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페미니즘”

수습편집위원 사색도형문제

by 문우편집위원회

“몇 발짝만 걸어 나가봐도 완전히 다른 세상이더라.”


이번 학기 문우에서 새로 알게 된 친구의 말이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다.


‘대학교 새내기’로서 보낸 나의 한 학기를 몇 마디 문장으로 간추려본다면 그 안에는 분명 저 말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지난 몇 달은 지금까지 알아 온 세상을 다시 써내려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강의며 주변 환경, 친구들까지 모든 게 새로웠고,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에 대한 주변의 반응 또한 그랬다. 새로움을 떠나서 낯설었다. 말해선 안 될 말을 내뱉은 느낌. ‘페미니즘’과 관련된 말이 나오는 순간 눈에 띄게 줄어드는 목소리. 주변을 살피는 눈짓. 언젠가부터 ‘그런’ 이야기를 꺼낼 때면 극도로 조심스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건 꽤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 주제의 대화는 꼭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런 말 밖에서는 아무렇게나 못하는데….”


2018년 상반기에 일어난 꽤 다양한 사건들 중에는 페미니즘이라는 키워드 하에 묶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이슈들이 상당수 있었다. 미투 운동부터 시작해 탈코르셋 운동, 메갈리아와 워마드, 불법촬영, 편파 수사. 여성 연예인들의 책과 핸드폰 케이스. 우리 학교 중앙도서관에 1년 째 버티고 있는 비판의 목소리, 그리고 총여학생회를 둘러싼 일까지.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생겨나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엔 마냥 하나로 뭉친 개념일 거라생각했던 페미니즘이 사실은 다양한 형태로써 존재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입 밖으로 꺼내기는 어려웠다.


암묵적으로 학습된 규칙 같았다.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는 건 되도록 자제해야 한다는. 단지 몇 발자국만 걸어 나가도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중 하나인 에브리타임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희화화 또는 공격의 대상이었으며 여성 동기들 사이에서의 페미니즘 대화들은 비밀을 공유하듯 아주 조용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모든 생각을 입 안에 뭉쳐둔 채, 다만 상황이 괜찮을 때마다 그것들을 손톱만큼씩만 꺼내놓는 것이었다.


페미니즘이 일상생활에서의 대화 주제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로는 이 용어에 대한 대중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크다. 실제로 우리에게 알려진 ‘페미니즘’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좋지 않다. 우리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만 해도 그렇다는 것을, 작년에 진행된 설문조사의 답변들을 몇 개 읽어 보면 충분히 파악 가능하다. 그들이 바라보는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로써, 남성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심지어 남성의 인권 수축을 바라고) 여성의 의무 없는 권리만을 주장하는 상당히 편향적인 흐름이다. 객관적이지 못하고 이기적인 사상인 것이다. 아래는 당시 페미니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설문 참여자들이 스스로를 반(反)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이유를 댄 것의 일부다.

스스로를 반페미니스트라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연세대학교 내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조사’, 2017/12/02~06 일부)


객관적, 중립적이지 못하고 보고싶은 팩트만 본다.
이기적이어서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매우 역겹다. 올바른 페미니스트라면 남녀간 차별받는 부분들을 없애 나가는 모습을 보여야지. 의무는 다하지도 않고, 항상 자기들 챙길 것만 챙기려고 권리만 주장하니 꼴보기가 싫다.
남성 우월주의를 없애기 위해서라면서 남성우월주의를 통해 받는 혜택은 언급없이 불편한 것만 언급하고 여성만을 집중하면서 남녀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싫다
성평등주의를 표방하는 것과 반대로, 실제 운동하고 주장하는 것은 여성주의에 가까우며 여성 인권 신장이 아닌 남성 인권 수축에 관심이 있어 보인다. 단어 그대로 feminine을 달고 있는 이상 페미니즘은 성평등주의와 동치될 수 없다.
전형적인 자기 권리만 찾고 의무는 다하려고 하지 않는. 너무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젠더이퀄리즘과의 대립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사람들을 본인들의 이익에만 반응하고 진짜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단지 본인들이 이득을 취하지 못하면 그것에 반응하는 이익집단이다. 본인이 포함되지 않은 집단의 불이익 및 차별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집단이다. 결국에는 '페미니스트'라는 이기적인 집단 대신 이퀄리즘 이라는 또 다른 개념이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되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딘가 생소한 단어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젠더 이퀄리즘’이다.


‘아, 젠더(gender)와 이퀄리즘(잘은 모르겠지만 동등하다는 의미로 쓰인 것 같음)이 붙었으니 모든 성별이 평등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 나는 위와 같이 생각했었다. 페미니즘에 대항해 만들어졌다는 용어에 ‘평등’의 뉘앙스가 들어가니, 저절로 페미니즘의 의미에서 ‘평등’ 두 글자가 빠져나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 개념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이며, 과연 답변자들 중 일부의 말처럼 편향적인 페미니즘의 보다 중립적인 대체어로써 쓰일 수 있는 것일까. 사실상 방금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논의되고 있는 용어 ‘젠더 이퀄리즘’은 페미니즘을 대체할 수 없다. 이 단어는 실질적 평등을 추구하기보다는 기존 페미니즘 담론을 전복시키고자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으며, 실제 존재하는 개념도 아니기 때문이다.


‘젠더 이퀄리즘’은 3년 전, 페미니즘 및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지우려는 사람들의 의도 하에 만들어졌다. 온라인 커뮤니티 내에서 생성된 이 단어는 이듬해 8월 나무위키에 ‘이퀄리즘’이라는 이름의 문서로 다시 정리되었는데, 사실과는 다르게 이 개념이 ‘서구권에서 페미니즘의 역차별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상’이라 소개해 문제를 빚었다. 일각에서는 ‘젠더 이퀄리즘’을 다룬 문서가 올라오기 이전 (이퀄리즘이라는 개념이 처음 언급된)디시인사이드 웹툰 갤러리 등에서 이퀄리즘을 필두로 여론을 형성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을 근거로, 나무위키의 문서가 순전히 날조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몇 사람들은 엠마 왓슨이 UN Women 2014 연설 당시 ‘젠더 이퀄리즘’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고 주장하며 이 개념을 견고히 하고자 했지만 이 또한 허위사실로 밝혀졌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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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간의 온라인 토론 끝에 나무위키는 해당 문서의 제목을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으로 교체하고, 기존 문서에서 다루었던 정보의 허구성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수정했다. 그러나 한 번 파급된 ‘젠더 이퀄리즘’은 여전히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쓰이고 있는 또 다른 용어가 바로 ‘양성평등’이다. ‘페미니즘 대신 양성평등’을 쓰기를 권유하는 사람들은 양성평등이라는 워딩이 페미니즘에 비해 온건하고 중립적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으로는 결코 실질적인 평등을 이룩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권리 회복을 주장함으로써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상태에서부터 출발해 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페미니즘과 달리, 양성평등은 기계적 중립론을 고수하면서 실질적으로 신장시켜야 할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의 권리를 묵살한 채 평등만을 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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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몇 번 봤을 수도 있을 이 그림은 평등과 실질적 평등의 차이를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현재의 상태를 인식, 고려하지 않은 채 말하는 평등은 곧 왼쪽 그림과 같은 결과를 불러온다.


이렇듯 페미니즘을 대체한다는 명분으로 제시된 용어들은 그 이름에 ‘평등’이라는 개념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마치 그들이 반대하는 페미니즘이 평등을 배척한다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는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대한 오해 내지는 부정적인 인식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이러한 흐름을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가시화된 흐름에 대한 백래시(Backlash)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2]


그렇다면 페미니즘이 정말로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페미니즘, 여성주의 이론은 고정된 이념 또는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있다. 하지만 페미니즘 분파들 사이에서도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항들이 있으며 이는 다음과 같다.


1. 여성과 남성은 살아가면서 성별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하고, 페미니즘은 이 경험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
2.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수많은 사회 내 관계 중 일부가 아닌, 사회 구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
3. 여성에 대한 억압이 사회 구조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현재 구조의 기원을 탐구해야 한다는 점. (출처: 페미위키)

또한 페미니즘은 기존 사회를 지배하던 남성 중심의 사고 체계 타파를 지향하는데, 이때 ‘남성 중심의 사고 체계’란 이분법적 사고를 의미한다. 세상을 여성과 남성, 성년과 미성년 과 같이 둘로 나눈 후 위계를 정하는 지금까지의 이분법적인 체계로는 실질적인 평등을 도모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페미니즘의 주장이다. 분류가 곧 우열이 되는 사회는 늘 너무 당연하게 배제되는 사람들을 만들고, 경우의 수를 딱 두 가지로만 두어 무한한 사고와 가능성을 그 자리에 묶어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체계를 유지한다면 성차별주의는 결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 공동체에, 전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지성을 제공한다. (중략) 남성 중심 사고의 기본 구조는, 세상을 인식자를 중심으로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이다. 이분법 사유에서는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타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정희진, 교양인, 2005, <페미니즘의 도전>,23-24쪽)


페미니즘은 우리가 쉽게 눈치 채지 못하고 지나쳤던 사회적 차별들에 주목한다. 차별의 기준은 비단 성별뿐만이 아닌, 인종, 나이, 성적 지향성, 국적 등을 포함한다. 주위에 만연한 차별의 한 끄트머리를 잡고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우리는 마침내, 나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 누구나 (어떠한 기준에 의해)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페미니즘은 이 사실에 대한 인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스스로에게 내재되어있는 타자성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것을 권한다. 지금껏 억압받아오던 존재들을 숨김없이 내보이고, 배제되는 사람 없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실질적 평등을 펼칠 장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을 둘러싼 부정적 인식과 비난이 오로지 페미니즘의 의미에 대한 외부의 오해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갓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된 내가 보더라도 맞는 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 현상은 그 원인들이 다양하며, 개중엔 그 원인이 페미니즘으로 묶인 커뮤니티 내부에서 생겨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알고 있어야 하는 점은, 페미니즘이 지금까지의 세계를 지배하던 하나의 이분법적 사고에 도전하는 기여 그 자체로써 의의를 지닌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한 대상을 나타내는 언어는 그 대상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언어, 개념, 이름은 동떨어진 경험, 사유들을 결집시켜 하나의 실체를 이룰 수 있도록 돕는다. 집이 바뀌면 그 안의 존재들 역시 변화를 겪는다. 언어가 바뀌면 그 언어가 가리키는 존재들은 더 이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다.


페미니즘에 대한 얕은 인식은 작지 않은 규모의 오해를 불러왔다. 페미니즘은 ‘젠더 이퀄리즘’을 대표로 하는 다른 대체어들에 의해 ‘교체되어야’ 할 언어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다른 언어로 바뀌어 그 존재 의의를 잃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은 여전히 페미니즘으로서 남아야 한다.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참고 문헌을 찾던 중, 비슷한 주제를 다룬 기사를 발견했다. 나로써는 ‘지금 배워가고 있는 것’에 대한, 그래서 어쩌면 조금 부족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보다 확실한 문장들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이유로 이 기사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을 함께 나누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역사적 맥락을 이해했다면, ‘성평등을 위한다면서 왜 페미니즘이야?’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된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이외에 이러한 역사와 맥락, 호흡과 언어를 온전히 담아내고 드러낼 수 있는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역사도, 투쟁도, 호흡도 담고 있지 않은 껍데기로서의 언어, ‘이퀄리즘’은 그것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라는 언어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언어들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탈역사적이고 탈맥락적인 ‘현재의’ 시각에서 그 언어들의 표피만을 살피고, 그 언어들에 자신이 가진 편견과 무지를 부착하려는 이들, 문제는 바로 그런 ‘당신들’에게 있다. 어떠한 삶들도 포함하지 않은, 그렇기에 무던한 플라스틱 같은 언어로는, 결코 오랜 시간 동안 피와 땀, 숨과 삶을 머금으며 정제된 언어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퀄리즘이 아닌, 페미니즘이어야 하는 이유다.

(잠망경, 2017년 2월 19일 기고, <그럼에도 이퀄리즘이 아닌, 페미니즘이어야 하는 이유> 일부)



[1] 실제로 그녀의 연설에서 ‘젠더 이퀄리즘’이 언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만 ‘gender equality’라는 말이 몇 차례 나왔을 뿐이다.

[2] 사회적 진보/변화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예로는 페미니즘을 대중적으로 크게 알린 메갈리아 이후, 심해지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각종 공격들이 있다. (출처: 페미위키)


참고 문헌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2005, 교양인

-벨 훅스(권김현영 해제, 이경아 역),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2017, 문학동네

-다연, ‘연세대학교 내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조사’ 답변 중 일부, 2017/12/2~6

-페미위키, ‘페미니즘’, ‘젠더 이퀄리즘 날조사건’, ‘페미니즘이 아니라 양성평등’, ‘백래시’

-잠망경, 2017년 2월 19일 기고, <그럼에도 이퀄리즘이 아닌, 페미니즘이어야 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17년 2월 8일 기고, <‘젠더 이퀄리즘’? ‘양성평등’은 평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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