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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an 04. 2021

<126호> 정체성 정치 옹호

편집위원 차지


메시지만큼이나 메신저가 중요한 요즘이다. 언젠가부터 양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장을 펼치기 전 자신의 성별과 계층, 성지향성과 건강 상태를 나열하는 일이 불문율이 되었다. 글쓴이 자신의 세속적 조건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의 주장을 보편타당한 진리라 내세우는 일은 이제 무신경함을 넘어 촌스러워 보일 지경이다. 나름 배웠다 자부하는 이라면 자신이 갇힌 사회적 테두리와 그에 따른 필연적 지적 한계를 글의 서두에든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자기소개란에든 미리 경고하지 않고는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는 한결 평평해진 세상에 환호하지만, 몇몇은 익숙한 것들이 정치적 조류에 휩쓸려 나가는 현실에 불안해한다. 예일대 영문학과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낯선 작가의 작품으로 대체하는 이 멋진 신세계를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이들이 그렇다.


자기소개란에 상상 가능한 모든 정체성을 귀여운 이모지와 함께 박아 넣은 인터넷 논객들의 모습은 가슴팍에 훈장 수십 개를 주렁주렁 단 백전노장을 떠올리게 한다. 적어도 논변의 세계에서만큼은 약자성이 더 이상 약점이 아닌 자격요건으로 격상된 듯 보인다. 그러나 약자성을 기꺼워하는 피씨 지식인들의 행태를 마냥 비꼬기엔 어딘가 꺼림칙하다. 첫째로 한국에서 정체성 정치는 주류로 부상하기도 전에 그 비판부터 수입되어 곤혹을 당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 성소수자가 거대 정당의 텐트에 미처 포함되기도 전 극성스러운 피씨인들을 혼쭐내는 트럼프의 승전보가 먼저 들려온 나라에서 정체성 정치의 폐해를 논하는 일은 시기상조다. 

둘째로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에도 약자성은 훈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국 전 장관의 자가용을 물티슈로 닦는 이들이 있고 남성 페미니스트 유튜버에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황송해하는 무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 아이돌이 페미니즘 서적을 읽었다고 의기양양해하며 학벌주의에 대한 비판이 서울대생의 입에서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순환논리처럼 들리겠지만 약자성은 약자의 권익을 논하는 자리에서조차 약점이다. 

마지막으로—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피씨인들의 진지함을 놀리는 식의 비판은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을 동치 하는 실수와 자주 동반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종주국인 미국에서조차 두 개념은 혼용되거나 나란히 붙여 쓰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 당신이 단어를 두고 꼬투리 잡는 피씨주의자를 혐오한다 해서 정체성 정치에도 마찬가지의 의견을 가지리란 보장은 없다. 극우부터 극좌까지 21세기의 현실 정치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정체성 정치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인종, 성별, 장애와 같은 집단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배타적인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사조다. 반면 피씨의 뜻은 훨씬 모호하다. 이 글에서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는 특정 집단을 향한 암묵적 차별에 저지하는 언어와 매체 차원의 운동이라 정의하겠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여성이나 흑인 캐릭터를 중요한 역할에 고명처럼 끼워 넣는 분위기라고만 이해해도 크게 틀리진 않는다. 애당초 정치적 올바름은 학술적으로 명확히 맞아 떨어지는 개념이 아니거니와, 이를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단어가 가진 확장 가능성에 제한을 둔다.


이 글은 발화자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려 한다. 차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들은 대개 그럴만한 여유가 있는 양반들이란 아이러니는 진보 세력을 늘 괴롭혀왔다. 정교한 논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교육을 받고 그를 글로 옮길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졌으며, 무안하지 않을 정도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맥을 갖춘 인재는 얼마 없다. 당장 좌파의 시조 격인 마르크스부터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파티로 탕진한 도련님이다. 그가 어머니로부터 “자본을 만들 생각은 안 하고 자본에 관한 책을 쓰려 한다”는 비아냥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마르크스의 일생을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일화다. 이 고통스러운 모순은 피씨의 시대에 더 확연해졌다. 예전이었다면 민중과 함께하자 했을 학생[1]들이 자신의 약자성에 주목하기 시작하며 대중과 더 유리되는 와중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정체성 정치에 대한 옹호로 읽히길 바란다. 정체성 정치는 두 개의 전선에서 투쟁 중이다. 약자들의 호소를 배부른 투정 즈음으로 여기는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물론 계급 문제에 비해 성별이나 인종 따위의 문제는 진지한 투쟁 축에도 못 낀다고 여기는 일부 진보주의자들 모두에게 피씨 사조는 손쉬운 먹잇감이다. 

따라서 나는 정체성 정치가 유효한 대안이라고 주장할 셈이다. 여성과 소수인종, 장애인과 성소수자들의 배타적인 결집은 물론 남성과 백인들의 이익집단화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정할 때가 됐다. 때문에 이 글에서 몇몇을 기만적이라 비판함은 정체성 정치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다. 되려 도덕적 호소로 약자들의 급진적인 주장을 희석하고 그들의 정당성에 타격을 가하는 현상에 반하고자 함이다.



켄타우로스

“그래서 너는?”이라는 반박은 대개의 상황에서 유효하다. 현재 상태에서 아쉬울 것 없는 인재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에 대한 지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담배회사의 후원을 받은 역학조사팀이 내놓는 폐암 논문을 곧이곧대로 믿는 일만큼이나 어리석다. 생명과학 논문의 말미에 괜히 “Conflict of Interest”가 들어가고 공무원 이해충돌방지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익이 달린 문제에 있어 사람들은 대개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에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사조를 지지하는 이들은 의심을 사곤 한다. 감세를 원하는 부유층이나 여성할당제를 지지하는 20대 여성의 저의는 해석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같은 주장을 하는 빈곤층이나 20대 남성이 있다면 많은 이들은 가자미 눈을 하고 그들의 의도를 캐내려 들 것이다. 도덕적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닌 이상 그들이 굳이 자신의 파이를 기꺼이 포기하는 척이라도 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 

강남좌파와 남성 페미니스트는 켄타우로스와 같아서 그들 주장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떠나 논변의 세계에서 껄끄러운 존재다. 얼핏 보기에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편을 드는 듯한 그들의 고결함에 감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찬가지로 정확히 같은 이유로 그 저의를 의심하는 불신자들도 있으며,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들을 향한 과도한 갈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이들도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고 미리 밝혀야겠다. 


신자유주의의 무자비함을 한탄하는 지식인 선생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자기 자신도 설득시키지 못하는 논리를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게 아닌가 의심을 든다. 그중 태반은 서울 상위권 대학 출신에 누가 봐도 돈이 안 될 법한 분야의 석박사 학위를 받느라 유럽에서 수년을 보낸 이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학벌이나 전문직 자격증을 무기로 서울 땅에 살뜰히 보금자리를 마련한 이들이 그런 논리를 차용하는 모습은 공부를 하나도 못했다며 연막을 치던 학창시절의 친구와 겹쳐 보인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전국민적 분노는 바로 이런 원초적인 질투심과 배신감에서 기인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뻔한 모순을 누군가 지적한다면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도 먹고살 수밖에 없다고 웅얼댄다. 아무리 봐도 그들의 노력은 진정으로 먹고살기 위함이라기보다 부유하게 먹고 살기 위함인데도 말이다. 그들 중 더 용감한 이들은 역으로 성을 내며 진보적인 메신저에 대한 검열을 보수성과 동치 시킨다. 그들의 자기변호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현상유지를 지지하는 이들이 지나치게 좋은 아파트에 산다거나 그 자식이 비싼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은 흠이 못 되는 세상이다. 되려 자신의 이해를 뒤로 하고 덜 가진 자들의 권익을 지지하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트집 잡히는 상황이 억울할 만도 하다. 그러나 우월한 고지에 궁둥이를 붙인 채로 신분상승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불운한 이들에게 참견을 늘어놓는 일은 보기에만 우스울 뿐 아니라 진보적 담론 형성에도 해가 된다. 


영국의 전 노동당 당수 제레미 코빈은 장남을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시키려는 아내에게 별거를 통보[2]했다. 

당시의 그는 평의원이었음에도 끝내 장남을 사립 학교에 보내고자 하는 아내와 이견을 좁히지 않았다. 코빈처럼 자식의 미래보다 신념을 우선하라 강요할 순 없다. 자식에게 최상의 환경을 물려주기보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데 열정인 혁명가를 부모로 둔 이들은 무슨 죄인가! 그러나 신념과 실리 사이에서 주저 없이 후자를 택한 이들이 연단 위에 서서 대중에게 소시민적 이기주의를 버리라 설교할 자격은 없다.  


진보 인사들의 교육열에 관한 논의는 뒤로 하고 공론장에서의 비슷한 문제에 집중해보자. 서양의 페미니스트들은 아랍의 여성 인권 문제에 관해서는 왜 침묵하냐는 질의를 받아왔다. 실은 질문이 아닌 공격에 가까운 이 문제에 답하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랍의 여성 인권 실태가 심각하다고 여긴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질문자의 의도에 넘어가게 된다. 아랍 여성을 계도 대상으로 여기는 오만한 문화 제국주의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게 둬야 한다는 식으로 대답해도 문제의 소지는 있다. 서구의 “사소한” 여성 차별에는 분노하며 그보다 훨씬 거대한 제도적 차별에 관해서는 입을 다무는 파렴치한이 되어버린다.

사회 변혁에서의 주도적 역할이 적당히 운 좋은 환경에 처해진 이들에게 맡겨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과실을 누린 이들이 결론적으로 농민이 아닌 제3신분이었던 것처럼 사회 운동에는 문화적 자본이 필요하다. 당사자성이 늘 통찰력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노인들을 비웃는 이들조차 소수자 문제를 논할 때는 이 사소한 진실을 잊는다. 21세기의 북한 주민보다 바깥 세계의 자유민들이 그들에겐 이미 익숙해진 억압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수의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 또한 자신들의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믿는다[3]. 

나 역시 가부장제에 한해선 평범한 한국 남성을 압도하는 통찰력을 가졌다고 확신할 수 없다. 자질구레한 여성학 개념을 몇 개 더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내 이해력의 우위를 뜻하진 않는다. 다른 이들에겐 참을 수 없는 굴욕이 차별의 당사자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상일 수 있다. 피지배자는 권력뿐 아니라 구조에 대한 인지에서조차 곧잘 소외된다. 

이 즈음에서 버트랜드 러셀의 예를 소개하고 싶다. 인생의 제비뽑기에서 가장 좋은 패를 뽑은 그는 영국 수상을 지낸 백작의 손자로 태어나는 것도 모자라 탁월한 수학적 재능과 여러 여성을 유혹하는 매력까지 타고난 다방면의 천재였다. 수학과 논리학뿐 아니라 사회 정의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서른다섯에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여성의 참정권 보장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처참히 낙선했다. 그는 반전운동을 이끌었을 때보다 여권 신장 운동을 할 때 더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며 “남자들이 자기들의 지위를 잃을까 봐 위협을 하는 야만적 행동은 이해할 수 있으나, 여자들이 자신들의 모욕을 그대로 지속해 나가려고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았다”라고 후에 술회했다. 난 러셀의 산뜻한 감상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이라면 이러한 과감한 비평을 입 밖에 내기 전에 여권신장에 열정적이지 못한 어머니와 친구를 떠올리며 현실을 불만 없이 받아들이는 그들을 차마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테다. 

외부자만이 갖출 수 있는 거국적인 안목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온전히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당사자가 공론장에 진입해서 자기 자신을 이익을 대표하도록 허락하는 대신 그 자리를 선의의 동정자들이 채우는 일은 소수자 의제를 도덕적 차원에 종속시킨다.



피아식별

보수적인 약자의 존재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유효한 논박이 아니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를 다루면서 그들을 설명하고픈 충동을 뿌리치기란 어려운 일이다. 소수자 의제에 관심 있는 사람 치고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여성이나 성지향성에 대한 공적 논의가 필요하지 않다 여기는 성소수자들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고민해보지 않은 경우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간혹 “나도 XX지만”이라 수줍은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들의 간증에 환호하는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내부 고발자를 사랑한다. 


모든 약자의 연대는 모든 한국인의 연대만큼이나 얼토당토않다. 모든 약자들이 합심해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일궈낸 예가 현실 정치에도 있을까 싶다. 어렵게 성사된다 하더라도 얼마 안 가 누가 가장 약자인가 다투다 흐지부지 되리란 예감이 드는 것은 내가 회의주의자인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애당초 약자의 정의는 서양의 진보 세력이 염불 외듯 언급하는 “중산층 시스젠더 헤테로 백인 남성”의 개념만큼이나 부실하다. 일단 중산층이 무엇인가부터 헷갈린다. 소득분위 9분위, 혹은 10분위 이상이 중산층인가? 그만으론 왠지 부족해 보인다. 조르주 퐁피두 전 프랑스 대통령은 중산층을 “외국어 한 개쯤 할 줄 알고, 스포츠를 즐겨야 하며,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는” 이들로 한정[4]했다. 이런 촘촘한 기준을 통과하는 이들만 강자라 설정한다면 사실상 마음 놓고 탓할 수 있는 강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보수적인 약자는 좌파에게 언제나 성가신 존재였다. 그저 엇나가는 소수 취급하기엔 그들의 수는 너무 많고, 막상 그들을 제 밥그릇도 못 챙기는 무식쟁이 취급을 하자니 엘리트주의자라는 비난을 피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레닌에겐 이러한 딜레마를 피하는 묘책이 있었다. 사회 변혁의 초기 단계에선 당을 위시한 소수의 엘리트 혁명가들이 무지몽매한 대중을 이끌어나갈 책임이 있다는 논리로 그는 토지 몰수에 저항하는 농민들을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보냈다. 다행히도 이러한 방식은 21세기에 통하지 않기에 진보주의자들은 더 참신한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

정체성 정치의 전략적 구멍은 피아식별의 어려움에서 기인한다. 비당사자의 무책임한 주장에 대한 방어력은 뛰어나나 내부의 공격에 취약하다. 인종차별 따윈 없다는 흑인 칸예 웨스트[5]

와 동성애자들은 다시 벽장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이 밀로 이아노플로스[6]를 정체성 정치의 수사로 반박하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약자의 보수성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소수자 개인의 이해타산적 정치 행위를 정체성 정치라 본다면 자신의 이익의 증진에 반하는 소수자는 언뜻 보기에 모순적이다. 그러나 혈연과 가치관 및 경제적 의존 관계에 매여 있는 사회적 존재로서 소수자를 바라본다면 그들의 행동이 이해 불가능하지 않다.

“네 가족이라고 생각해보라”는 식의 성의 없는 가정을 들이밀며 공감과 이해를 맡겨 놓은 듯이 구는 이들을 “니가족충”이라 일컫는 일이 요즘 많다. 이러한 오류투성이 논리는 어느 방향으로 사용되든 문제의 여지가 다분하다. 특히 소수자 의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타인의 가족을 들먹이는 전략은 끔찍한 자충수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허술해 보이는 “니가족” 논리에 일리가 전혀 없진 않다. 미국에서 퀴어 담론이 눈에 띄게 발전한 이유로 가족애를 꼽는다. 제아무리 동성애에 치를 떠는 사람일지라도 막상 자신의 가족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다. 문란한 에이즈 환자인 줄로만 알았던 동성애자 집단의 일원이 누구보다 착실하고 사랑스러운 내 자식이란 사실을 깨닫고서도 본래의 혐오를 이어나가긴 어렵다. 

날선 논리며 정책이며 다 무슨 소용인가! 혐오는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퀴어 단체의 구호처럼 혈육에 대한 정은 이 조각 난 세상의 희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혈연관계가 늘 진보를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되려 오랫동안 가족애는 보수성의 기원이라고 여겨졌다. 엥겔스는 사유재산과 가족제도가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라 말하며 한 남성과 여성 간의 결합이 지상 최초의 지배-피지배 관계라 지적했다.


여자들은 집에서 집안일과 다산에 전념해야 한다는 논리를 고집하는 사람치고는 특이하게 왕성한 정치활동을 했던 미국의 극우 정치인 필리스 쉴라플라이는 그녀의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동성혼과 평등권 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에 대한 반대 뜻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누그러진 쪽은 그녀의 아들 존이었다. 아니 누그러진 정도가 아니라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어머니와 일심동체인 양 행동했다. 존 쉴라플라이는 보수단체의 변호사로 일하는 중이다. 동성혼이 미국에서 합법화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결혼은 두 남녀의 결합이어야만 한다 말하며 기독교 가치의 수호하던 어머니의 유산을 이어가는 중이다[7]. 


극우 운동가와 그녀의 게이 아들과 같은 극단적인 예시를 들지 않아도 가족관계가 급진적인 사회변혁에 대한 완충재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우린 안다. 비슷한 “니가족” 사례를 살펴보자. 남편의 소득에 의존하는 전업주부가 동일고용 의제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테다. 고학벌 자녀를 둔 부모가 학벌주의에 반대할 리 없는 것처럼 말이다. 30대 이후의 여성의 다수는 남성과 경제공동체로 끈끈히 묶여 있기에 그들 개인의 이익이 페미니즘적 이상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약자들 간의 연대가 어렵다는 사실이 정체성 정치의 반대 논거가 될 수 없다. 약자들 간의 다툼은 유독 경멸 당한다. 사회적 강자 간의 알력 다툼은 자연스럽게 수용할 뿐 아니라 그 치열함을 동경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이, 노조원과 비노조원이 작은 논쟁이라도 벌일라 치면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기뻐하는 이들은 별개로 치더라도 약자 자신들 역시 내분에 대한 공포가 크다. 현실에서의 힘 대신 도덕적 고지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압박 탓에 약자들은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미는 일을 극히 꺼려왔다.


애당초 정체성 정치란 것은 무수한 집단적 정체성을 인정함에서 시작한다. 배타성을 배격하기보다 정치의 핵심요소로서 수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음이 정체성 정치의 미학이다. 따라서 모래성과 같은 약자 들의 연대를 비웃는 이들의 논리는 사실 정체성 정치의 전제와 맞닿아 있다. 정체성 정치는 사회적 약자라고 전부 진보적 의제를 지지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에 의존하지 않는다. 다만 소수자 의제를 누군가는 지지해야 한다면 그 주체는 배타적인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소수자 본인들이라 말할 뿐이다.



판도라의 상자

누군가는 정체성 정치 탓에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도덕적 차원에서 논의되었을 일들이 밥그릇 싸움으로 전락했다 탄식한다. 2015년 이전에 캠퍼스에서 페미니즘을 논할 일이 있었다면 양측 모두 최소한의 체면을 지키며 신사적으로 토론에 임했을 테다. 지금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소수자 문제에 대한 논의를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대가로 우리는 기득권층을 포함한 일반 대중의 적대감을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됐다. 누군가는 저변을 넓혀 잠재적 우군을 최대한 확보하는 쪽이 현명한 전략이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나는 사람들의 적개심은 정체성 정치를 추구하며 마땅히 치를만한 대가라는 입장이다.


진보의 역사는 삶의 잔인한 무작위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시도의 집합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니 단어 하나하나의 꼬투리를 잡는 이들이 계층과 같은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의를 뒤로 미루는 방해꾼 취급을 해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가뜩이나 갈등으로 얼룩진 세상에 싸움거리를 하나 더 추가한다고 원망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되려 성별과 인종, 성지향성과 장애 등 계층보다도 가변성이 적은 속성에 관한 논의가 이제야 시작됐나 성을 내야 마땅하다. 

언어학자이자 정치 활동가인 노엄 촘스키는 노동계급의 문제보다 소수자 의제에 집중한 전략이 미국 민주당의 패착이라 평가했다[8].물론 촘스키 자신부터가 신좌파이기에 그가 정치적 올바름의 지향점에 비판적이라는 일부의 호도에는 근거가 없다. 그가 노동자 의제를 우선해야 한다 주장한 이유는 순전히 노동자의 수가 성소수자와 소수인종의 수보다 많기 때문이다. 양당정치의 세계에서 머릿수를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다. 한국의 기성 진보 세력 내에서도 트렌디한 소수자 의제에 집중하며 정작 경제적 계급의 문제에 소홀해져 본말이 전도될까 우려가 나오는 중이다. 


그러나 소수자 의제를 계급 갈등의 사이드 디시 취급하는 풍조를 합당하다 보기 어렵다. 먼저 경제적 격차가 성별이나 성지향성, 장애 등에 의해 발생하는 격차보다 조금이라도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여길 근거는 없다. 우리 중 대다수가 “남녀대결”보다 재벌과 중산층, 중산층과 저소득층 간의 갈등 구도에 더 익숙할 뿐이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졌다며 탄식하는 정치인들은 많다. 경제적 계층의 존재 자체를 부당하다 여기는 이들의 의견은 제쳐두고서라도, 인생의 상당 부분이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에 대다수 사람들은 분개한다. 그러나 경제적 계층만큼이나 바꾸기 어려운 성별이나 인종, 장애 여부와 같은 요소들에 대중은 이제야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정체성 정치의 비판자 중 상당수는 그저 평화주의자일 뿐이다. 이들이 전부 지독한 성차별주의자라 여기는 것은 분명 비약이다. 여성 문제의 예를 들어보자. “성별대결”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은 제대로 된 세상에서라면 여성과 남성은 이권을 두고 경쟁하기보다 사랑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축산업자와 가축, 석탄 공장주와 북극곰의 이익이 상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이들조차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해관계 역시 여러 면에서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곤 한다.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 교수는 피씨주의자들이 세상을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구도로 단순화”한다며 머지않아 인종과 성별, 재산과 성지향성뿐 아니라 “매력의 계급”까지 문제 삼을 날이 올 것이라 농담[9]했다. 요컨대, 

삶의 무작위적 요소를 하나하나 문젯거리로 여기다 보면 우리는 무엇 하나 자연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특이점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나는 피터슨 교수의 자신감 넘치는 정치 평론의 대부분이 근거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그와 별개로 그의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정체성 정치는 무한한 수의 갈등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지적대로 갈등의 소재는 매년 늘어나는 중이다. 경제적 계층 갈등은 보통선거권이 세계적으로 확산한 이래 전 세계 민주주의의 핵심 의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통합을 저해한다”는 명목으로 계층 간 갈등에 대한 언급조차 꺼리는 이들이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잠재적 갈등의 소지에 불안해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의 심기를 고려해 존재하는 격차를 못 본 척할 순 없다. 미디어에 점차 자주 등장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동성 간의 결혼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걱정하는 부모들에게 미국 코미디언 루이스 CK는 “당신이 당신 아이한테 할 말이 생각 안 난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자신들의 행복을 포기해야 하냐”고 반문[10]했다. 마찬가지로 언제 어디서 논쟁이 폭발할지 불안해하는 이들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소수자 집단이 불이익을 감내해야 할 이유는 하등 없다. 


더 중요한 문제 뒤로 소수자 의제를 미루자는 이들의 주장은 더 악질적이다. 약자성은 언제나 상대적인 개념이라 정체성 정치의 세계에서 마땅히 제 몫을 주장하기 위해선 다른 이들을 상대적 강자라 몰 필요가 있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간혹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기득권 세력에 대항해 20대 남녀는 싸우기보다 협력해야”한다고 하거나 “흑인이나 동양인이나 어차피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차별 받는 처지이니 함께 머리를 맞대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순진무구함은 대개 의도된 것이다. 그들의 자비심은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갈등 구조에 한해서만 발휘되니 말이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등급을 매기며 논의를 제멋대로 좌우하려는 이들의 자만심은 놀라울 지경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대표할 권리가 있다는 민주주의의 대전제를 기억할 때 우리는 내겐 무척 사소하거나 더 나아가 해결되지 않을수록 좋은 문제가 다른 이들에겐 몹시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운빨X망겜’이란 말이 있다. 실력보다 확률이 좌우하는 게임을 일컫는 이 개념에 인생이 너무 잘 들어맞는다는 한탄이 만연한 요즘이다. 계층 이동은 꿈도 못 꾸던 전근대인들의 마음은 차라리 편했을 테다. 그러나 민주정과 만민평등사상을 애매하게 받아들인 탓에 우리는 나와 불특정다수의 유불리를 끊임 없이 비교하며 조금 더 내놓으라고 상대를 닦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조차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했던 이들이 이제 막 전열을 가다듬는 와중에 그들에게 감히 추하다 면박을 줄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네이버 뉴스 댓글란을 보며 페미니즘과 퀴어 담론이 단지 지성인 사이의 도덕적 논쟁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을 그리워해선 안 된다.

지배층이 약자에게 선뜻 더 많은 파이를 내어준 경우는 더 큰 소란이 우려될 때뿐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각종 사회 복지 제도를 통과시켰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상점의 유리창을 깨고 경마장에 난입함에 따른 혼란이 감당할 수 없었을 때가 되어서야 영국 정부는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했다. 세계 대부분의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하게 된 것은 결코 위정자들의 선의 덕이 아니었다. 약소국의 헌법 제정자들이 강대국의 선례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덕이라 여기는 편이 옳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혐오 발언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력을 담보로 걸어야 하는 사회가 왔을 때 비로소 동성애자들은 동료 시민들과 비슷한 수준의 권익을 누리게 됐다. 그제서야 미국의 미국정신의학회는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제외시키기 시작했으며 성지향성이 중요한 의제로 고려되기 시작했다. 


정체성 정치는 구름 위의 성에 지나지 않았던 소수자 의제를 지상으로 끌어 내림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상기된 얼굴로 내가 가장 억울하오 토로하는 이들의 논리가 마음에 안 들 순 있다. 그러나 타고난 불리한 조건에 항의하는 이들에게 인생이란 게임에서의 승부를 포기하라고 당당히 권유할 수 있는 이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청동기 이래로 인간이 평등했던 시기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절망적인 예언은 현상 유지를 위한 명분으로 부족하다. 




편집위원 차지 (avril11th@naver.com)


[1]김대호, 『한 386의 사상혁명』, 시대정신, 2004. 저자 김대호는 1982년에 대학에 들어갔다가 무기정학과 징역, 공장 생활 등을 겪었다. 졸업 후에도 오랫동안 구로 공단에서 활동하다 이내 운동권 출신을 대거 받아들인 대우그룹에 입사했다. 저자는 운동권의 저항정신을 높이 평가하나 회사원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실물 경험에 대립함을 느낀다. 386 세대가 본격적으로 비판 받기 이전에 나온 자기반성적 책이라는 점이 놀랍다. 

[2] “英코빈의원, 신념다른 부부갈등에 당론따라 별거선택”, 중앙일보, 1999. 05. 14.

[3] Zoepf, Katherine. (2010, 5). “Talk of Women’s Rights Divides Saudi Arabia”. 『The New York Times, 20100531. 남성 보호자 제도 폐지에 반대하는 여성 주도의 운동이 지지를 얻었다. 

[4] “중산층이란…한국 “30평 아파트” 프랑스“

요리하고 외국어도"”, 중앙일보, 2020. 01. 31.

[5] Bradner, E., Merica, Dan. (2020, 8). “'They're not even trying to hide the racism': Wisconsin Democrats blast GOP efforts to aid Kanye West's candidacy”. 『

CNN』, 20200807.

[6] MacDougald, Park. (2016, 7). “Milo Yiannopoulos and the Gay Fascist Sophisticate”. 『New York』, 20160721. 영국의 전 정치 평론가이자 커밍아웃한 게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으로 명성을 얻었다. 성소수자 문제에 관해 “back to the closet” 즉 성지향성을 밝히지도, 묻지도 않던 예전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을 내비췄다.

[7] O’ Connor, Anne-Marie. (2004, 9). “From the Archives: At 2004 convention, Schlafly makes her point on gay marriage &#8212; unabashedly”. 『New York』, 20040901.

[8] Codevilla, Angelo, M. (2016, 11). “The Rise of Political Correctness”. 『Independent Institute』, 20161128.

[9]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과 벌인 “Happiness: Capitalism vs. Marxism” 토론에서 나타난 발언이다. 

[10] 2011년 스탠드업 코미디 쇼에서 한 발언이다. 루이스 CK는 2017년 미투 운동 당시 성추행에 혐의로 1년간의 자숙 기간을 가졌다. 2018년에 복귀하여 현재는 활발히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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