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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Nov 20. 2019

예의 없는 세상, 예의 없는 기자

기래기 IS EVERYWHERE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혹시 직접 겪은 캐나다의 렌트 룸 관련 문제들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나요? 


내게 날아든 밴쿠버 어느 기자의 메일 한 통. 나는 하겠다고 했다. 


사실 먼저 메일을 보낸 건 나였다. 밴쿠버의 살인적인 부동산 가격과 살인적인 렌트비용(월세) 그리고 개념 없는 집주인과 룸메이트들을 겪으며 내 정신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보증금까지 떼인 상태였다. 그런데도 어디에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어느 날 밤에 나는 밴쿠버의 렌트 룸 문제에 대해 기사를 쓴 기자들을 검색해보기 시작했고, 어떤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그 기자는 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만한 기자가 있으니 그 기자에게 내 메일을 포워드 해도 되겠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러라고 했고, 저 기자가 내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나는 밴쿠버 시내에서 그녀를 만났다. 나도 한때는 한국에서 PD로 일을 했으니 그녀의 기사에 사용할만한 소스가 될 수 있기 위해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해갔다. 심지어 몇 해전에 집주인으로부터 폭언을 행사당하고 보증금마저 돌려받지 못한 채 집에서 쫓겨난 내 친구의 아픈 기억까지 증언받아 프린트해갔다.


밴쿠버의 집주인들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세입자들의 신분증을 복사해가고 정부에서 마련한 방계약서가 아닌 이상한 양식의 법적 효력도 없는 계약서에 통금 시간까지 가미한 계약서에 종종 세입자들의 서명을 강요한다고. 법적 효력도 없는 계약서인데도 서명을 한 순간부터는 그것을 지키기를 강요한다고. 세입자가 불만사항을 접수하면 (예를 들면 '집주인이 너무 시끄럽다'와 같은) 집주인은 그 점을 고치기는커녕 외려 "그럼 나가 시던지"를 시전 한다고. 한 달 전 이사 노티스를 주지 않으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계약서의 항목 역시 캐나다 법으로 인정하지 않는 점인데 집주인들은 다 그 항목을 계약서에 넣고 있다고. 반드시 몇 달, 반드시 몇 년을 살지 않으면 보증금을 주지 않는다고 계약서에 명시하지만 이 역시 불법이라고. 집주인들은 다루기 편하고 함부로 해도 하소연할 곳이 마땅찮은 외국인 학생들을 항상 자기 집에 들이길 선호한다고. 등등. 


나는 나의 렌트 계약서까지 들고 가서 다 보여주었다. 그녀는 사뭇 진지하게 계약서를 보고, 내 허락을 받고 계약서의 사진까지 찍었다. 내 동의하에 나의 증언을 녹취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본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건 분명한 문제사항이었다. 나는 당시 캐나다로 이민을 준비 중이었기에 외국인 신분으로써 혹시나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내 이름이 평범하다면야 상관없겠지만 나는 이름도, 성도 너무 특이했다. 대신에 내 친구의 본명은 사용 가능하다고 추후에 내 친구와 내가 합의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 기자에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고, 외국인들이 밴쿠버에 사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어 고맙다고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기자와 헤어지고 친구를 만나는 내내, 사실 나는 고민을 많이 했다. 그냥 내 실명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사실 영어권에서 이름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 여기 애들은 미들네임만 해도 두세 개씩 쓰고 그러는 걸. 어찌 생각하면 당시 내가 쓰던 영어 이름이 내 이름인 줄로 알던 사람들도 많았기에 그냥 내 영어 이름을 쓸까도 고민했다. 어쩌면 캐나다 이민국에서 그렇게 자세하게 내 이름이 신문에 나왔는지까지 뒤질 정보력이나 인력도 없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기자가 기사를 쓰겠다고 문자가 오면 그냥 내 실명을 그대로 쓰라고 나도 허락해야지,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록 기자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문자를 했다. 그냥 평범하게. Hi, How are you? 답장조차 오지 않았다. 


그 후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나는 그 기자에게 끝끝내 답장을 받지 못했다. 자기가 인터뷰하자고 불러놓고선, 내 시간 뺏어 놓고선, 기사를 못쓰게 되었으면 못쓰게 되었다고 말이라도 해주면 좋잖아. 어떻게 한마디도 없이 잠수를 타버리는 그녀가 참 괘씸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기래기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캐나다에도 있구나 싶었다. 


그 후 나는 한국에 돌아와 잠시 기자생활을 했다. 그 캐나다 기래기 기자에게 확실히 배웠기 때문에 내가 인터뷰한 분들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갖고 반드시 기사를 발행하는 기자가 되었다. 데스크 때문에 발행 못한 인터뷰 기사들은 브런치에라도 올렸다. 


비(非) 밴쿠버 사람들은 밴쿠버 사람들을 두고 프리텐더(Pretender)라고 부른다. 겉으로만 다정하고 뒤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 기자도 전형적인 밴쿠버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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