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요크(York)를 다녀왔다고 하면 "거기가 어디야?"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우리가 요크를 모르는 만큼 요크에서도 동양인은 낯선 인종이다. 물론 다행히 한국은 안다. (아, 우리가 좋아하는 미국의 도시 뉴욕의 요크가 여기서 왔다)
실제로 다문화 도시인 런던을 떠나 북쪽 도시 요크로 향하는 동안 동양인을 처음 보는 듯한 백인 어린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많이 받았다. 어서 와, 동양인은 처음 보니? 딱히 인종차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의 10살 먹은 사촌동생도 서울에 와서 서양인들을 보곤 아주 큰 목소리로 "누나! 서울엔 왜 이렇게 미국인들이 많아!" 했기 때문에. 그저 아이들의 호기심일 뿐.
요크에서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잠시 바깥바람을 쐬러 나갔던 어느 밤에도 술에 거하게 취한 투숙객 영국 남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뇽~ 날씨가 참 조타. 넌 어디서 왔뉘?"
영국 내에서도 개그소재로 종종 쓰인다는 요크쇼어 방언에 혀까지 꼬인 커플의 말은 참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나는 귀를 쫑끗 세우고 꾸역꾸역 대답했다.
"그래 날씨가 좋다. 나는 한국에서 왔어."
"오~ 한~국! 우린 요크쇼어 지방 사람들인데 오늘 파티!가 있어서 방까지 잡고 놀러왔지롱! 킬킬킬! 즈엉말 끝내주는 파티! 였어"
그러면서 둘은 또 킬킬댔다. 여자가 잠시 물을 사러 안으로 들어간 사이 남자가 피우던 담배를 내려놓고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눈은 풀려있으면서.
"근뒈, a Korean girl like you, 요크엔 왜 왔어?"
아무래도 처음부터 내게 말을 건 이유가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래. 내가 요크에 왜 왔냐구? 그거 중요한 질문이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촉발된 한국전쟁에 UN군은 즉각 파병을 결정했고 개전 사흘 뒤인 29일 영국군은 5만 6000명의 영국 군대 파병을 결정했다.
본 이미지 저작권은 사진작가 라미현(현효제)에게 귀속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분들이 내가 방문한 영국 북쪽 도시 요크시가 속한 요크쇼어에서 파병된 당시 나이 17세 18세의 노병들이다.
이분들은 매년 하루 요크의 메모리얼 파크에 모여 한국전쟁에 함께했던 전우들을 기념하고 한국을 기념한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대다수라 건강상의 이유로 매년 기념식에 참여하는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영국 역시 1950년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고 영국군 소속이 아닌 UN군 소속으로 파병 되었다는 이유로 참혹한 전쟁을 겪고 돌아온 뒤 이분들에게 돌아온 것은 "수고했다" 한마디 정도였다고 한다.
이번 기념식 역시 당시 참전했던 군인들의 자발적 모임과 지역 사회 한인 교회 등의 도움으로 명맥이나마 조금씩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영국 지역사회 정치인이나 소위 거물급 인사들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성공회신부님이 오셔서 영령들을 추모하고 영국의 전통대로 'God Save the Queen'을 부를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분들이 구하고 살린 수많은 생명들. 그리고 이 조촐한 모임. 1993년경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도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참전유공자 등록도 채 하지 못하고 가셨지만 그래서 내겐 늘 한국전쟁이 남다르다. 그리고 또 혹시 모를 일 아닌가. 이분들 중에 나의 할아버지와 잠깐이라도 스쳐 지나간 분들이 있었을지도.
저는 기념식 동영상 촬영 및 라미현 사진작가의 사진 작업 보조 업무가 메인 업무였으므로 틈틈히 사진을 찍느라 사진이 흔들린 점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히히히.
기념식 후에는 일대의 펍에서 라미현 작가가 촬영한 참전용사 사진 액자 전달식이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사진 액자를 받아 드는 노병들과 그의 가족들의 밝게 웃는 모습은 그 어디서도 보기 힘든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나는 정말 행복해요. 나의 가장 젊은 날을 한국에 바친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리고 한국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정말 기뻐요. 고마워요"
액자를 전달해주고 계시는 김 선생님은 가족 전체가 액자를 후원해주셨다. 정말 대단한 가정이다.
장비 세팅 중인 라미현 작가님
액자 전달식을 마치고 나는 또 펍 한쪽에 마련된 당구장으로 뛰어갔다. 아직 개인 사진을 찍지 못한 분들의 촬영 장비 세팅을 돕기 위해.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글 쓰는 게 좋다. 사진이건 영상이건 촬영은 거의 준 노가다에 수렴한다. 조명도 가져다 놓아야 하고 카메라 높낮이도 맞춰야 하며 이 때문에 삼각대는 또 얼마나 조이고 풀어야 하는지. 이게 또 보통 무거운 것도 아닌데. 게다가 전자 장비다 보니 케이블 선 관리도 소중히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모든 촬영팀과 PD로 활약하고 계시는 여성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장비 세팅 후에 이어진 개인 촬영. 장비 세팅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조금 힘들어하시기도 했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자 정말 기분 좋아하셨다. 우리만큼 사진에 익숙한 세대가 아닌지라 이런 촬영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고 고맙다고 하실 땐 가슴이 뭉클했다.
약혼자를 혹은 남자 친구를 당시로썬 이름도 생소한 나라 한국에 보내 놓고 무사히 돌아와 달라고 가슴만 졸였다는 사모님들의 사연을 들을 때면 내 마음이 다 아려왔다.
특히 이 두 분의 사랑이야기는 결국 내 눈에 눈물이 맺히게 했다.
낸시와 빅터
낸시와 빅터는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이제 갓 스물이던낸시는 스물둘쯤 이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헌병이던 빅터가 1950년 한국으로 파병을 가며 둘은 찢어졌다. 빅터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바빴고 이동이 잦던 그에게 낸시가 보낸 편지는 도착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잃었다.
파병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빅터가 낸시를 찾았을 때, 낸시는 이미 호주로 떠난 뒤였다.
그 뒤 40년이 흘렀다. 둘은 우연한 기회로 수화기 맞은편에 섰다. 낸시는 다른 사람인 척 빅터에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빅터, 혹시 낸시 달링을 기억해요?" 빅터는 대답했다 "그럼요. 내 가슴을 찢어놓은 사랑이었죠."
재회한 이래 두 사람은 서로의 곁을 떠난 적 없다. 전쟁이란 얄궂은 사건 탓에 40년을 돌아 만난 두 연인. 나는 결국 눈물 흘렸다.
본 이미지 저작권은 사진작가 라미현(현효제)에게 귀속됩니다.
그리고 탄생한 두 번째 특별한 단체사진. 평생을 함께하는 당신의 사랑들과.
나는 중간중간 통역도 담당해야 했는데 여기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몇 개 있었다.
1. 섀프론 Chaperone 사건
거동이 편치 않은 참전용사 어른들이 계시다 보니 촬영을 위해 내가 직접 부축을 해 드려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서로를 알아보신 어르신 두 분이 인사를 나누다가 한분이 나를 가리키며 "Is this young lady your chaperone?" 하시는 게 아닌가. 꽤 오래된 영어단어인 섀프론Chaperone은 옛날 영국 귀족 아가씨들이
사교모임에 나갈 때 같이 따라가던 감시자 혹은 보호자 정도 되던 계층을 일컫는 단어다. 현대 요크쇼어 영어로는 환자의 보호자, 수행원의 개념으로 쓰인다고.
나는 그렇게 순식간에 영국 땅의 환자 보호자가 되었다. 불법취업.(사실 섀프론이 직업은 아니다.)
2. Posh 사건
기념식 전에 참석하러 오시는 분들을 맞고 있을 때였다. 나는 당시 영국에 체류한 지 약 삼일차 정도 됐는데 이상하게 빨리 소위 말하는 포쉬, RP발음이 살짝 입에 붙어버렸다. 나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한 사모님께서 갑자기 "근데 너 어디서 왔어? 포쉬 쓰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 후로 나는 밑천이 다 드러날까 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당시 BBC KOREA팀도 라미현 작가의 프로젝트를 취재하러 왔었는데 그쪽팀도 나를 로컬 영국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또 밑천 다 드러날까 봐 더 이상 영어를 쓸 수 없었다. 한국말합시다!
요크에 계신 참전용사 한분은 당신의 참전 수기를 담은 작은 책까지 직접 쓰셨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한 사모님의 말씀. 이 분은 부부 동반으로 한국 정부의 초청을 통해 한국을 방문하셨었다.
"내 남편은 완전 거짓말쟁이예요. 남편은 한국에 아무것도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무슨! 공항에서부터 서울! 우와!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어요."
길에는 소똥 냄새가 가득하고 밤에는 개구리가 너무 울어대서 잠을 이루기 쉽지 않았다던 그 나라 대한민국. 서울에서 부산 가는데 몇 날 며칠이 걸렸다는 그 나라 대한민국.
부족한 보급 탓에 하루 단 한병의 물로 음용과 세안을 해결해야 했던 그 시절 스무 살도 안됐던 어린 병사들.
그러나 이분들은 우리를 위해 싸웠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가난했지만 참 따뜻했던 사람들로 기억한다.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도 우리에겐 생소한 요크쇼어의 도시 요크. 이곳에서 이분들은 여전히 한국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