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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Oct 28. 2019

뭐 어때, 같은 유색인종끼리. 다 까놓고 얘기하자.

아이리쉬 조쉬


유럽 여행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지만 이 남자, 아이리쉬 조쉬와 나눈 대화가 가장 특별하고 가장 격 없이 까놓고 나눈 대화였다.


그와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숙소에 마련된 야외 정원 공간에서 나는 헤어질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대충 이런 모습이었는데 밤이라서 어두웠다. 재떨이는 유럽이라면 언제나 익숙한 풍경.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재떨이를 치우는 수고를 하기는 싫어서 그냥 뒀다. 은은한 조명 아래 편지를 쓰는데 어디서 방귀소리가 바바방! 하고 내 귀를 어지럽혔다. 예의상 모른 척을 해야 맞는데 소리가 너무 커서 그랬는지 의도치 않게 내 고개는 소리의 근원지로 이미 돌아가버린 뒤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우렁찬 방귀 소리의 주인은 예상한 결과라는 듯 "웁스~"하고 하던 전화 통화에 다시 몰두했다. 나는 그의 당당함에 엄지를 치켜세우는 것으로 화답했다.


방귀는 그렇고 나는 다시 진지하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어느 틈에 통화를 마친 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뭐해?" 나는 대답했다.


"편지를 쓰고 있어."


"편지?"


그는 좀 놀란투였다.


"요즘 시대에도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어?"


90년대생인 나는 아직도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친구들이 군대에 갔을 때도 나는 종종 편지를 써서 부치곤 했다. 이게 뭐가 신기하다고. 나는 오히려 그의 반응에 더 놀랐다.


"응, 나는 종종 쓰는데?"


"신기하군. 너 편지 다 쓰면 나도 같이 가서 앉아도 되니?"


어차피 편지도 다 써가던 참이었고 그 후의 계획은 없었어서 나는 흔쾌히 "오케이"했다. 방귀 뀌고 성내지 않던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 것도 있었고. 편지를 마무리한 뒤 나는 그에게 이쪽 테이블로 넘어오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조쉬. 아프리카의 독재자로 유명한 무가베의 나라 짐바브웨 태생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지금은 아일랜드에서 대학교를 마치고 데이터 분석가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아이리쉬 조쉬라고 부르겠다. 라임도 그게 더 잘 맞는 것 같고. 다행인 건 그의 영어가 미국식이라서 내가 알아듣기 좋았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식 발음이었다면 솔직히 나도 좀 힘들었을 것 같다.


또 나를 미국인이라고 오해했던 그의 오해를 풀어주고 밤공기도 좋으니 좀 걸으러 가자고 했다. 우리가 '흑형(물론 한국에 있는 흑인들은 이 단어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이번 한 번만 쓰고 다시는 이 글에서 이 단어를 언급하지 않겠다.)'이라 부르며 약간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존재인 흑인은 유럽에서도 비슷한 존재로 여겨진다. 나는 조쉬가 오늘 밤 내 친구인 김에 프랑크푸르트 홍등가를 구경 가자고 제안했다. 조쉬랑 있을 때 아니면 그 소돔과 고모라에 내가 어떻게 가보겠나. 이때는 암스테르담 방문 전이라 더 궁금했다. 조쉬는 "난 그런덴 취미 없는데"라고 했지만 "그냥 구경인데 뭐 어때"라는 나의 말에 일단 함께 나섰다.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역 근처의 홍등가


그렇게 시작된 프랑크푸르트 홍등가 구경. 애초에 여자와 함께 다니는 조시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여성은 없었다. 다만 조시는 같은 흑인들에게 자꾸 둘러싸였다. 그게 불편했던지 조시는 그냥 빨리 여기를 벗어나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히 먹을거리와 마실 것을 사고 다시 숙소의 넓은 공간으로 돌아왔다. 조쉬는 이김에 술도 샀다. 나에게도 마시겠냐 했지만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는 괜찮다고 했다.



"흑인들의 브라더십(Brothership)도 어떨 땐 참 불편하다니까"


돌아오자마자 조쉬가 한 말이었다. 나는 빵! 터졌다. 그게 무슨 의미냐고 다시 묻자 조쉬는 "아프리카만 벗어나면 같은 흑인이면 무조건 아는척하려고 하고 친한척하려고 해."라고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쉬가 아프리카 출신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자랐고 지금은 아일랜드에서 대학까지 나온 흑인이기 때문에 그걸 알게 된 순간 그들은 조쉬를 따돌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조쉬는 같은 일이 고향인 짐바브웨에서도 발생한다고 했다. 분명 자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짐바브웨인'이라고 인식하지만 같은 짐바브웨 사람들은 자기를 외국인이나 특권층이라 인식하고 선을 긋는다면서. 이것도 어쩌면 지나친 '우리'문화가 만들어내는 폐단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한 건 그냥 너랑 밤거리 구경하는 거였는데. 쟤들이 망쳤어. 그리고 쟤들은 콩고에서 온 애들이었어. 내 고향 짐바브웨랑 아무 상관없음."


나는 조쉬의 두꺼운 입술이 더 삐죽 나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무가베에 대해 물어봐도 돼?"


나는 짐바브웨 얘기가 나온 김에 조쉬에게 무가베에 대해 물어보았다. 사실 짐바브웨에 대해 아는 거라곤 무가베밖에 없었던 것도 있거니와, 조쉬는 내 인생에서 내가 처음 만난 짐바브웨인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캐나다에 있을 때(2011년), 브라질 친구에게 EBS 다큐에서 봤던 룰라 대통령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봤던 다큐는 룰라 대통령에 대해 칭찬일색이었기에 나는 당연히 그 친구가 룰라 대통령을 칭찬할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분노가 가득한 룰라 대통령에 대한 욕설이었다. 그리고 결국 룰라 대통령이 후임자로 세웠던 호세프 전 대통령은 탄핵을 당했고 룰라 대통령은 부정부패 혐의로 9년형을 선고받은 끝에 올해 대법원에서 일부 유죄 확정 판결을 받고 또 다른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래서 혹시나, 조쉬도 독재자로 알려진 무가베에 대해 또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이어진 조쉬의 대답은 조심스러웠지만 솔직했다.


"흠... 무가베... 사실 많은 사람들이 무가베를 욕하지. 그렇지만 나는 말이야. 그 사람이 짐바브웨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거. 그 점은 높게사. 그래서 나는 그를 욕할 수는 없어. 우리 종족(Race)을 지켰어."


무가베가 짐바브웨에서 백인정권을 몰아내고 짐바브웨 독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후 30년간의 독재로 수많은 인명을 고통에 신음케 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조쉬에게 제법 따져 물었다.


"그래, 그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점은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 후 그의 독재나, 무가베 때문에 재산을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 국제적으로도 그는 지탄받고 있잖아."


"흠... 그것도 사실 서구 언론에 의해서 좀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아 있다는 점은 알아줘. 내가 짐바브웨 사람이잖아? 백인들은 지들 멋대로 쓴다구. 신문이건 역사건."


그의 입에서 '백인'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인종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서구사회에서 거의 금기시되는 일이다. 그러나 조쉬는 조금 술이 올랐고 무엇보다 그의 앞에 앉은 이는 같은 유색인종인 동양인인 나였다. 나는 그의 솔직함이 좋았다. 내친김에 인종에 대해서 더 얘기해보기로 했다.



"미국 사회 1등 계급은 백인 남성, 2등은 백인 여성과 동양인 여성, 흑인 남성은 3등쯤 될까? 흑인 여성은 최하위야"


"내가 백인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해서 불편했다면 사과할게"


조쉬가 사과했다. 나는 "아냐, 우리 둘 다 Colored인데 뭐 어때"라고 받아쳤다. Colored는 유색인종을 뜻하는 다분히 인종차별적 표현이다. 나는 조쉬의 긴장도 풀어줄 겸 장난스러운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고 내 장난은 정확히 먹혀들어갔다. 조쉬는 킬킬 웃으며 "Fuxk, 넌 내가 본 아시안 중에 제일 쿨해"라고 말했다.


"솔직히 백인으로 태어난다는 건 특권이지."


나는 조쉬에게 나의 솔직한 의견을 말했다. 조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미국에서도 보면 1등 계급(Class)은 백인 남자, 2등 계급은 백인 여자지. 여기에 아시아 여자도 포함돼. 너네는 똑똑하고 위협적이지 않으니까. 흑인 남자는 3등 계급 정도? 나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확실한 건 흑인 여자는 최하위 계급이야. 그래서 난 우리의 자매들(Sisters)에게 미안해."


"동양인 여자가 2등 계급이나 된다고? 글쎄 그건 아시안 패티쉬 때문이 아닐까? 그런 건 노땡큐인데..."


"아니 아시안 패티쉬를 얘기하려던 건 아니야. 어떻게 보면 너희들이 백인이랑 피부색도 제일 비슷하잖아. 필리핀 인도 쪽 말고 중국, 대만, 한국, 일본 쪽"


"하하하. 하지만 눈은 작지. 내 눈을 봐. 넌 얼마나 많은 한국 여자들이 큰 눈을 위해서 쌍꺼풀 수술을 하는지 모를 거야."


조쉬는 나의 눈 개그에 또 킬킬 웃었다. 그리고 내게 쌍꺼풀 수술이 뭐냐고 물었다. 실제로 쌍꺼풀이 흔한 인종들은 우리의 쌍꺼풀 수술 개념을 잘 몰라서 설명해줘야 하는 경우가 제법 잦다. 나는 쌍꺼풀 수술을 하지 않은 홑꺼풀의 소유자기 때문에 그에게 열심히 홑꺼풀을 쌍꺼풀로 수술하는 수술에 대해 설명해줬다.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나고 성년이 되기 전에 주로 이 수술을 많이 한다고 하자 조쉬는 신기해하면서도 "That's crazy"라며 안타까워했다.



백인은 태닝을 하고 흑인은 블리칭을 한다


기왕 뷰티 얘기도 나왔고 피부색 얘기도 나온 김에 나는 태닝 얘기를 했다.


"피부색도 말이야, 참 우스운 게 백인 여자들은 태닝을 하잖아. 그리고 Sun-kissed skin이라고 고급스럽게 불러. 한국인 여자 교포들도 태닝을 하는 경우가 많아."


조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또 웃긴 게 뭔 줄 알아? 백인 여자들은 태닝을 하지만, 흑인 여자들은 블리칭을 해."


블리칭 Bleaching. 사실 좀 끔찍한 단어기도하다. 화장실을 소독할 때도 Bleaching이라고 하는데 검은 피부나 갈색 피부를 하얗게 바꾸는 것을 블리칭이라 부른다. 한국에서는 화이트닝 Whitening이라고 부르던데 영어권에선 다분히 인종차별적 요소가 들어간 단어라서 그런지 블리칭이라 부른다. 그래도 내겐 여전히 좀 끔찍한 느낌의 단어로 들린다. 최근에 만난 미국 출신의 백인 친구에게도 흑인 여성들의 블리칭에 대해 언급했더니 블리칭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으~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쉬는 말을 이었다.


"우습지. 백인 여자들은 검어지려고 하고 흑인 여자들은 하얘지려고 하고. 차라리 이럴 땐 내가 남자라서 다행이야. 난 흑인인 것도 좋아. 이것도 특권이야. 아무도 나한테 함부로 못하거든. 하하하"




조쉬는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약간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넘버투야"라고 말했다. 넘버투는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큰 거'쯤 되겠다. 그가 좀 급해 보여서 나는 그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기다리지는 않기로 했다. 밤도 깊었고 나도 출출해져서 지금 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제법 급하게 헤어졌다.


나는 그를 먼저 보내고 다른 짐들을 정리하고 내 방에 올라가 쿨쿨 잤다. 그 후로도 어쩌면 밤에 야외 정원 공간에 조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 사흘은 레이싱 쇼를 보기 위해 같은 숙소에 머무른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동안에 숙소로의 귀환이 늦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친구들 때문에. 조쉬가 프랑크푸르트의 낮과 밤을 잘 즐기고 아일랜드로 행복하게 돌아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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