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한 수많은 여행객들이 그들의 짐가방을 들고 내렸다. 출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들에 섞여 한 무리 인양 따라가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는 개찰구에서 도착해서였다.
어디에도 이미그레이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유로 시민이니 무비자로 왔다 갔다 한다 쳐도 나는 철저한 외국인이 아닌가. 내 상식상 그래도 나갈 때 한번 들어갈 때 한번 입국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미그레이션이 보이질 않는다니.
그렇다고 기차역에서 시간을 허비하기는 싫어일단 또 남들 하는 데로 했다. 개찰구에는 이미 긴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다들 개찰구에 자신의 기차 티켓 바코드를 찍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바코드가 말썽인지 낑낑대며 겨우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시간이 이미 8시, 9시경이라 나와있는 역무원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전부가 여행객들이라 그랬는지,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가 주는 특유의 즐거움 때문이었는지 단 한 명도 화를 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전부 "야 이거 왜 이래?" 하며 킬킬대면서 바코드를 찍고또 찍다가 한 번은 성공해 밖으로 나갈 뿐. 혹은 먼저 나간 일행이 "아이고아이고 쟤봐라, 야 우린 먼저 간다~"하며 익살스러운 장난을 치기도 했다.
나도 일단 내 모바일 티켓에 있는 이 조그만 바코드를 찍고 개찰구 밖으로 나가보려 낑낑댔다. 이전에 히드로 공항에서 익스프레스 트레인을 탈 때도 모바일로 받은 E-Ticket 바코드를 확대해 찍고 통과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비자를 안 받은걸 얘들이 알아서인가? 온갖 생각이 스쳐갔다. 옆에서 나를 도와주던 영국 여행객들도 결국 자기들 문이 열리자 "야 미안하다 우린 간다~"하고 가버렸다.
하지만 마침 옆의 역무원 호출 버튼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무슨 일이시죠?"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내가 방금 영국에서 온 기차에서 내렸는데 내 바코드를 못 읽어서 게이트가 안 열려!" 했다. 그럼 나와서 뭐라도 해줄 줄 알았다. 그랬더니 다시 들려오는 수화기 반대편의 말. "아 그렇군요, 지금 열어드릴게요. 굿바이~" 엥?
그렇게 나는 암스테르담 역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엥? 그럼 대체 내 비자는? 나 이렇게 불법체류자 되는 건가? 순간 베를린 벌금사건부터 런던에서 짐 영수증 버리고 벌금 낼뻔한 사건까지 떠오르며 이 '액운'붙은 여행에 또 '액운'이 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는 아직 기차에서 짐과 여권을 잃어버리는 초유의 사태를 겪기 전이어서 간이 덜 쪼그라든 상태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이고 모르겠다 될 데로 돼라. 이따가 난민캠프(그래도 불체자 신분이 되면 여기로 도망가려고) 위치나 찾아놔야겠네'하고 일단 예약해둔 호스텔로 갔다.
호스텔에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데스크의 두 네덜란드인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걔들도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나 불법체류자로 지정돼서 이따 경찰에 잡혀가는 거 아니냐"라고 물었더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자기들끼리 오히려 웃었다. 나는 그 와중에 "그래 여기 CCTV 있네. 나 역에서 나와서 곧바로 여기로 온 거다. 수상한 사람 아니라고 정말."이라며 CCTV를 향해 V까지 날리며 스스로 증거를 남겼다.호스텔의 두 직원은 내가 완전 탐정 같다며 아주 빵! 터졌다.
그 길로 나는 호스텔의 와이파이를 이용해 해리포터 스튜디오에서 만났던 유로시민 카티아에게 나의 이 요상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원래 기차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그레이션 없이 바로 입국이 가능한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카티아는 간단하게 "응 원래 그래. 타기 전에만 한번 하는 거, 그게 다야."라고 했다. 그래서 여권을 다시 살펴보니
기차를 타면 기차 스탬프를, 비행기를 타면 비행기 스탬프를 찍어준다. 배를 타면 배를 찍어준다고. 버스는 버스를.
이렇게 되어있다. 영국에서 나가며 기차의 첫 도착지였던 프랑스로 입국한 것으로 도장이 찍힌 것. 어쨌든 프랑스 이미그레이션을 영국에서 통과한 것이니 그 후 내가 유로 트레인을 타고 유럽 대륙 내에서 어딜 쏘다니건 자신들은 신경 안 쓴다는 무언의 승인. 쇵겐조약. 와우. 이러니까 불법체류자들이 많지. 서류상 나는 프랑스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있는데 내가 벨기에에서 잠수 타면 어떻게 잡으려고...
내게 도장을 찍어줬던 이민국 관리자가 내 여권을 보곤 "Korean?" 하고 묻더니 "앙녕하쎄요"했었는데 그가 프랑스인이었나 보다. 참고로 유럽에서 "앙녕하쎄요"는 두 번 들어봤다. 한 번은 저 프랑스 이민국 관리자에게 다른 한 번은 독일 가는 기차에서 네덜란드인 표 검수원에게. 이런 작은 서비스가 우리 얼굴에 웃음을 띄게 한다는 걸 그들도 아는 모양이다.
어쨌든 순식간에 밀입국자라도 된 줄 알았던 나의 근심은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되었다.
아, 그리고 진짜 내가 찍었어야 했던 바코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내가 소유한 유레일 패스의 바코드였다. 이건 나중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알게 됐다. 여러모로 고마운 게 많았던 곳이 위트레흐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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