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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9호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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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Mar 08. 2024

〈비행일지〉 속 페스포트를 기록하다

편집위원 어푸

  대학에서는 매 학기 수많은 동아리가 문을 열고 닫는다. 구성원이 계속해서 변하는 대학에서 이러한 생성과 소멸은 슬플지언정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연세대학교 페미니즘 동아리 ‘페스포트’는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닫는 전시를 열어 그 소멸의 순간을 안팎에 외치기를 택했다. 그렇게 2023년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연세대학교 백양누리 지하 1층 무악로터리홀에서 〈비행일지〉라는 제목의 전시가 3일간 열렸다. 전시는 ‘연세대 마지막 페미니즘 동아리’가 끝내 활동을 마무리한다는 경향신문 플랫팀의 여성 서사 아카이브 기사를 통해 SNS 등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해당 기사에서 페스포트의 구성원들은 활동에 종지부를 찍게 된 배경으로 대학 내 백래시로 인해 페미니즘 담론이 위축되고 있는 현실을 짚었고, 그럼에도 페스포트는 8년 동안의 활동으로 학내외에 많은 변화를 만들어냈음을 말하기 위해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전시의 이유를 설명했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매일같이 마주하는 차별과 혐오를 줄이기 위해 지속해온 싸움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백래시가 몰아치고 활동이 불안정해지는 시기에 서로를 믿고 지탱할 수 있는 안전한 공동체를 꾸리기 위한 노력도 존재했다. 


  페스포트가 버텨온 역사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문우편집위원회는 전시 첫날인 11월 30일 전시회장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전시물을 벽에 붙이고 있던 전시회장 지킴이 도요가 편집위원들을 맞아 주었다. 도요는 전시를 보면서 원하는 곳에 자신의 감정에 해당하는 스티커를 붙이면 된다는 말과 함께 편집위원들에게 지도 핀 모양의 스티커가 이십여 개 붙어 있는 스티커 판을 한 장씩 건네주었다. 전시회장에는 ‘고양이발바닥’이라는 이름의 단과대 동아리로 연세대학교에 뜬 시점부터 고군분투한 시간 끝에 자리를 뜨는 시점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8년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었다. 검은색의 굵은 시간선 위로 쓰인 ‘등장하다, 싸우다, 살피다, 뜨개질하다, 떠나다’ 등의 소제목을 통해 페스포트가 어떤 굵직한 흐름 속에서 활동을 이어왔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소제목 아래의 활동들을 따라가다 보면 연세대학교에서 페미니즘을 화두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뿐만 아니라 한국의 페미니즘 담론이 겪어온 변화가 고스란히 페스포트의 역사에 녹아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전시회장을 나서며, 수많은 즐거운 기억이 남아 있으나 항상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이 시간을 거쳐 오는 동안 페스포트가 나누었을 고민들에 호기심이 생겼다. 페스포트의 구성원들은 어떤 변화를 겪었으며, 그 과정에는 어떤 크고 작은 부침과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한 대화가 있었고, 또 비행의 끝에서 이들은 어떤 즐거움과 아쉬움을 가지고 ‘착륙’하고 있을까? 페스포트의 울퉁불퉁한 시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문우편집위원회의 어푸와 유연은 눈 오는 1월의 어느 날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전시의 전 과정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도요와 비누를 만났다.      


    

연세대학교를 ‘고발’하다     


어푸 / 먼저 두 분 소개부터 부탁드려도 될까요? 두 분은 언제부터 활동을 하셨나요?   

  

도요 / 안녕하세요, 도요입니다. 2016년에 페스포트 만들 때부터 같이 만들었고 그 이후로 쭉 활동했습니다.     

비누 / 안녕하세요. 제 활동명은 비누고, 18년도 입학했을 때부터 이번에 전시할 때까지 쭉 활동했었습니다.     

어푸 / 전시의 초반에 이 동아리가 ‘고양이발바닥(이하 고발)’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고발 시절 초창기 회원들이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도요 / 고발은 이과대 학생회를 하면서 시작했어요. 그때가 2016년이었는데,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과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가 겹치며 학생회에서 결정해야 되는 사안 중 대다수가 페미니즘적 관점이 없으면 안 되는 사안들이었어요. 과별 회장단이나 집행부끼리 많은 다툼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생각의 결이 맞는 친구들끼리 이과대학 내에서 이과대학에 필요한 페미니즘 공부를 해보자는 꿈을 가지고 3명이서 고발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참깨(당시 페미니즘 자치단체)나 엘리스(당시 문과대학 페미니즘 학회)에 들어갈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다른 단과대 단체에 쉽게 들어가기 어려워서 이과대학 내부에 남게 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이 공동체 내에서 페미니즘 단체를 만들고 자정 작용을 시도해야하지 않겠냐는 문제의식이 있었죠. 그래서 처음에 고발을 이과대학 페미니즘 동아리로 만들게 되었어요.  

   

어푸 / 초반에는 주로 어떤 주제의 세미나를 진행했나요?     


도요 / 초반에는 가족을 큰 테마로 잡고 갔었어요. 가부장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내용을 많이 다루었고, 그것과 함께 이과대학 내의 여성혐오나 차별에 대한 성찰 이런 식으로 주제를 가져가면서 일상적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에 대한 다시보기를 주로 시도했어요.     


어푸 / 확실히 낯설게 보기 같은 것이 초반에 필요한 활동이었을 것 같아요. 페미니즘 안에도 정말 많은 다른 목소리가 있는데, 고발로 처음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런 관점의 차이는 없었나요?    

 

유연 / 페미니즘을 공부한 경험의 차이가 있었는지, 모두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는지도 궁금합니다.    

 

도요 / 후자에 조금 더 가깝긴 했어요. 페미니즘을 접해본 정도가 그렇게까지 많이 차이나지는 않았고, 예민한 정도는 조금씩 달랐죠. 그럼에도 하고 싶어 했던 것, 만들어가고 싶었던 공동체에 대한 지향점은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가 어떤 동아리를 만들어가야 하고, 만들어가고 싶은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어요. 그러면서 차이가 좁혀진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어푸 /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보자”라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 단체가 유지되기 쉽지 않은데도 고발이 계속 이어진 게 놀랍네요.     


도요 / 2016년이었기 때문에 강한 목표 의식이 있었죠. 그때 사건이 너무 많았어요.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단톡방 성희롱 사건도 2016년에 터졌었거든요. 지금 뭘 해야 하는지나 뭐가 필요한지에 대한 감각이 서로 비슷해서 그게 동력이 되긴 했었죠. 그리고 기본적으로 서로 편한 사이이기도 했어서, 외적인 동력이 없었다고 해도 만나서 같이 공부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것 같아요.   

  

유연 / 이과대학 페미니즘 동아리라고 하면, “이과대에서? 힘들겠다.”라는 말이 먼저 나오게 되는데요, 이과대에서 페미니즘 동아리를 하면서 힘들었던 것이나, 고발이 이과대 동아리로서 지니는 특징으로는 무엇이 있었나요?     


도요 / “이과대학 내에서 페미니즘 동아리라니 힘들겠다.”라는 문장이 사실 이과대학 내에 페미니즘 동아리가 왜 필요한지를 말해주는 문장이잖아요. 저희도 그걸 많이 느꼈고요. 그래서 우리가 잘하든 못하든 욕을 먹든 안 먹든 간에 뭘 많이 발산해 보자, 의제를 많이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런 맥락에서 나왔던 게 이과대학 동아리로 있을 때 당시의 오픈 세미나 주제들, ‘이과대학 내 여성’ 그리고 ‘세상에는 이런 과학자가 필요합니다’라는 주제들이었고요. 

구체적인 장면들을 지적하려는 시도도 많이 했었어요. 이과대학 내에 기본적으로 과학만능주의가 팽배해 있었거든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지만 과학은 가치중립적이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학문이다” 같은 분위기. 특별한 악의가 있는 학생들이 뭉쳐서 이과대학에 진학한 건 아닐 텐데, 1학년부터 그런 분위기에서 지내다 보면 본인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그런 단단하게 굳어진 분위기를 깨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고, 과학도 결국 패러다임일 뿐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2010년 중반 무렵까지 과학관에 여자 화장실이랑 여자 샤워실이 없었던 적도 있어요. (여자 화장실이) 1층에만 있고 2, 3, 4층에는 없다든가, 장애인 화장실이랑 같이 있다던가. 2016년까지 2017년까지 “우리 대학원에는 여학생 못 온다”라고 말한 교수도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이과대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에서는 이과대 부학장이 “여학생들은 임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담배 피우면 안 된다”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런 것에 대해 교수들이 제지도 안 하고 그냥 놔두더라고요. 그런 것을 문제화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어푸 / 이런 문제 상황들이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대응했나요?     


도요 / 당시에는 교수들에게 면담을 통해 항의하든가, 학생회 측에서 성명 발표를 하든가 하는 방식을 택했었죠.     


어푸 / 이런 대화 시도도 그렇고, 활동 전반에서 오픈세미나나 오픈영화제 같이 동아리 외부의 사람들을 만나려는 활동이 되게 많더라고요. 이렇게 바깥으로 뻗어나가고자 하는 지향도 이과대학을 자정하고자 하는 필요에서 출발했는지 궁금해요.     


도요 / 그렇기도 하고요. 저희가 본받고자 했던 단체가 참깨랑 엘리스였는데, 엘리스가 조금 더 학술적인 분위기였고, 참깨는 조금 더 실천적인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해요. 둘 다 잘 이어받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그것의 첫걸음이라고 생각을 했고요.    

 

  페스포트의 전신인 고양이발바닥이 이과대학 내부에서 싹튼 배경에는 학내외의 여성혐오 사건들이 큰 동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된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은 2016년 강남역 인근에서 여성을 표적으로 이루어진 범죄로, 범인의 여성혐오적 발언이 보도된 직후 SNS에서 여성혐오범죄에 대한 분노와 안전에 대한 불평등한 감각에 대한 증언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이 강력한 정동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추모 공간을 마련하거나 집회를 여는 것과 같이 피해자에 대한 애도의 움직임으로 표출되었으며, 불평등과 위험에 대한 감각이 널리 공유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적 관심 역시 증폭되었다. 


  페스포트의 초기 구성원들 역시 당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출발했다. 페미니즘의 필요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움직임에 나설 수 있었던 시대적 맥락에서, 여성혐오를 인식하기 시작한 이들이 학내 문제에 주목하며 주변을 바꾸고자 “당신의 일상이 불평등과 얼마나 가까웠는지”[1] 꼬집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에 학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페미니즘 공동체들의 지향점을 귀감으로 삼아, 페스포트는 특히 초기 구성원들이 속한 이과대학 내의 여성혐오를 지적하는 오픈세미나와 영화제를 진행하는 등 더 많은 사람들과 대화의 장을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다채로워진 고민의 갈래들     


 〈비행일지〉 전시회장의 벽에는 그간 진행한 세미나의 발제문부터 함께 작성했던 대자보, 외부 활동에서 활용한 포스터, 활동사진 등 페스포트의 역사를 담은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초기 페스포트의 세미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질문을 던지고 가족 공동체의 의미를 질문하는 등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젠더와 관련한 불평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활동이 지속될수록 그 주제가 점점 다양한 고민으로 시선을 넓히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2018년 가을에 열린 세 번째 오픈세미나 〈a stray〉의 포스터에는 ‘게임 문화 속 여성혐오와 게임 속에서 재현되는 젠더 롤’과 같이 페미니즘적 낯설게 보기의 차원에서 친숙한 화제가 있는가 하면,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난민혐오’와 같이 당시 한국의 페미니즘 담론에서 논쟁적이었던 주제가 등장하기도 했다.    

  

어푸 / 전시회를 따라가며 페스포트에서 세미나 등으로 다루는 주제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다양해지는 걸 느꼈는데요. 페미니즘을 통해 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을 넓게 가져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폭 넓은 화제를 다루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유연 / 처음에는 페미니즘 공부로 시작했던 동아리 활동이 나중에는 게임 문화도 다루고, 2023년에는 도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BDSM과 퀴어에 관한 발제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확장되게 됐는지 궁금해요.     


비누 / 제가 고발에 들어왔을 때는 이과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어요. 다양한 학과에서 다양한 친구들이 모였었거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해하고자 하는 부분, 좀 더 전달하고 싶은 부분들, 이런 것들이 모이다 보니까 주제가 많아진 면도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 보니까 주제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되고,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 이슈가 되는 것들, 아니면 우리가 더 알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까 되게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아지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그렇게 주제가 다양해진 것 같아요.     


도요 / 저는 공동체 담론 자체가 성장한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저도 사실 전시 기획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전시 기획하면서 세미나 주제를 일렬로 쫙 나열해보니까 가족에서 시작해서 점점 넓어지는 거예요. 고민이 쌓이다 보면 이런 식으로 사람이 계속 바뀌고 이런 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어요. 또 재미있는 게, 회의록 정리를 하다 보니까 2016년에 “우리 나중에는 이런 것도 했으면 좋겠다”라고 회의록에 써 두었던 것을, 한 2020년 2021년에 실제로 했더라고요. 회의록을 봐서 꺼내온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요.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 흐름을 정리해서 다시 보는 게 너무 좋았고, 그게 성장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비누 / 그 시간을 거치면서 단체도 성장했고 개개인도 성장했던 것 같아요.     


도요 / 저는 페미니즘이 개인한테 해방의 언어를 주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처음에 가족이나 가부장제 같은 주제는 사실 학문적인 느낌으로 공부했던 게 강했단 말이에요. 근데 개인이 동아리로부터 해방의 언어를 계속해서 습득하다 보니까 자기가 표현하고 싶었던 게 점점 많아진 거예요. 그래서 기존에 하고 싶었던 주제들을 나중에 가면 더 꺼내놓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다양한 주제로 개개인이 발제를 진행하게 되었고 이런 방식으로 공동체가 커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아리 이름을 변경하며”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과정이 곧 해방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음은 2019년 말 동아리가 ‘페스포트’로서 새롭게 출발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페미니즘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다양한 권리 의제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고, 비인간 종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비거니즘이 페미니즘과 닿아 있다는 인식은 곧 ‘고양이발바닥’이라는 동아리 명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고발로서 쌓아올린 동아리의 기틀을 되돌아보고 다시 만들어나가는 이 결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을까?  

    

어푸 /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볼까요. 사실 저는 이과대학 페미니즘 동아리를 고발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페스포트라는 이름만 듣고는 어떤 동아리인지 몰랐는데, 누군가가 “(페스포트가) 고발이야”라고 해서 놀랐단 말이에요. 동아리 이름을 바꾼 일에 대해 좀 자세하게 듣고 싶어요. 전시에도 “동아리 이름을 변경하며”라는 제목으로 이름을 변경하게 된 결정에 대한 글이 붙어 있었는데, 그 뒤에 더 많은 얘기가 있었을 것 같아요.     


유연 / 기존에 동아리 내부에서 그런 관련 논의나 세미나가 오래 있었던 건지, 활발하게 있었던 건지도 궁금하고, 이견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구성원 간에 어떻게 조율했는지도 궁금해요.     


도요 / 사실 당시 고발에서는 동물권 관련 논의가 전혀 안 되고 있어서, 제가 이야기를 진짜 많이 했어요. “동물 먹으면 안 된다, 우리 이 이야기 더 해야 되고 고발 이름 진짜 이상하다.”라고. 고발이라는 이름을 같이 만들었던 입장에서 좀 낯부끄럽긴 했지만요. 오픈 세미나 때도 동물 대상화란 무엇이며 고양이 발바닥이란 이름이 왜 잘못되었는가에 대해 한 꼭지 발제를 했었거든요. 19년도 한 해 내내 비거니즘 얘기를 계속했어요. 그리고 19년 끝날 때 “자 이제 바꿔볼까?”라고 제안했습니다.     


어푸 / 1년 동안 관련된 논의를 계속 제시한 거네요.      


도요 / 저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고 말을 하는 편이 에너지가 훨씬 충전이 되는 사람이어서 그렇게 했어요. 처음에 고발 이름 같이 정했던 친구들한테도 나 바꾸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물어보고, 아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얘기를 계속했던 것 같아요. 사실 모든 과정이 아주 바람직했다고는 기억되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동아리 명을 바꾸는 것이 굉장히 급하고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같이 고발을 만든 친구도, 바꿀 거면 “우리가 고양이발바닥으로 10년 활동한 다음에 바꾸는 것보다 지금 바꾸는 게 훨씬 낫다.” 그런 얘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바꾸는 거 싫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기도 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게 그럴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그만큼 권리 사안이니까요. 특별히 악의를 가진 사람이 고발에 없었고, 다들 공감하고.     


어푸 / 페이스북에 게시된 글에 그런 내용도 있었잖아요. “권리에 관련된 사안이기에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 옳지 못”[2]하다는 말을 보고, 총여 폐지 학생 총투표 때문에 나온 말일까 싶었는데요. 

    

도요 / 그렇지는 않았는데, 그 당시에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무작정 투표를 진행했다가 반대가 많으면 어쩌지 싶기도 했고요. 그럴 리는 없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총여 폐지 이후에 학내 모든 단체에서 인원이 몰려서 당시 고발 인원이 서른 몇 명이었거든요. 개개인하고 합의가 됐어도 투표를 올렸을 때의 분위기가 어떨지 모르고, 그런 분위기로 결정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 변경의 건을 설득해내기 위해 내가 열심히 긴 글을 써야겠다 생각했고, 아주 긴 글은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써서 종강총회에 가져갔죠. 총회에서 이 사항을 의결한 뒤에 논의한 내용을 글로 써서 공지방에 안내해서 바꿨고, 그때는 그게 제일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백래시[3]를 맞닥뜨린 2018년    


연세대학교 에브리타임 익명 게시글, “교내 친총여 동아리, 모임 및 기구 명단 공개,” 2019.01.04., 자료 제공 페스포트.

  페미니즘 담론이 누적되고 다양화되며 공동체가 성숙하던 시기, 다른 한편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세를 불리고 있었다. 2018년 5월, 총여학생회(이하 총여)에서 주관한 제2회 인권축제의 연사 초청에 대한 비난과 방해 움직임이 이미 대학가에 퍼지고 있었던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에 힘입어 조직적이고 집합적인 행동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이후 약 반년에 걸쳐 총여에 대한 퇴진 및 재개편 요구, 총여 폐지 및 관련 규정 파기, 후속기구 신설의 안에 대한 학생총투표 등 학내에서 여성주의 자치단체를 몰아내기 위한 사건이 몰아쳤다. 

  이에 학내외의 많은 공동체가 자보를 쓰고 연서명을 하는 등 총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대 활동을 전개하며 백래시에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총여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적 가치에 동의하는 개인과 단체에 대해 주로 익명 플랫폼인 에브리타임에서 높은 강도의 공격과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학내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반감은 온라인상에서의 지속적인 괴롭힘이나 직접행동을 통한 자치활동 방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노골적인 형태의 백래시[4]였으며, 이는 많은 단체들의 지속과 재생산에 어려움을 초래했다. 페스포트(당시에는 고양이발바닥) 역시 “친총여 동아리, 모임 및 기구”로 지목된 단체 중 하나였다.  

   

어푸 / 다음 질문으로는 2018년 학내 상황과 당시 공동체에 대해 여쭤보려 하는데요. 저에게 2018년은 막연히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페미니즘 동아리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인권축제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그게 걷잡을 수 없이 커졌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뿐 아니라 제가 있었던 동아리를 포함해 많은 단체들도 침체기를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고발은 그 시기를 견디고 지나온 거잖아요.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가 궁금합니다.     


비누 / 그러게요. 저도 18년에 입학하고 동아리에 들어간 지 한두 달 된 상황이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5월 이후로 6월에 학기 마칠 때까지의 기억이 거의 없고, 사람들이 계속 성명을 내고, 총여도 우총필(우리에게는 총여학생회가 필요합니다; 총여학생회 재개편 요구에 반대하는 학생과 졸업생 등이 조직한 연대체)도 계속 자보를 생산하듯이 쓰고. 저는 송도에 있으니까 중도에 대자보가 붙은 것, 플랑이 찢어지는 일들을 사진으로 보고. 그때는 페이스북 그룹 등지에서 친구들이 총투표나 총여와 관련한 글을 실어날랐는데, 저는 아직까지는 대응할 만한 힘이 남아 있는 신입생이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우총필이나 다른 단체의 글들을 이거 보란 듯이 실어 나른 기억이 있어요. 그때 고발이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때는 아직 싸울 만한 힘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총여 활동을 같이 하고 있는 친구도 있었고 그때 활동하는 부원들 대부분 17학번, 18학번이었고. 정확하게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다만 무력해하면서도 화내야 할 것에는 화내고, 저희끼리 으쌰으쌰하면서 잘 견뎌냈던 것 같아요. 그런 기억만 어렴풋이 나요.   

  

어푸 / 저는 아직도 그 시기에 대해 생각을 할 때, “이렇게까지 소진될 일이었나”라는 생각과 “그 시기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라는 생각이 항상 부딪히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 다른 단체의 상황이 정말 궁금했어요. 도요님은 기억이 나시나요?     


비누 / 18년도에는 저희 둘 중에는 저밖에 없었어요.     


도요 / 저는 18년도에는 군대에 있었다가 19년도에 동아리에 돌아왔거든요. 그때 저를 싫어하는 군대의 모든 사람들은 저를 공격했고, 반대로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부 저에게 질문 공세를 하거나, 총여가 왜 필요한지 대신 설명해달라는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저에게 외주 맡겼거든요. 그런 일에 지쳐 있었어요. 그래서 동아리에 돌아오고 나서는 뭔가를 하는 게 훨씬 더 저의 정신건강에 좋았어요. 내가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 너무 큰 에너지였고, 그래서 동아리 활동을 훨씬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했던 것 같아요. 그게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 중 하나였어요.     


비누 / 맞아요. 총여 사태를 겪고 18년도를 지내면서 많이 무기력했고 힘들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면서 18년을 버텨낸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여기서는 이해해 주고, 인정해 주고, 대화를 할 수 있구나” 라는 게 느껴져서 서서히 이 공동체에 애착을 가지게 됐던 것 같아요. 사실 인권축제 전에는 말도 거의 안 놓고 같은 학번끼리도 어색하게 인사하는 사이였는데… 힘든 시기를 같이 겪어서 친해졌고, 그것을 바탕으로 19년도에는 “한 번 힘들었었으니까 이번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좀 더 열심히 해보자” 하고 도전도 했죠. 전시회에는 제가 실수로 못 넣었는데 〈페스티벌 킥〉이라고,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주최한 페미니즘 축제가 있었어요. 거기에 부스를 신청해서 외부활동을 진행했어요.     

도요 / 함께 하는 게 에너지였어요. 2019년에는 생일파티도 하고 그랬어요. 동아리에서 매월 4월 생일자들 모이세요, 5월 생일자들 모이세요 해서 생일 파티 열고. 그것도 되게 큰 동력이었던 것 같네요.     


어푸 / 그렇다면 사건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단체의 입장에서 끝내 총여 폐지 총투표가 진행된 일련의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궁금해요. 폐지라는 사건이 당시 학내에서 여성주의에 입각한 자치 활동을 하고 있는 공동체들에게는 어떤 영향, 또는 의미였나요?   

   

도요 / 일단 저한테는 총여학생회가 믿을 수 있는 연결망이라는 점이 제일 중요했어요. 총여에 이야기를 하면 언제든 우리가 무슨 사업을 하고 싶을 때 다른 단체와 연결시켜줄 수 있고, 총여가 시간이 지나더라도 남아 있을 거라는 안정성. 그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는데, 총여가 없어진 이후를 생각하면 정말 단체들끼리 알아서 연대를 해야 하잖아요.


유연 / 지금 진짜 그래요.     


도요 / 페스포트를 사람들이 잘 몰랐던 것도요. 총여가 부재한 상황에서, 저희가 이름을 바꾼 이후에 동아리 바깥의 사람들이 페스포트까지 연이 닿기 쉽지 않았거든요. 총여가 있었으면, “여러분 모이세요” 하면 관련 단체들이 모일 수 있었을 텐데. 굉장히 어려워진 상황이라는 게 느껴져요. 물론 총여가 갖는 의미는 훨씬 더 크고 많았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뭔가를 하고 싶어졌을 때 그걸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모르게 되었다는 점, 어려워졌다는 점.    

 

비누 / 저는 18년도에 페스포트 말고 생활과학대학(이하 생과대) 성평등위원회를 했었는데, 18년도 총여 사건 이후로 활동 인원이 급격하게 줄었어요. 원래 생과대 성평등위원회도 그 전 생과대 학생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곳이라서 전 학생회장의 지인들, 학생회를 같이 했던 사람들이 생과대 성평등위원회에 같이 있었어요. 그렇게 온 사람들 중 다수가 총여 사태 이후로 떨어져 나가고, 19년도에는 거의 활동 인원이 남지 않게 됐어요. 사람을 모으려고 해도 총여가 없어진 상태에서 학교의 여론이 이렇다고 쐐기가 박혀버린 거죠. 그래서 당시에는 단체에 가입하기 쉽지 않았던 것도 있는 것 같더라구요. 이후에 들은 거지만 과 후배들이나 친구들이 그때 페스포트든 생과대 성평등위원회든 들어가고 싶었는데 잘 할 수 있을지, 당장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내가 효용이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있었고,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여 단체에 들어가기 무서웠고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개개인한테도 총여의 부재가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유연 / 확실히 그 직후에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공동체에 들어가기는 무서웠을 것 같아요.      


어푸 / 저는 1학년 때 다른 동아리를 하나 했었는데, 같이 활동할 때 에타에서 그거(총여 사건 관련 게시물) 봤냐고 낄낄대면서 이야기를 하는 틈에서 불안한 느낌을 계속 받았던 것 같아요. 내가 페미니즘 동아리에 속해 있다는 걸 알면 어떡하나 막연히 불안하고, 총여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당연하게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상황도 불편하고. 그런 불안정한 상황 자체가 여성주의 기반 단체의 활동과 조직의 많은 기틀을 흔드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          



백래시 이후이어나가고 버텨나간 시간들 

    

유연 / 페스포트가 활동을 하는 과정이 늘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굴곡들이 있었다면 어떤 굴곡이 있었는지, 그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 있다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비누 / 저는 18년도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해의 오픈 세미나로 총여학생회 사태를 다뤘을 거예요. 그때 사람들이 진짜 많이 왔어요. 주제 때문인 것도 있고 어쨌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때는 사람들이 되게 많이 왔고 19년까지도 많이 왔는데, 20년도에 코로나가 터졌잖아요. 저희는 그동안 항상 오픈 세미나나 다른 인권축제 이런 활동들을 통해서 교내 사람들을 만나왔는데 19년도 말에 이름 딱 바뀌고 나니까 코로나 때문에 밖으로 나갈 길이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든 것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 뒤에 전시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또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내부적으로도 고민을 많이 했던 시기 같아요.     


어푸 / 전시회에서 페스포트의 활동을 쭉 따라갔을 때, 20년에 이르러서 타대 성폭력 이슈나 n번방, 사법부나 에타에 성명문을 쓰는 활동들이 눈에 띄었는데요. 총여가 사라지고 학내 활동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페스포트가 학교 바깥의 의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을까,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이렇게 많은 학외 활동을 하게 된 이유가 있었을까요?     


도요 / 말씀하신대로 학내활동이 거의 죽다시피 했었고. 그 상황에서 페스포트의 이름으로 외부활동에 서명하는 것 말고는 그렇게 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던 거죠. 동아리 하나로서 힘을 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어서, 큰 단체 활동에 여러 단체가 모여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기억해요. 내부에서 뭔가를 하기에는 백래시가 심해서 사람이 안 모이는 게 컸어요. 그 점이 좀 아쉽죠.      


어푸 / 19년과 20년도 무렵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있었나요?     


비누 / 줌 회의도 시도해보고 코로나 시기에 신입생들 어떻게 모집해야 할지, 어떤 세미나를 진행하는 게 좋을지 이야기하기는 했는데 그게 잘 실현되거나 지속되거나 그러지는 못했어요. 일단 줌 회의부터 오는 사람들이 들쑥날쑥하고 그래서.     


도요 / 줌 켜놓고 아무도 안와도 할 겁니다, 했습니다, 회의 공지 올리고. 혼자 줌 화면 켜놓고 앉아있고. 꾸준히 활동을 했다는 역사를 남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버텼어요.     


비누 / 혼자만 앉아있거나 둘 셋만 앉아있거나… 오늘 뭐 했는지 이야기하고 30분 있다 끄고 그런 경우가 사실 대부분이었고.     


유연 / 그 시기의 활동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된 건가요?     


도요 / 주로 줌으로 근황토크를 했죠. 서로 근황을 들고 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심리적 부담감이라고 할까요? 다른 동아리는 4명씩 모임 개최하고 그러기도 했는데 저는 코로나 때 거리두기를 지키는 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어요. 중요한 가치적인 문제라 생각해서, 4명씩 모이면 모일 수 있는 건데도 ‘우리 이거 잘 지켜보자’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온라인 모임 위주로 진행했어요. 동아리 살리자고 4명씩 모였다가 저희가 걸리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죠. 속상했어요.      


유연 / 코로나를 거치면서 단체 재생산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아요. 신입회원에 관한 논의와 단체 재생산을 어떻게 해왔는지, 그리고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도요 / 사실 저희는 재생산에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은데요……

     

비누 / 한참 구성원이 고여 있다가 신입부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21, 22년도 쯤. 그리고 그때 들어온 사람들마저 졸업했거나 편입하신 분이거나 저와 같은 학번이거나.    

 

도요 / 재생산은 단체의 노력으로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정말 운이 크고. 저희도 어떤 테마로 동아리의 활동을 가져가야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지,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활동을 할지 같은 이야기를 많이 했죠. 대외활동을 하면서 사회변혁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내부의 안전한 공동체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2016년부터 계속했었는데요. 그때는 둘 다 가져가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었는데, 2021년에 동아리를 앞으로 어떻게 꾸려나가고 싶은지에 대해 논의할 때는 안전한 공동체를 꾸리는 게 우선일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거기에 초점을 맞췄고, 그 면에서 보면 저희는 잘 한 것 같기는 해요. 그 논의 이후에 2022년과 2023년의 활동은 굉장히 잘 이루어졌고 안전하고 편안한 공동체 꾸리기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이게 성공과 실패를 나눌 수 있는 요인은 아니지만, 너무 보람차고 만족스러운 활동과 시간이었고 하고 싶은 것을 잘 했냐고 물으면 잘 한 것 같아요. 이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에 동아리 활동을 마무리하고 전시를 준비할 건지, 아니면 한 학기 더 버텨볼 건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지금 잘 마무리하는 것도 너무 중요하다. 재생산을 해서 계속 이어나가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우리끼리 지금 즐겁게 잘 놀고 즐겁게 잘 마무리하는 것도 너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재생산이 우리의 목적이 되지는 않았고, 그런 면에서 그 이후가 만족스러웠어요.   

  

비누 / 오히려 부담이 덜어진 느낌? 물론 저나 도요도 동아리 활동을 오랫동안 지속한 만큼 슬프긴 했는데. 그렇지만 저희가 언제까지나 붙어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도 이제 졸업하고 이 친구도 졸업하고 하다 보니까, 안 될 것 같아서. 깔끔하게 그냥 끝내기로 결정한 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되게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도요 / 전시회 축사를 해 준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동아리가 있어서 어떻고 없어서 어떻고가 아니고 동아리라는 건 원래 필요하면 생기는 거고, 그 당시에 필요한 사람들이 없으면 이제 없어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없어지는 것 자체가, 재생산이 안 되는 것 자체가 너무 슬픈 일이 아니고, 당시에 동아리가 필요 했던 사람들끼리 서로 잘 지냈으면 충분히 괜찮은 거라고 했는데, 저희한테는 그게 맞았다고 생각해요.     


어푸 /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있었나요?     


비누 / 어떻게 하자는 매뉴얼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안전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불편한 요소들을 줄여나가야 되는데, 불편한 요소들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했죠. 그렇게 되려면 서로 친해져야 되고 알아가야 되니까 같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들을 계속 마련했던 것 같아요.


도요 / 저희 뭐 했죠? 전시회 같이 가고. 영화 보기, MT 자주 가기.     


비누 / 사소하게는 모일 때마다 근황 나누는 것도 그렇고. 그런 식으로 친해지고 나서 서로 알아가면서 무엇을 불편해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알아가고, 그런 것들을 서로 존중해 주고 이야기하고 조절해 나가는 과정에서 모두에게 나쁘지 않은 단체가 됐던 것 같아서.     


도요 / 저희 마지막에는 페미니즘에 그렇게 집착 안 했던 것 같은데. (웃음) 근데 그것도 좋은 점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말을 어떻게 드려야 될지 잘 모르겠는데. 우리 이제 페미니즘 이야기 좀 해볼까,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게 사실 모두에게 편하거나 쉽지는 않잖아요.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고 들을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고 그것이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끼리였다는 점. 이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걸 잘 이뤄냈다고 생각해요.     


유연 / 마지막엔 어떤 목적성을 가진 동아리라기보다는 정말 공동체에 가까웠네요.     


도요 / 그렇죠. 2017년에 세미나를 하면서 나왔던 질문, “고양이발바닥은 가족을 대체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 에 답해보자면, 물론 가족을 대체할 공동체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각자한테 필요한 공동체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누 / 되게 좋은 공동체였어요 저한테는.


도요 / 저한테도 그래요. 아, 그리고 저는 저희 부원 중에 한 친구가 전시회의 일지에 “특별히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동아리에 들어온 건 아니었다.”라고 썼잖아요. 그거 보고 너무 웃겼는데 사실 그게 되게 중요한 말이라고도 생각했거든요. 저희한테 필요한 거는 페미니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 뿐이지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고, 그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과 환경이 너무 다 중요한 거죠.     


비누 / 저희 크리스마스 파티 같은 것도 많이 했어요. 신년 만두 굽기 모임 이런 거 하고.    

 

도요 / 말복에 모여서 말랑 복숭아 먹기도 했어요. 말랑 복숭아 엄청 많이 사서 둘러앉아서. 깎는 사람 빼고는 다 좋았죠. (웃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외적 요인으로 인한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버텨내는 것이 2019년 경 페스포트가 유지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면, 동아리 명을 바꾸자마자 들이닥친 팬데믹은 그 에너지를 십분 발휘할 수 없는 환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줌 회의로 만남을 지속하는 것의 어려움을 경험하면서도 활동을 이어나가고 그 기록을 남기고자 했던 노력은 팬데믹 이후 다시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인원 충원 등의 어려움을 겪는 활동의 막바지까지 페스포트는 함께 무언가를 하며 공동체를 돌보는 일에 집중했다. 대선 뒤풀이 진행, 10.29 참사 이후 이태원에서의 엠티 진행과 해방촌에 대한 공부, 강남역 7주기 추모활동, 크리스마스 파티와 신년 만두 빚기 모임을 진행하는 등, 사회와의 재연결을 도모하며 그 과정에서 공동체를 다시 끈끈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전시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실천 활동을 어렵게 하고 불안한 감각까지도 유발했던 많은 사건을 지나오며 공동체로서 외부의 무언가를 바꿔나가는 것만큼이나 내부적으로 즐겁고 안전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구성원을 돌보고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한 가치가 되었고, 그렇기에 동아리의 끝맺음 역시 단순한 실패로 감각되지는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비행일지〉 자세히 보기      


어푸 / 전시회에는 사람이 얼마나 왔나요?  

   

도요 / 저희 150명 좀 넘게 왔어요. 생각보다 많이 왔어요. 전시 관람객들한테 나눠줄 스티커를 100장 뽑고 이것도 많을까 걱정했는데 전시 이틀째에 다 떨어진 거예요. 좋은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마지막 날에 오시는 분들은 콘텐츠가 없는 건데… 그리고 저희가 받았던 관심 중에 제일 규모가 큰 관심이어서, 끝날 때나 이렇게 관심이 많구나. 좋으면서도 약간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푸 / 에브리타임에 홍보글을 올렸을 때 비난 여론과 폭력적인 댓글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전시에 불만을 표하거나 방해하려 하는 관람객은 없었나요?     


도요 / 일단 없었어요. 그런 의도인가 싶었던 관람객들은 좀 있었는데 그래도 어쨌든 한 바퀴 둘러서 보고 나가더라고요. 자기들끼리 웃고 그런 건 있었는데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괜찮았어요.   

  

비누 / 사실 되게 걱정했거든요. 그래가지고 전시 포스터를 어디다 붙이느냐 마느냐도 이야기를 되게 많이 했었고 저는 회사를 다니니까 지킴이가 보통 혼자서 전시회를 지킬 텐데, 대처 같은 것들이 잘 이루어질까 되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대처할 일 없이 잘 끝나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어요.     


도요 / 좋은 건 아니지만 전시 공간에서 자본이 주는 위압감이 있어서  함부로 어떻게 하기 힘들었을 것 같고, 그리고 옆에서도 계속 다른 행사를 하던 중이었으니까 그 영향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저희 입장에서는 다행이었죠.      


어푸 / 전체 기획 회의는 얼마 정도 했나요?


도요 / 딱 세 달 했어요. 한 학기 더 버텨볼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한 학기 내내 오프라인으로 모여서 전시를 기획하면 뭐라도 되지 않겠냐고 이야기했죠.     


비누 / 한 학기의 활동이 곧 전시 기획이었던 거죠.     


유연 / 인터뷰 질문 짜면서 다른 편집위원이 구글 문서에 전시 제목에 들어가는 비행이라는 단어가 ‘날다’도 되고 ‘탈선’의 의미도 있어서 정말 좋다고 적어놨더라고요.   

  

비누 / 아, 맞아요. 알아주셔서 감사하네요.    

  

도요 / 〈비행일지〉 전시 제목 정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었어요. 전시 제목도 정하기까지 한 달 정도 걸렸던 것 같네요. 처음엔 ‘뜨다’를 가지고 제목을 만들려고 했었거든요. 그러다가 말씀하신 그런 의미가 있는 ‘비행’을 넣고 싶다는 의견이 나와서. 〈비행일지〉로 가자.      


비누 / 페스포트라는 동아리 이름과 연관을 지으면서 마무리되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활동 아카이브 전시회를 만들려 해서, 일지가 가장 그 느낌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뜨다’라는 키워드도 포기하기는 아까워서 부제로 각 시기의 소제목으로 활용했어요.   

   

유연 / 세미나를 많이 하셨을 텐데 그중에서 전시회에 넣을 내용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었을까요?      


도요 / 일단 남아있는 자료가 전시하기에 적합해야 했어요. 예를 들어서 메모처럼 간략하게만 남아있는 것도 있었거든요. 너무 실명을 거론하며 대화한 것도 있었고, 그 당시의 대화가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전시를 해뒀을 때 혐오적이라고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들도 있었어요. 그런 것들을 빼고. 기획할 때 재밌는 흐름이 나올 것을 막 의도하고 자료를 정한 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또 그렇게 되기도 했어서 그게 좋았죠.   

  

어푸 / 저는 참여형 전시 기획이 진짜 좋았어요. 전시회장 돌고 나니까 왼쪽 빨간 스티커들만 고갈되어 있고.     

유연 / 맞아요. 스티커 붙이는 게 재미있었어요.   

  

  전시회에서 제공된 위치 스티커 판은 관람객을 페스포트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나온 기획이었다. ‘그곳에 어떤 내가 있었는지’라는 글귀와 전시장 곳곳에 흔적을 표시해달라는 설명이 적힌 스티커 판은 전시를 찾아온 관람객을 위한 감정의 팔레트였다. 위치 스티커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부정에서 긍정에 가까워지고,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갈수록 동적에서 정적에 가까워지는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정적이며 동적인 좌상단의 지도 핀은 붉은색 지도 핀 옆에 ‘분노하는’이나 ‘화난’ 같은 말이, 긍정적이며 동적인 우상단에는 노란색 지도 핀에 ‘행복한’과 ‘희망찬’이, 부정적이고 정적인 좌하단의 파란색 핀 위에는 ‘슬픈’과 ‘속상한’이, 긍정적이고 정적인 우하단 녹색 핀 위에는 ‘편안한’이나 ‘위로받은’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전시회장을 방문한 편집위원들도 각자가 전시물을 보고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스티커를 붙이며 전시를 천천히 살폈다. 전시의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 부정적인 감정을 담은 붉은 계열의 스티커는 모두 사용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담은 푸른 계열의 스티커는 많이 남아 있는 것을 공유하며 묘한 공감대를 나누기도 했다. 이 시간은 편집위원들에게 과거를 떠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페스포트가 걸어온 길을 그려보고 그 시간을 짐작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비행일지〉 전시 위치 스티커 템플릿과 전시 마지막 날 “페스포트, 자리를 뜨다” 섹션에 위치 스티커가 잔뜩 붙은 모습. 페스포트 제공.

비누 / 다들 빨간 스티커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희도 정말 진지하게 고민을 했어요. 붉은 면을 넓히고 푸른 면을 좁힐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을 했는데 결국은 원래 계획대로 갔죠.    

 

어푸 / 전시 막바지에 스티커가 제일 많이 붙었던 곳은 어디인가요?     


비누 / 마지막 섹션인 자리를 뜨다. 오픈 세미나 중에서는 총여학생회 백래시 페미니즘에 꽤 많이 붙은 편이었어요.     


어푸 / 위치 스티커를 붙이는 기획은 어쩌다가 하게 되었나요?    

 

비누 / 일단 저희는 오신 분들이 이 전시를 훅 훑고 지나가는 건 원하지 않았고 저희가 이만큼 많은 것들을 해왔어요, 라는 것들을 좀 더 잘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참여형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고. 

    

도요 / ‘직접 만드는 비행일지’를 테마로 일지를 쓰는 것이나 뜨개질, 자수를 해보자는 제안도 있었고, 구슬이나 인형 같은 것을 전시에 가지고 다니면서 놓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보거나, 책갈피 같은 것을 뜯어서 모을 수 있게 하자는 논의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스티커를 붙이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스티커를 붙이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부분도 한눈에 볼 수 있고 색깔로 직관적으로 느낌이 나타나는 게 전시 구성에 좋을 것 같았고. 이 전시가 어쨌든 우리가 걸어온 길이니까, 거기 위에 지도 핀 모양으로 함께한다는 걸 표시할 수 있는 스티커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스티커로 기분을 나타내면 좋지 않을까 해서 스티커 기획을 정교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런 상징으로 압축시켰을 때 감정들이 좋다 싫다 정도로 납작해지는 것은 방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단순 스탬프 행사처럼 약간 재미없이 의무감에 하는 행사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이 전시가 관람객한테 단순하고 표면적인 경험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전시를 텍스트로 줄였을 때 너무 간단하게 요약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논점들을 정리해서 관련 회의만 세 달 가까이 했어요.     


비누 / 더 잘 하고 싶어서 오래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감사하게도 다들 좋아해 주셔가지고.   

  

어푸 / 덕분에 전시 내용을 길게 보게 되고 보는 내내 고민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유연 / 스티커가 아까워서, 이거를 여기다 붙여도 되나? 이 스티커를 붙일 수 있는 데가 더 나올 것 같은데… 이러면서.     


 〈비행일지〉의 기획 중 대자보 옆에 붙은 포스트잇도 편집위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여러 사안을 마주하고 작성한 대자보를 전시하며, 페스포트는 그 옆에 현 시점에서 살폈을 때 의미가 불명확한 것이나 부적절한 표현에 대한 자체적인 피드백을 대자보 옆에 포스트잇으로 덧붙여 두었다. 많은 성찰과 다짐이 덧붙어 있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의견을 표명하는 과정에서 쉽게 발생하는 실수를 성찰할 뿐만 아니라, 페스포트가 활동을 지속해오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에서 나누는 고민 역시 깊어지고 넓어졌음을 볼 수 있는 기획이었다.   

       

페스포트에서 작성한 대자보에 덧붙인 포스트잇 피드백들, 문우편집위원회 촬영.

어푸 / 전시회를 보면서 2019년도 무렵에 대자보를 많이 쓴 게 보였거든요. 이 시기에 외부적으로 목소리를 많이 내려고 했던 동력의 한편에서는, 당장 어떻게든 행동해야 한다는 뜨거운 감정이 분명히 느껴지더라고요. 페스포트가 썼던 대자보를 돌아보면서 그런 감정들을 다시 마주할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비누 / 저희끼리도 이야기를 했던 건데, 자보를 쓰게 되면 당시 그 상황에 저희들의 감정이나 정리되지 않은 생각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자보에 일단 쏟아놓다 보니까 말이 좀 거칠어진 부분이나 아니면 우리가 그 짧은 시간 안에 내용을 정리하느라 미처 고려하지 못한 다른 혐오적인 부분들이 지금 돌아보면 좀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지점을 피드백 하듯이 전시를 해보자는 의견도 나왔던 것 같아요.     


도요 / 지금 그렇게 자보 쓰라면 못 쓰거든요.     


비누 / 맞아요. 지금 못 써요.     


도요 / 빡침과 분노가 있어야만 쓸 수 있는 자보가 분명히 있는 것 같고.     


비누 / 빡침과 분노와 기력, 그리고 사람!     


어푸 / 전시를 보면서 이렇게 자보를 쓰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감정과 기력과 응집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도요 / 자보를 완벽하게 쓰려고 하면 절대 못 내는 것 같아요. 돌아보면 당연히 아쉬움이 남을 글들인데, 그래야만 대자보가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저희는 전시를 위해 예전 자보를 피드백, 첨삭하는 것도 되게 재미있었거든요. 피드백 다는 것 자체가 그때 나왔던 감정들도 지금 다시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지금 다시 생각해낸 것들에 대해서도 문장으로 정리를 하는 과정이었어서.      


어푸 / 만약에 단체가 계속됐으면 어떤 활동을 하고 싶다, 이런 게 혹시 더 있을까요? 

     

도요 / 하고 싶었는데 못한 것… 그런데 사실, 전시를 위해 8년 치 회의록을 쭉 훑으면서 뭘 하고 싶었는지 정리를 한 다음에 실제로 했던 걸 지웠거든요. 근데 엄청 많이 지워지는 거예요. 그게 너무 뿌듯했어요.  

    

비누 / 소소하게 뭔가 발제하고 싶다 이런 것도 회의록에 남아 있었어요. 저는 1학년 때부터 여성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졸업 직전에 마침내 그 주제로 세미나를 했어요. 한 4년 동안 생각만 하다가 실현한 거죠.      


도요 / 못해서 아쉬웠던 거는 박물관 견학 같이 가기 이런 거? 아예 안 간 건 아니었는데 같이 가보자 했던 것들 중에 그래도 못 갔던 데가 좀 있어서. 그리고 이제 퀴퍼 부스 참가. 이건 사실 쟁쟁한 대학 단체들이 많아서 하기 힘든 면이 있긴 했죠. 같이 농활 가자고 이야기해본 것도 좋았는데 못 가서 조금 아쉬웠어요. 근데 그건 농활 갈 수 있었던 시기에 딱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어푸 / 그렇네요. 마지막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을 꼽자면 무엇이었을까요? 조금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도요 / 전 전시 기획한 게 너무 재밌었어요. 몇 년 치의 활동을 압축해서. 전시 회의를 매주 했는데 회의가 끝나면 저 혼자 한 시간 동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면서 이때 이런 것도 했었지 이런 감상에 젖고. 방 정리랑도 비슷한데 훨씬 재밌는. 그리고 옛날 회원들한테 연락하면서 그때 소회 좀 써줘 연락하고 그걸 받아보는 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비누 / 저도 전시 준비한 게 임팩트가 제일 크고 규모도 큰 일이다 보니 제일 기억에 남고. 그거 말고 기억나는 일이라면… 18년도 끝나고 12월에 종강파티 겸으로 그때 활동하던 친구들하고 마라탕이었나… 같이 식사를 하러 갔어요. 밥을 먹으면서 1년 동안 어땠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동아리에 들어오기로 한 게 너무 잘 된 일인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뭔가 벅찬 거예요. 대학에 들어와서 1년 동안 한 선택 중에 여기에 들어오기로 한 게 제일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니까 되게 벅차서 눈물이 났는데 옆에서 “너 울어?”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안 울고 넘어가긴 했는데 그 기억이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     

어푸 / 두 분 다 동아리에 추억이 정말 많으신 것 같아서 듣는 것만으로도 좋네요. 혹시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말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요?      


비누 / 일단 인터뷰 해주셔서 감사하고.     


도요 / 저희 방명록에 무서워서 올까 말까 고민했는데 오길 잘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게 있었다는 건 무서워서 전시회에 못 온 사람도 있었을 거란 말이죠. 그게 좀 속상하죠. 그래서 더 감사해요. 이렇게 뭔가 남기고, 저희에게도 말하는 자리가 해소하는 기회가 되니까.       


   

앞으로의 비행을 그리며     


  끝이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하나의 끝이 수많은 시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행일지〉 전시를 알리는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페스포트는 이제 착륙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은 내려서도 어디론가 가야 합니다. 지금껏 함께 만들어온 일지가 다음 누군가의 여행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5]라고 관람객을 초대했다. 페스포트뿐만 아니라, 백래시와 같은 내외적 부침으로 문을 닫은 많은 페미니즘 공동체의 구성원들 역시 그런 길을 걸었고, 현재 페미니즘 공동체 또는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 역시 다르고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음을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뒤늦게 깨달았다. 두 사람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오간 웃음과 농담들을 떠올려 본다. 학교에서의 삶에 있어 크나큰 일부였던 동아리를 접는 데에 많은 아쉬움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짐작과는 달리, 두 사람은 활동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음을 분명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모순적이게도 페스포트가 구성원들의 삶에 다양한 모든 방식으로 크나큰 일부였기 때문에, 페스포트를 통해 “해방의 언어”를 얻기도 하고 새로운 관심사를 넓혀나가며 삶의 지향을 다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전시회에서 페스포트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세부적인 이야기를 듣는 동안, 페스포트는 무엇보다 구성원들의 연결을 중요시하는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었다. 구성원들이 즐거운 공동체, 구성원을 위하는 공동체라는 목표를 꾸준히 좇았기에 “함께 있어서 좋은 공동체였다”라는 감상과 함께 동아리의 끝을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페스포트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동아리인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장소, 선뜻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불안한 학교에서 “여기서만큼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연결에는, 믿음과 친밀함과 안정감에는 힘이 있다. 학내에서 페미니즘 동아리로 활동하는 것의 어려움을 버텨내기 위해 함께 이야기하고 서로를 돌본 시간은 어려움 속에서도 또다시 무언가를 시도하고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었다. 백래시가 계속되고 불안정함을 감각하게 되는 요소가 매일같이 늘어나는 오늘날, 주변과 적극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현재의 불안정함 위에 토대를 빚고 미래의 어려움에 대비하기 위해 더욱이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이들이 버텨온 시간이 페미니즘 공동체를 지향하고 꾸려나가고 있는 단체들에게 작게나마 힘이 되었기를 바란다. 최선을 다한 기억을 간직한 채 새로운 비행, 혹은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1]

[2]

[3] 사회의 진보나 변화에 대한 반발 또는 반동을 의미하는 용어로, 한국에서 메갈리아 등의 사건으로 페미니즘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후 페미니즘에 대해 온오프라인 상에서의 공격이 가해지고 이러한 경향이 심해지는 것을 백래시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4] 이소윤, “총여학생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마이뉴스, 2018.12.03.,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92450.

[5] 페스포트 인스타그램, “연세대학교 페미니즘 동아리 페스포트의 닫는 전시 〈비행일지〉,” 2023.11.07., https://www.instagram.com/p/CzVtseovv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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