이란 “기관으로서 (…) 봉사하도록 부름 받”는 존재이며 그들은 서품식에서 “신앙을 전하는 말씀의 봉사직”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냐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하는데, 흥미롭게도 대법원에 따르면 공무원이 하는 행위는 “본질에 있어서 기관organ행위로서의 품격”을 갖고 취임할 때 그들 역시 이렇게 선서해야 한다.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격히 선서합니다.” 엎드린 신학도가 서품을 받고 신의 종servant로 다시 태어나듯이, 시험에 통과한 시민도 선서와 함께 시민의 공복civil servant으로 재탄생한다.


섬집 고시생

사제들이 신학교로 스스로 들어가 세상과 단절하듯, 고시생도 제 발로 원룸과 고시촌에 들어간다. 많은 미디어에서 고시 공부하는 일을 머리에 끈을 매고 계룡산에 들어가 혼자 수련하는 일로 그리곤 한다. 오늘날에 시험이란 계룡산이라기보다는 관악산 아래의 학원에서 준비하는 것이지만, 여전히 비슷한 한 가지는 있다. 바로 수험생활이란 본질적으로 섬의 생활이란 사실이다. 학원에 와서 강의를 듣고,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 각자의 원룸으로 흩어지는 이들을 보며 꼭 우리는 섬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은 고고孤高하다. 섬이 고고한 이유는 주변의 바다보다 높은 땅이면서, 동시에 마음 댈 다른 땅 하나 없이 홀로 선 땅이기 때문이다. 주변의 바다가 낮아질수록 섬은 더 높아지는 대신 더 외로워진다.

    각자의 섬에서 우리는 모두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 특강을 듣기 위해 오랜만에 들른 학교에서, 같은 강의실에서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마주친 동기는 나를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양해를 구했다. 자기가 최근 일주일간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와 말을 하는 거라 입이 잘 안 떼어진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인간이 다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쩌면 행복이 유예된 삶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만난 수많은 섬의 사람들이 꾸는 꿈, 그들이 딛고 있는 땅 위, 문자 그대로 그들 지상地上 최대의 목표는 바로 섬에서의 탈출이었다. 섬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몹시 간단했다. 1년에 한번 오는 기회에, 창세기의 구절처럼 채점자가 “보시기에 좋”은 종소리를 내는 것. 하지만 한국 대학생의 절반이 공기업과 국가기관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시대에, 기쁨의 종이라는 골든벨을 울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한 조사에 따르면, 종지기가 되기 위해서는 평균 3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미처 눈에 띄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종소리를 탓할 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큰 종을 갖고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작은 종을 가졌다. 누군가의 종은 금속으로 된 종이었으나 다른 이의 종은 나무로 된 종이었다. 돈을 주고 종을 잘 치는 법을 배워온 사람도 있었으며, 그저 묵묵히 자신만의 종 치는 법을 새로이 찾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리는 닿지 못했다는 그 무거운 사실뿐이었다. 좁은 섬에서 자신의 종소리가 어떤지 끊임없이 평가하고 같은 소리를 연습하는 삶. 표준적인 합리적 행위자를 가정하는 고전 경제학의 모델에 따르면, 이는 비용-편익 구조만 잘 갖춰진다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령 합격 후의 기쁨과 효용만 상당하다면, 인간은 그에 맞춰 장기적 시계time horizon 아래서 착실히 계획을 세워 공부라는 비용을 충분히 지불할 수 있다. 하지만 근래 등장한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의 연구는 인간이 생각보다 의지력이 약하고 자기통제능력이 부족한 현실의 행위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1년에 한번 돌아오는 기회를 두고 학생도 취준생도 아닌 고시생이라는 애매한 회색지대에서 3년이 넘게 내면의 본성을 테스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我와 아我의 투쟁

인간의 통제력과 자기조절능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바로 계획할 때의 나와 행동할 때의 나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주인­대리인의 문제다. 주인은 대리인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대리인은 주인의 뜻보다는 자신의 쾌락을 중요시하기에 언제나 문제는 발생한다. 내 삶의 주인은 나 하나지만, 시험 진입을 결정하고 공부를 계획할 때의 나와 공부를 실제로 하는 나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수험생활은 아와 아 사이의 투쟁이 된다. 투쟁이 있다는 것은 승자가 있다는 것이며, 이긴 자가 있다면 반대편에는 진 자가 있다. 결국 나는 끊임없이 상대편의 나를 패배시키는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적막한 산에서는 작은 소리가 굉음이 되듯, 좁은 섬에서 자신의 감정은 곧 세상의 전부가 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왜 모의고사 점수가 떨어졌을까? 점수가 떨어진 나는 한심한 인간이다. 저 친구는 저걸 맞았는데 나는 왜 틀렸지? 틀린 나는 한심한 인간이다. 오늘 늦게 일어났네. 늦게 일어난 나는 한심한 인간이다. 어제는 조금만 더 할 수 있는데도 일찍 들어갔군. 일찍 들어간 나는 한심한 인간이다. 나는 왜 한심할까? 스스로를 한심히 여기는 나는 한심한 인간이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합격수기에서 붙은 이들의 생활은 비슷하게 완벽하지만 아직 붙지 않은 이들의 생활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부족하다. 합격수기 속에는 역경을 딛고 결국 성취를 이루는 초인이 있지만, 현실 속에는 언제나 역경 앞에서 흔들리는 부족한 인간이 있다. 그리고 그 인간이 부족한 이유는 아직 완전히 패배하지 못한, 게으른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처음 친구의 소개로 고시촌에 방문했을 때 잊을 수 없던 모습은 어디나 그득 차 있던 PC방과 노래방이었다. 이것은 반대편 나를 무찌르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오늘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에게 지고 한편으로 나를 이겼는지 보여주는 방증일 것이다. 게으름은 꾸준히 찾아오고, 꾸준함은 게을리 찾아오기에 소모전은 언제나 게으름의 편이기도 하다. 일전에 한 생물학자는 ‘알면 사랑한다’는 제목의 책을 낸 일이 있는데, 사실 그 말은 반만 맞는 일이다. 안티로 돌아선 팬이 더 무섭다는 말처럼, 알면 더 잘 미워할 수도 있다. 상대편의 나를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나이기에, 근면함의 법정에서 게으름을 죄목으로 상대편을 소추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피고는 오늘 웹툰 한 편을 보았습니다. 맞습니까? 예. 유튜브 영상도 한 편 보았지요? 예. 심지어는 친구와 카카오톡까지 했습니다. 맞습니까? 예. 하지만 오늘 계획한 경제학 문제는 다 못 풀었습니다. 맞습니까? 예. 그렇다면 오늘 피고는 계획한 공부는 다하지 못했지만 여가는 거리낌없이 즐겼군요. 맞습니까? 예. 그런데 검사님도 함께 보지 않았습니까? 방청석이 술렁거리고, 피고는 승기를 얻은 듯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당황한 검사는 자신이 끊임없이 소추시켜온 피고의 얼굴이 문득 자신을 닮았음을 깨닫고는 이내 구형을 포기한다. 계속 싸우는 것은 곧 자신의 패배를 선언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므로. 이처럼 끝내 게으름에게 승기를 내주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전쟁을 멈추고 잠정적 타협modus vivendi에 멈춰야 한다. 하지만 구형을 포기한 검사는 왜 하필 피고가 자신이었는지 괴로워했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길 수 있었는데. 도대체 왜.

    막다른 부챗꼴의 공간에서 반대편의 나를 몰다 도착한 부채의 사북자리. 사북자리에 몰린 또 다른 내가 돌아선 반대편에는 자기 연민이라는 탈출구가 있었다. 누군가를 정확하게 미워하는 것은 미움을 받느니 보다 불행한 일이기에,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유치환, 「행복」 중에서)는 말은 뒤집어도 참이다. 하물며 그 미움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므로,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은 대체로 자신이 가장 불쌍하고 억울한 존재라고 믿게 된다. 물론 재밌는 사실은 전업으로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은 동년배 중 대체로 형편이 괜찮은 축에 속한다는 것이다. 내가 경제활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나를 서포트할 누군가가 삶에 언제나 있다는 것. 몇 번의 실패쯤은 허용된 삶은 흔치않은 축복이라는 엄연한 사회적 사실은 내 눈앞의 즉물적이고 개인적인 고통 앞에 희미해진다.


억울한 종從들의 종鐘소리

나 역시도 시험을 준비하면서 인스타그램을 지웠다. 인생은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피드는 언제나 세상을 즐기며 사는 이들의 광채로 눈이 부셨다. 이미 어딘가의 연수원과 남국의 여행지로 떠난 지인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추리닝을 입고 초라히 거리를 걷는 나의 모습과 겹쳐뵀다.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중에서)

    수험생 커뮤니티에서는 쓸데없는 서열과 자격, 생활에 대한 논쟁이 오간다. 사무관과 검사 중 누가 위일까? 5급에 붙으면 의사 배우자 정도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A대학보다는 못하지만 C대학보다는 B대학이 훨씬 낫지 않나? 원룸에서 함께 나오는 고시생 커플은 이번 시험에 붙을 수 있을까? 한국은행하고 기획재정부 중 어느 곳이 더 높을까? … 어떤 말들은 그 말의 내용보다 말을 내뱉은 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드러낸다. 마치 대학을 이야기하던 익명의 유저가 A대와 C대 사이의 B대를 다닐 것처럼. 사회적 사실이 거세된 개인의 고통 앞에서, 대개 그 끝은 나보다 더 나은 이들에 대한 질투거나 나보다 낮은 이들에 대한 우월의식일 뿐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유명한 정의에 따르면 국가는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이다. 동주민센터처럼 겉으로는 유순해 보일지라도, 결국 국가의 본질은 폭력이다. 그래서 베버는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은 결국 “모든 폭력/강권력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는 파우스트의 신세에 처할 것이므로. 행정은 어떨까? 정치가 폭력이라는 악마적 힘이 빛나는 붉은 땅이라면, 행정은 차가운 기술관료들이 지배하는 서늘한 푸른 땅이기에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지 않을까?

    일군의 행정학자들은 적청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들에 따르면 행정은 정치와 분리된 순수한 파란색이라기보다는 보랏빛 영역purple zone이며, 공무원은 사안이 복잡하고 압력이 거셀수록 정치의 붉은 땅에 급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결국 종지기들이 울리는 소리에는 폭력과 강권력이 일정 부분 섞여있는 셈이다. 종을 울리길 원하는 우리는 폭력을 희구하는 하이에나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선언하기 훨씬 전부터 인간은 정치를 해왔다는 사실, 정치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중요한 것은 바로 어떤 폭력을 원하는가의 문제이다. “아빠, 나도 진짜 총 갖고 싶어,/아빠 허리에 걸려 있는.//이 골목에서/한 눔만 죽일 테야.//늘 술래만 되려 하는/도망도 잘 못 치는/아빠 없는 돌이를 죽일 테야.//그눔 흠씬 패기만 해도/다들 설설 기는데,/아빠.”(황동규, 「아이들 놀이」)

    질투와 우월의식에 휩싸인 억울한 종들이 울리는 종소리. 총을 얻는다면 아빠 없는 돌이를 제일 먼저 죽이고, 그놈만 패면 모두가 나를 우러러 보길 바라마지 않는 이들이 종지기에 오르는 사회는, 결국 국가와 깡패가 구별 불가능해진 세계이다. 이것은 사회계약론자들이 꿈꾸듯 절제와 합의로 이루어진 보편적 공간이라기보다는, 경제학자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이 지적하듯 자릿세를 걷는 도적이 국가를 참칭하는 사유화된 영지에 가까울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 반성하지 않는 종소리는, 누구나 귀를 막아도 둥둥 울림으로써 몸으로 듣게 만드는 하나의 고문도구가 된다. 얼마 전 홍콩에서 자유를 외치며 뛰쳐나온 시위대에게 경찰이 초음파로 시위를 무력화시키는 음향대포Long-Range Acoustic Device를 사용한 일은 소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한 편의 우화이다. 음향대포가 종소리로 둔갑하는 폭력의 가장무도회를 피하려면, 결국 종소리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

근대적 시험제도의 비전은 시민들에게 역량평가의 공정한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사농공상이라는 낡아빠진 신분제도를 대체하는 것은 능력주의라는 새로운 기획이었다. 내가 누구로 태어났는지와 관계없이 능력만 된다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공화국res publica의 어원이 ‘모두의 것’이라는 점과도 잘 맞닿아 있다. 하지만 모두의 종소리를 울리는 종지기가 되기 위해서는, 나 개인의 골든벨을 울려야만 한다는 것이 희극이다. 흔히 고시 합격에 따라붙는, 몸을 세우고立身 이름을 드러낸다揚名는 입신양명이라는 단어는 합격의 개인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종지기가 되는 일이 가문의 영광이자 개인의 월계관이 될 때, 시민 모두를 위한 봉사자라는 공복civil servant의 의미는 얼마간 희석될 수밖에 없다.

    우드로 윌슨이 새로운 분과학문으로서 행정학을 규정하기 수천 년 이전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미 행정을 통해 피라미드를 세웠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의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좋든 싫든 우리는 같이, 함께 살 수밖에 없다는 주어진 사실을 받아들이고 지켜온 데 있다. 정체政體로서의 민주주의가 우월한 이유 역시, 우리는 민주주의를 통해 주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하나의 도덕적 체제로서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만들고자하는 하나의 실험이다. (…) 한 마디로 말해, 민주주의는 동료 시민에 대한 사랑, 바로 그것에 관한 것이다. (…) 그것은 긍정적인 무언가, 다시 말해 완전한 자아실현을 추구하고, 행복에 대해 깊이 고민할 뿐만 아니라 모든 다양성이 흘러넘치게 하며, 공동체에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번영을 이룩해낸다.”

    매킨타이어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자신의 행위와 실천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동물이다.” 이야기의 관점에서 우리는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된 한 편의 소설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이야기꾼이라면, 그 이야기는 당연히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써내려갈 수밖에 없다. 모든 이야기는 주위의 이야기로부터 받은 것에서 출발해 다시 주위의 이야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주는 연작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네가 거쳐 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심보선, 「인중을 긁적거리며」 중에서)

    나는 행복이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슬픔의 부재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 잘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삶이란 드문드문 끊어지는 슬픔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슬픔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중요한 것은 슬픔을 다루는 방식의 문제가 된다. 일본의 영화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슴 속 슬픔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씩씩함이자 아름다움 아닐까요. 그 슬픔을 받아주는 쪽이 될 수 있었던 체험은 제게 매우 귀중했습니다. 그 뒤로 찍은 제 많은 작품은 누군가 또는 저 자신의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이 됐습니다.” 공교롭게도 고레에다가 이 말을 한 것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한 일본 관료의 죽음을 다루면서였다.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이 되는 데 자신이 밑거름이 되길 바랐던 그는, 미나마타병 보상금 문제에서 피해자와의 법적 화해를 거부하는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 후 극심한 자괴감에 시달리며 자기 생의 이야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렇기에 종을 울리기를 원하며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는 모든 이들은 존 던John Donne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신부이자 시인이었는데, 그가 살던 17세기 영국에서는 누군가 죽으면 교회당에서 조종弔鐘을 울려 그 죽음을 알렸다고 한다. 그 시절 종이 울리면 귀족들은 하인을 보내 누가 죽었는지, 자신이 장례를 찾아가야 할 만한 필요가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도록 시키곤 했다. 영면에 들기 8년 전, 열병으로 꽤 심하게 앓았던 던은 병에서 가까스로 회복하면서 기도문을 남긴다. 자신이 울렸을지도 모르는 그 종을 생각하며.


    “누구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뭍땅의 일부분이다. 흙덩이 하나가 바다에 휩쓸려 내려간다면, 유럽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며, 그것은 모래톱이 휩쓸려도, 그대의 친구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휩쓸려도 마찬가지다. 어떤 인간의 죽음이라 해도, 나는 그로 인해 줄어든다. 이는 내가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그것은 그대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이니.”




기고자 최한(yonseiji@yonsei.ac.kr)


본문의 시는 아래 시집에서 인용하였다.   

기형도. (1991).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심보선. (2011).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유치환. (2012). 유치환 시선(배호남 편). 지식을 만드는 지식.

황동규. (1978).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문학과지성사.

황인찬. (2019).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

마지막의 기도문은 여러 번역본을 참고해 번역했다. 원문과 살핀 번역본은 아래와 같다.   

존 단. (1978). 사랑하는 사람이여(심명호 옮김). 민음사.

존 던. (2009). 인간은 사람이 아니다(김명남 옮김). 나남.

최재헌. (2013). 다시 읽는 존 던. 경북대학교 출판부.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참고자료

- H. N. 알렌. (1999). 조선견문기(신복룡 역, 76쪽). 집문당.

-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7월 1일 병자 4번째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한국고대금석문에서 인용.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개정3판, 122쪽).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대법원 1996. 2. 15. 선고 95다38677 전원합의체 판결.

- 국가공무원법 제55조.

-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별표 1」.

- 통계청. (2019. 11. 25.). 2019년 사회조사 결과. 보도자료.

- 이상연. (2019. 11. 14.). 5급 공채 2차 합격까지 평균 37개월 걸려. 법률저널.

- 리처드 탈러, 캐스 선스타인. (2009). 넛지: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 리더스북.

- Thaler, R. H., & Shefrin, H. M. (1981). An Economic Theory of Self-Control.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89(2), 392-406.

- 막스 베버. (2013). 소명으로서의 정치(박상훈 옮김, 110쪽).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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