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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o Jan 02. 2022

하리포터와 마차푸차레 봉 -안나푸르나

864일간의 세계일주 - Himalaya

훈훈한 외모의 하리는 히말라야 마을 뭇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다녔다.


하루도 쉬지 않고 내리는 비 때문이지 트레킹을 하는 동안 다른 여행자들을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신 히말라야의 산등성을 넘나들며 마을을 지날 때면, 그곳에 살거나 롯지를 운영하는 구릉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을에서 10대 여자 아이들 예닐곱 명을 한꺼번에 보는 예사롭지 않은 날도 있었다. 이 날도 하리는 나보다 앞서서 먼저 걸어갔고 내가 뒤 따라가고 있었다. 이미 하리가 지나간 자리에서 재잘거리던 여자아이들은 나를 보자 우르르 몰려와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질문 하나를 내뱉었다.

내가 네팔어를 못 알아듣자 그중 한 명이 영어로 다시 물었다.


‘너네 오빠 이름이 뭐야?’


차림새가 말쑥한 하리와,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이목구비가 네팔인과 흡사한 나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줄곧 네팔인 남매로 오해를 받아왔다. 오빠가 아니라 포터라고 대답을 하니, 여자애들은 더 관심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니 포터 이름이 뭐냐고?’


이름을 알려주니, 여자 아이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수줍은 미소를 주고받았고, 하리의 이름이 한 명 한 명의 입에서 여러 번 불려졌다.


사실 몇 번 마주쳤던 다른 포터들은 나이가 조금 있거나, 햇빛에 심하게 그을려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구릉족 출신들인데 반해, 하리는 젊은 도시 청년의 이미지가 강했다. 비록 내게는 뒤통수만 보이거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멋쩍은 웃음 짓는 것이 전부였지만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꽤나 말솜씨가 좋아 보였다. 하리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하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하리는 이곳 히말라야에서 나와 있을 때 빼고는 늘 주인공이었다. 

롯지에서 묵을 때마다 주인장이 부엌에서 장작에 불을 때거나 저녁 준비를 할 때면 하리는 그 옆에 앉아 거들면서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깃거리들을 풀어놓았다. 그동안 나는 주로 혼자 어두운 불빛에 기대어 책을 읽었지만, 내 귀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쪽으로 자꾸 기울어졌다.



산의 고도가 높아질수록 롯지의 환경은 점점 열악해졌다. 매번 사 먹어야 하는 물 값과 식비도 비싸졌다.  볶음밥, 복음면, 파스타나 렌틸 콩밥 등 다양했던 식사메뉴도 그 종류가 점점 줄어들었다. 더 이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방은 차가웠고, 두꺼운 이불과 내 침낭에 의존하여 온기를 채워야 했다.

침낭 안과 차가운 아침 공기의 온도차는 점점 더 커져갔다. 그럴수록 침낭의 지퍼를 머리 끝까지 올리고 애벌레처럼 점점 더 움츠리며 잤다. 아침이 되면 그 번데기 속에서 벗어나 나비가 되는 과정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리는 늘 먼저 일어나 나를 깨웠다. 조금 더 자려다가도 하리가 내 방문을 여닫으며 왔다 갔다 하는 소리에 저절로 정신이 들었다. 내가 움직인다 싶으면 하리는 겉의 이불을 걷어 젖힌 후, 내 침낭을 여는 시늉을 했다. 침낭에서 내 머리가 나오는 게 보이면 뜨거운 짜이(우유가 섞인 차)와 비스킷을 가져와 내 머리맡에 놓았다. 그러면 나는 재빠르게 침낭에서 짜이로 온기를 갈아탔고, 하리는 쭈글쭈글해진 내 침낭을 차곡차곡 접어 배낭에 부착시켰다. 차를 다 마실 때쯤이면, 숙박비와 식사비가 적힌 계산서를 가져와 내 앞에 놓았고, 계산을 마치고 나면 내 발 옆에 떠날 준비를 마친 배낭이 놓여 있었다.

하리와 함께 있으면 내가 너무 게을러서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하리는 말 한마디 없이도 나를 반성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여섯째 날, 예정보다 빨리 해발 4130미터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달할 계획이었다. 중간에 야생 산딸기를 따 먹은 것 외엔 딴청도 부리지 않았다. 몇 개의 산등성을 넘고 점점 해발고도가 높아지자 바람에 비가 요란을 떨기 시작했다. 며칠째 말리지 못한 젖은 옷을 그대로 입었더니 체온이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걸었다. 안개였는지 구름이었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멀리 앞서가던 하리는 곧 멈추자는 손짓을 했고, 나는 더 가겠다는 손짓을 보냈고, 그 사이를 비바람이 계속 가로막았다. 하리의 말을 듣기로 했다.


해발 3700미터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에 짐을 풀었다. 바깥만큼이나 공기가 차가운 지 안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다. 별도의 금액을 지불하고 부탄가스로 작동하는 히터를 켤 수 있었다. 히터를 테이블 밑에 놓고 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테이블 보를 길게 내려 뜨리니 발 밑으로 따뜻함이 올라왔다. 주인과 나, 하리, 그리고 히터를 켜자마다 귀신같이  등장한 마을의 구릉족 청년 두 명까지 다 같이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나는 책을 폈고, 하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가끔 수긍하는 소리를 낼 뿐 하리의 말에 집중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히말라야 밖의 세상, 아니면 카트만두에 관한 이야기일까.

히말라야 밖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겠지.

한쪽 팔에 머리를 기대고 계속 책을 읽었다.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고, 잔잔한 하리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며 포근했다.

 

...

새벽에 고산병 증세가 찾아왔다. 양손 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꽉 누르고, 숨을 천천히 고르게 쉬는 노력을 하다가 다시 잠에 들었다.

...


오전이 끝나갈 때까지 비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감자를 먹고 있는데, 영국인 남성 여행객 두 명과 가이드 한 명, 포터 한 명이 롯지 안으로 떠밀리듯 들어왔다. 비바람이 심해 더는 못 갈 것 같다며, 전 날의 나처럼 비용을 지불하고 히터를 켰다. 그러자 같은 구릉족 청년 두 명이 다시 나타나 온기를 나눴다. 반면에, 나는 하리와 롯지를 나섰다. 비도 바람도 이젠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엔 계속 오르막 길이었다. 비가 멈추길 바라며, 구름이 걷혀 앞이 좀 더 잘 보이길 바라며 천천히 걸었다. 고산병 증세 때문에 앞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천천히. 바람을 가로지르며 나아간 지 한 시간 반이 지나자 구름 사이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가 어느새 코 앞에 닿을 듯 나타났다. 자그마하게 사람들도 보였다.

'? 우리를 바라보고 있네.'

'설마, 우리를?' 

하며 뒤를 돌아봤는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와, 이럴 순 없어’


나도 모르게 이런 긴 감탄사가 입 밖으로 나왔다.

내 뒤로 어느새 구름이 옅어졌고, 파란 본연의 색으로 돌아온 하늘 아래, 네팔인들이 신성시해 등반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마차푸차레 봉 (해발 6997미터)이 새 하얀 봉우리를 앞세워 구름 사이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진에 담아지지도 않았다. 머릿속에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광경을 그림으로, 아니 글로라도 표현할 수 있다면. 왜 하필 나는 시인이 아닐까. 그 기분을 표현할 어떠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천국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최종 목적지였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힘겹게 도착한 그곳에서도 나는 딱 하룻밤만 자기로 했다. 열흘 간의 트레킹을 할 예정이었지만, 첫날 하리가 (나이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주 어린 남동생과 단 둘이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최대한 일정을 줄여 하리가 하루라도 빨리 카트만두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나 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일곱째 밤을 보내게 되었으니,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른 새벽, 롯지의 주인이 여행객들을 모두 깨웠다. 새벽 설산이 장관이라며 새벽 4시에 깨워 주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몸을 대충 싸매고 나가, 다시 한번 마차푸차레 봉을 바라보았다.

머리는 지끈지끈 아프고, 눈 알은 밖으로 튕겨 나갈 것 같은데 황홀한 이 기분은 도대체 뭘까.





9일간의 트레킹을 무사히 마친 후, 비를 맞으며 포카라 마을에 다시 들어서는 길이었다. 비도 피할 겸 하리와 함께 마지막으로  점심을 먹고  바로 버스터미널로 향할 계획이었다.


하리가 내게 네팔어로 뭐라 뭐라 말을 했다. 빗 물이 앞을 가려 하리의 모습조차 희미하게 보일 지경이라, 아마도 동생에게 하루 일찍 간다는 전화를 하러 가나 싶어 다녀오라는 손짓을 했다. 대답 대신 내 손을 살짝 움켜줬다 놓으며 알았다는 표시를 한 뒤, 하리는 빗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악수였고, 작별 인사였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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