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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Nov 03. 2019

'기미가요'의 작곡가는 한국땅에 묻혀있다.

에케르트와 한국의 묘한 인연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를 작곡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는 서울시 마포구에 묻혀있다. 어떻게 알았냐고? 내가 발견했으니까.


서울시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위치한 그의 무덤


나는 놀랐다. 왜 일본 국가 그것도 제국주의의 상징일 수 있는 '기미가요'를 작곡한 남자가 한국땅에 묻혀있는 것인가? 처음에는 뿌리깊은 반일주의와 의심병으로 인해 이것도 하나의 토착왜구의 횡포거나 일본의 만행인줄 알았다.


그러나 에케르트가 처음 조선땅을 밟은 이유는 고종의 초청에 의해서였다.


황실 근위병 말단직의 월급이 3.5원이던 시절, 고종은 월급 300원을 주며 에케르트를 모셔왔다. 이유는 자신의 생일날 쓸 '대한제국 애국가'의 작곡을 위해서. (물론 이 애국가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안익태 선생의 애국가와는 다른 애국가다.) 파격적 대우 속에 에케르트는 조선에서 근무하며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했고 실제 고종의 생일 때 이 곡은 연주됐다. 에케르트는 순종 때까지 한국에 머무르며 대한민국 음악 근대화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조선인의 음악적 재능을 종종 칭찬했다고 하는데 K-POP뿐만 아니라 클래식 등 음악 문화계에서 승승장구하는 한국인들을 보면, 인구수와 늦은 스타트를 감안했을 때 에케르트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916년 에케르트가 사망했을 때, 순종은 하사금 100원을 내려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에케르트 가문과 한국의 인연은 에케르트 사후에도 이어졌다. 그의 딸은 한국에서 교육에 헌신하던 프랑스인 에밀 마르텔과 결혼했다. 에밀 마르텔의 한국 사랑은 남달라서 '마태을'이라는 한국어 이름까지 있었다. 그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한성 외국어학교가 폐교되기 전인 1911년까지 조선에서 영어와 불어를 가르쳤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 신문에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가 적국이 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단다. 1920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마태을은 '한국 역사'라는 책도 썼으나 원고를 일제에 의해 빼앗겼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차녀 아마쿨라타는 천주교 수녀가 되어 서독 시민권도 거절한 채 평생을 한국 땅에서 헌신하다가 대구에서 사망했다. 아마쿨라타 수녀는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포로가 되어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에케르트가 충분히 한국땅에 묻혀있을 자격이 있는 외국인이라고 나 스스로 인정해드리기로 했다. 음악가에게 정치적 굴레를 씌우려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아마쿨라타 수녀님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기회가 된다면 대구 어딘가에 있다는 그녀의 묘지를 찾아가 보고 싶다.


 


기미가요 원작자 논란


일본 일부에서는 기미가요 원작자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일단 작곡가가 에케르트가 아니라 영국인 출신 음악가 윌리엄 펜톤이 원조고 에케르트는 편곡자라는 의견이 있다. 여기에 더해서 사무라이 오야마 이와오가 기미가요 작사를 했는데 오야마 이와오를 원작자라고 보아야 한다는 억지스러운 의견을 내놓는 소위 일본의 극우 세력도 있다.


내 생각에 본토 일본인인 이와오는 일본어라는 언어로 기미가요의 가사를 붙인 작사가 일뿐이다. 서양식 음계에는 문외한이었던 그가 작곡에 영감을 주었을지는 모르나 작곡가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그를 기미가요의 원작자라고 부르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미가요 작사, 작곡을 이와오와 펜톤 그리고 에케르트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일본인들도 외국인이 작곡해준 노래가 자신들의 국가라는 점을 인정하기가 조금은 자존심 상하겠지만 역사적 사실이 그러한데 어쩌겠는가. 밉상짓 좀 적당히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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