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Yonu Nov 20. 2019

예의 없는 세상, 예의 없는 중학교 선생님

그때는 몰랐지, 술이 덜 깬 거였다는 걸.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어후~ 오늘 몇 페이지 할 차례지? 어후~ 피곤하다. 


평소 수업이 재밌어서 인기가 많았던 선생님. 북한에도 다녀올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선생님. 그런 그가 어느 날엔가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피곤하다"를 연발하며 교실에 나타났다. 보통 그는 자신이 가르쳐야 할 분량을 항상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달랐다. 우리에게 몇 페이지를 공부해야 하는지를 계속 물었고 수업도 하는 둥 마는 둥 겨우겨우 시간만 때우고 나갔다. 

그는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고 약간 비틀댔다. 결국 앉아서 PC로 수업했다.  


그가 나가고 쉬는 시간 동안에 우리는 킥킥댔다. 


야, 야, 샘 어제 밤새 둘째 만드느라 오늘 피곤한가 보다. 


딱 이게 여중생들 수준의 추론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좀 크고 나니 나는 그때 그가 술이 덜 깬 상태였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비록 술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계속 어지러운 듯 비틀댔고, 횡설수설해댔던 모습은 전날 침상의 문제로 피곤한 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 날은 월요일도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 다음날 수업이 있는 주중의 밤에 무슨 일로 그렇게 술을 퍼마신 것일까. 그가 회사원이었다면 분명 시말서를 썼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선생이니까. 그렇게 일단락되고 말았겠지. 




예의없는 세상 시리즈를 묶어 책으로 냈습니다! '여느 예의 없는 세상 생존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작가의 이전글 예의 없는 세상, 예의 없는 초등학교 선생님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