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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6호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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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수습편집위원 유연

0.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약 6개월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의 삶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황폐해졌다. 볼로도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7월 2일 열린 ‘우크라이나 재건회의’에서 우크라이나 도시와 마을 3600개 이상이 러시아에게 점령당했으며, 수백 곳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6월 기준, 민간인 사상자를 3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였다.     

  이 궤멸적인 침공은 여전히 종식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이며, 외려 우크라이나의 독립기념일이었던 지난 8월 24일을 기점으로 확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전쟁의 장기화가 선연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일까?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밝힌 침공 이유는 “우크라이나의 지속적인 위협으로부터 러시아가 불안전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여기서의 “위협”은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기 위해 기울여 온 노력을 뜻한다.


1.

  나토는 1949년 북대서양 조약을 통해 창설된 서방 국가들의 군사 동맹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저지하고자 한 까닭은 나토의 설립 목적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초기 나토는 소련에 대한 견제를 위해 설립되었으며, 이는 현재 나토의 역할인 러시아와 중국, 북한 등에 대한 견제로도 이어지고 있다. 나토 헌장 제5조에 따르면, “나토 회원국 중 하나에 대한 공격은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그러한 공격이 있을 경우 각 회원국들은 공격받는 국가에 대해 원조한다.”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나토의 군사적 상호 원조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다.


  우크라이나는 30년 전,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마자 나토에 가입하려는 의지를 내보였다. 그러나 당시 나토 측에서는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거절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 선언을 했을 때 소련의 핵무기 다수가 우크라이나 영토에 남겨져 있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그것을 그대로 흡수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우크라이나는 176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40대의 전략폭격기, 500여기의 크루즈미사일형의 전술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이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한순간에 핵무기 보유국 3위의 자리로 올라섰다. 즉, 나토의 우크라이나 가입 거절은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위험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우크라이나의 비핵화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우크라이나에게 나토의 이러한 요구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독립을 원하지 않는 러시아로부터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기를 소유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핵무기는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러시아로부터의 안전 보장과 경제적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주요한 협상 카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운용할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있지 않았으며, 핵무기를 안전하고 실용적으로 사용할 만한 기술적 자본도 부족했다. 두 번째로 체르노빌 원전 참사를 지켜본 국민들이 핵에 대해 가지는 불안감이 증폭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마지막으로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프추크는 핵무기를 가진 신생 국가라는 위치가 외교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2.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은 두 가지로, 첫 번째는 서방 국가를 통한 러시아로부터의 안전 보장, 두 번째는 충분한 재정적·자원적 보상이었다. 핵확산방지조약(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 NPT)에 가입하여 공식적으로 핵을 포기하기 전,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두 가지를 국제 사회로부터 확약받기를 원했다.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우크라이나와 서방 국가들 사이에서는 많은 문서가 오가고 협약이 맺어졌는데, 그중 주목할 것은 1994년 1월 러시아·미국·우크라이나 간의 3자협정과 1994년 12월의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이다.      


  먼저 3자협정을 살펴보자. 3자협정의 주요 내용은 첫째, 우크라이나의 NPT 가입을 전제로 우크라이나의 안전 보장을 확약하며 영국·러시아·미국 등은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정치적 독립성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둘째, 우크라이나에게 비핵화를 위한 충분한 재정적·기술적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는 3자협정에서 전자의 주 내용인 안전 보장을 실현하기 위해 체결되었다. 러시아·영국·미국의 3개 핵보유국이 서명한 이 각서에서 주목할 부분은 4번 조항과 6번 조항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4번: ‘미합중국, 러시아 연방,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은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비확산조약의 비핵무기국가로서 만약 핵무기를 사용하는 침략행위의 피해국이 되거나 침략 위협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경우,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즉각적인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조치를 모색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재확인한다.’, 

  6번: ‘미합중국, 러시아 연방,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은 이러한 약속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협의할 것이다.’


  요컨대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사용한 침략을 받을 시에는 유엔 안보리 차원의 조치를 모색하지만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침략을 당했을 시에는 미국·영국·러시아 삼국이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는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약속했지만, 이는 실제로는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 우선 각서는 조약이나 협약과는 달리 법적 구속력이 없어 서명한 국가가 각서의 내용을 지키지 않아도 별다른 제재를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러시아가 이번 침공에서 그러했듯, 침략국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4번 조항은 별다른 구속력이 없다. 6번 조항 또한 단순히 국가 간의 ‘협의’만을 명시했기에 이에 근거한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조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각서의 유효성에 대한 우려는 이번 침공이 있기 전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침공했을 때도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2018년 우크라이나의 국방위원장인 투르치노프는 “핵무기 포기가 우리의 실수였다”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주어졌던 약속은 각서의 종이값만도 못하다”라고 한탄했다. 그리고 예상 가능하게도,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에도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는 효력이 없었다.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즉각 부다페스트 양해 각서 제6항에 근거하여 유엔 안전보장위원회 긴급회의 소집을 요구했지만, 이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3.

  우크라이나는 안전 보장을 대가로 핵을 포기한, 모범적인 비핵/비확산국가의 사례로 꼽힌다. 실제로 핵포기 모델 연구와 북한 비핵화 전략을 위한 연구에서 비핵화의 범례로 리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가장 자주 언급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수많은 논문이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함으로써 얻은 이익(즉, 안전 보장과 경제적 지원)이 국제 사회의 요구와 맞아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그 ‘모범’은 핵을 보유한 강대국들이 붙여준 딱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 사회에서 비핵화는 인류 공동체가 함께 달성해야 할 이상적인 가치로 여겨진다. 올 8월의 제10차 NPT회의에서는 수많은 연설과 선언문을 통해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협력을 통한 지속 가능한 평화’의 일환으로 비핵화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국제 사회가 비핵화를 다루는 방식이 지극히 불공평하고 비핵화의 대가로 약속된 내용들이 강대국들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왜곡될 수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1968년 발효된 핵확산방지조약 – NPT의 조항이 핵무기 비보유국들에게 상대적으로 비핵화에 대한 책임을 더 무겁게 부과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한 현실을 잘 드러낸다. NPT는 5개 국가(미국·영국·러시아·프랑스·중국)를 핵무기국(Nuclear Weapon States)으로 규정하여 핵 보유를 허용하였고, 나머지 가입국들을 핵무기 비보유국(Non-Nuclear Weapon States)으로 규정했다.      


  NPT 조항에서 드러난 핵무기국과 핵무기 비보유국의 의무사항을 살펴보자. 먼저 핵무기국의 의무는 첫째, 핵무기를 어느 수령자에게도 양도하지 않을 것, 둘째, 핵무기 비보유국이 핵무기나 관련 기술을 가질 수 있도록 원조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핵무기 비보유국의 의무는 첫째, 핵무기를 어떤 양도자에게도 양도받지 않을 것, 둘째, 핵무기를 제조하거나 획득하지 않을 것, 셋째, 핵 비보유를 이행하고 있는지 검증과 안전 조치를 받을 것이다.이때 셋째 의무에서의 ‘안전 조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정기적·비정기적으로 핵무기 비보유국의 핵물질·핵시설 보유 여부를 사찰하고 만약 조약 위반이 적발되었을 시에는 합당한 수준의 제재를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단순히 핵무기를 전파하지 않을 것에만 그치는 핵무기국의 의무와는 달리 핵무기 비보유국은 불시에 이루어지는 국가 기관 사찰에 응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핵무기국과 핵무기 비보유국의 의무를 비교해 보았을 때 NPT는 핵비확산의 의무를 핵무기 비보유국에만 과다하게 부과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비할 수 없다.     


  더욱 문제가 되는 점은 핵무기 비보유국들이 해당 조약의 불평등한 점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NPT에 가입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국제 사회의 압력이다. 현재 190여 개의 국가들이 핵무기국과 주변 국가들을 의식하여, 혹은 그 압력을 무시하지 못하고 비보유국으로 가입한 상황이다. NPT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북한이나 처음부터 NPT에 가입하지 않은 이란은 지속적으로 국제 사회로부터 지탄받으며 NPT에 가입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특히 북한의 경우는 유일한 NPT 탈퇴국으로, 탈퇴 직후부터 현재까지도 NPT 대열에 재합류할 것을 촉구받았다. 최근의 8월 26일 제10차 NPT평가회의에서도 북한은 어김없이 언급되었다, 공개된 최종 선언문에 따르면 “회의는 북한이 NPT에 따라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에 조속히 복귀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규정을 적용하며 완전히 준수할 것을 촉구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예외는 존재한다. 이스라엘은 1960년부터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한 비공식적 핵무기국으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로부터 이란이나 북한과 같은 지탄을 받지 않는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대표적인 친미국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40년 넘게 이스라엘의 핵무기에 관해 비밀주의 입장을 고수해왔다. 미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전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을 알고 있었지만 이에 대해 타국과 같은 투명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에 관해 이란의 하티브자데 대변인은 “IAEA는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를 간과하면서 이란에는 노골적인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있다”고 비판했다.     


4.

  이렇듯 NPT는 세계적 비핵화와 핵비확산을 목적으로 발효되었으나 이는 명목상의 가치일 뿐 실질적으로는 강대국의 이익을 강화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핵무기 보유가 자국의 안보에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의 요구로 핵무기를 포기한 후 NPT에 핵무기 비보유국 자격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이는 곧 핵무기국인 러시아로부터 침략으로 이어졌다 비핵화를 단행할 때 받은 안전 보장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해당 사태를 지켜본 국가들은 핵무기의 필요성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북한 학자인 란코프 교수는 “자국이 보유한 핵무기를 자발적으로 넘겨준 국가가 바로 그 핵무기를 넘겨받은 국가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있는 현실”앞에서 “북한은 이라크와 리비아에 이어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더욱 확실한 교훈을 얻은 셈”이라고 말했다. NPT체제는 비핵화에 대한 실효성을 잃었다. 비핵화는 강대국을 위한 허울 좋은 명목일 뿐이며, 핵무기 비보유국들은 비핵을 추구하기는커녕 핵무기국 자리로 올라서기만을 바란다.

 

  핵이 인류 멸망을 부를 수 있는 공멸의 무기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핵의 위험성을 예방하고자 만든 약속은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허물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 누구도 ‘핵무기로부터의 안전’을 바랄 수 없는 지금, 강대국의 모순적인 행보로 오염되고 있는 ‘비핵’과 ‘평화’라는 단어가 가진 진정한 가치를 재고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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