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드로 공항도 아니고 저 먼 런던 변두리 공항에서 내려 부족하다 아우 성대는 휴대폰 배터리를 달래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호스텔. 겨우 배터리를 충전하며 카카오톡을 열어보니, 원래 만나기로 했던 나의 한국 절친 미스권 언니야의 카톡이 잔뜩 와있었다. "어디야!?" "괜찮니?" "무슨일이야!!" 등등.
본래 만나기로 한 시간은 한참 지난 시간이었으나 한국에서도 서울 북쪽의 밤을 주름잡던 미스권은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자며 멋지게 "콜!"을 외쳤다.
내가 당장이라도 잠에 들것 같은 모습이어서 그랬는지 내게 "음, 우리는 밤 10시가 지나면 불을 거. 곧 불 끌 거야."라고 말하는 같은 방 캘리포니아 출신 호스트 메이트에게 "아냐 나 지금 나가"라고 대답한 뒤 나는 그대로 런던의 밤거리로 나섰다. 그녀는 나가는 내 등 뒤에 "Awesome"이라고 대답했다. 하하하.
비가 추적추적 오는 런던의 밤거리에서 미스권을 기다리는 나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한국에서 런던을 여행 중인 여행자였다. 우연히 서로의 여행 일정이 맞아떨어져 이 먼 타국 땅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먼 땅에서 만나게 되다니. 이런 호사가 또 있으랴.
드디어 만난 우리는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근처 Moor&hitch라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매우 진지하게 메뉴를 골랐으나 이런! 치킨은 재료가 소진되었단다. 그래서 "그럼 추천해줘!"라고 하자 '스모크 터키 햄버거'를 추천해줬다. "오케이! 그걸로 주세요" 그러자 직원이 또 "셰셰"한다. 지난번 피쉬앤칩스 레스토랑 이후 두 번째 중국인 대접. 물론, 딴에는 친밀감의 표현이지만 그냥 묵과하기가 싫었다. 그리고 그때는 '굳이 신경 쓰지 말자'는 학교 선배와 함께 있었지만 이번에는 미스권과 함께 있다. 나는 종업원에게 "아냐 아냐 우린 코리안이라구. 중국인 아니야! 셰셰라고 하지 말아 줘"라고 해버렸다. 종업원은 미안하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언니와 한참 언니의 여행 이야기, 나의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너희는 어디서 왔냐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화장품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도 한국산 마스크팩을 쓴다면서. 고향이 어디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랍 쪽이었다. 그는 혼자가 외로웠는지, 아니면 아시안 여성 둘을 만나서 작업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는지 계속 말을 걸려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미스권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미안한데, 나랑 미스권은 꽤 오래간만에 만나서 우리 둘이 할 이야기가 많아. 실례가 안된다면 우리 둘이 이야기할 수 있게 네가 좀 양보해주겠니?"라고 했다. 그는 약간 삐진 것 같았지만 그대로 물러났다.
그렇게 나와 미스권은 행복하게 대화하며 웃고 떠들었다. 음식 역시 맛났다. 특히 스모크 터키는 기대를 거의 안 했는데 비주얼적으로도 특이하게 나왔다. 사진상으로는 햄버거만 바로 나와있는데 유리병에 담겨서 나왔다 처음에는. 유리병에 연기가 가득 담겨있는데 유리병을 열면 연기가 싸악 빠져나가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그래서 스모크 터키 햄버거였나 보다.
냠냠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나는 종업원들에게 장난을 좀 쳤다. 이들에게 한국어를 알려주기로 작정을 해본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잘 있어!"라고 한국어로 인사했다. 그러자 그들은 "???"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다시 영어로 "한국어로 굿바이라는 말이야"라고 했고 그들은 "잘...???" 하며 따라 해보려 했다. 그래서 다시 나는 "잘 가! 잘 가!" 하며 몇 번 더 말했다. 저쪽에서 우리에게 할 말은 잘 가였으니까. 그러자 그들은 곧잘 "잘 가!" "잘 가!" 하며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물론 완전한 '잘 가' 라기보단 '좔 가'에 가까웠지만.
미스권도 만나고, 남의 나라 백성들과 유쾌하게 한국어도 주고받고 아름다운 런던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