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급작스럽게 통역 요청을 받은 날이 있다. 내게 통역을 의뢰한 한국의 컨설팅 회사는 세계적으로도 명성 있는 모 글로벌 기업과의 미팅이 잡혀있었는데 무슨 사정인지 만 하루 남겨놓고 갑자기 내게 통역을 부탁해온 것이다. 나를 어떻게 믿고 이런 중요한 자리를 이렇게 급하게 맡기냐고 되물었더니, 얼마 전에 내가 한 시간 반 걸려서 보내주었던 번역본을 그 컨설팅사 이사님이 칭찬을 했었더란다. 그래서 믿고 맡긴다고.
내가 영어와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해서 통역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고 해도 의학용어나 경제용어를 다 알지 못하는 것처럼 통역가들도 통역전에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용어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용어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그 분야에 대한 공부도 제법 해놓아야 그날 통역을 제대로 해낼 수가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 통역가는 앵무새가 아니라고. 내가 이해하고 전달해야 언어가 다른 두 상대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만 하루. 나는 일단 미팅에 필요한 자료를 모두 받았다. 저쪽 글로벌 기업에서 보내온 자료까지 전부. 화학 업계였기에 영어는 물론이고 한국어도 낯선 용어가 있었다. (들어는 보셨습니까? 개질.)만 하루의 시간 동안 영영사전은 물론이고 국어사전에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논문까지 동원해서 나는 그 분야를 익혔다. 기밀유지 각서는 이미 써둔 뒤였기에 한국 컨설팅 회사의 회의까지 참관하며 내일 미팅의 전략을 같이 습득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고등학생 때 화학 관련 논문을 써서 전국대회 상을 수상해본 적이 있고 대학교 때 잠시나마 공대를 다녔었다는 점이 빠른 이해를 도왔다는 것이다.
내가 통번역 업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늘 공부를 해야한다는 점. 할 수 있다는 점. 게다가 돈을 받고. 얼마나 재미있고 흥미롭나.
나는 미팅 당일 새벽 1시까지 잠을 자지 않고 통역 준비만 했다. 그리고 오전 미팅 한 시간 전에 클라이언트들과 만나 오늘 미팅에서 반드시 빠져서는 안 될 주제와 결론에 대해 더블 체크했다.
공교롭게도 미팅 장소의 엘리베이터가 꽉 차 통역가인 나와 저쪽 기업 가장 중요한 결정자 둘만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에도 그와 라포를 쌓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올라왔다. 그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내게 미국에서 유학한 적이 있냐고 묻기까지 했다. 대신 캐나다에서 했다니까, "그래서 영어를 잘하는군요!" 하며 분위기도 좋았다. 나 역시 사전에 그의 프로필을 조사해갔기 때문에 "당신은 미국에서 석박사를 모두 했죠? 어때요? 박사가 된다는 건?"하고 물으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말 힘들어요"했다. 그러면서도 "그렇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공부죠."라고 대답했다.
하필 컨설팅회사 직원도 아닌 내가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자와 둘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자 내 클라이언트들은 긴장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 둘이 웃으며 나타나자 그들의 긴장이 약간은 풀리는 모습이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팅 통역 역시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다만 이런 '통역 자리'가 처음인 분들이 가끔 하는 실수... 는 통역가가 미처 통역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자기 말만 주욱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통역가가 메모를 해도 내용을 다 담기가 역부족이다. 보다 못한 컨설팅 회사 측 다른 사람이 그를 말려야 했다.
그리고 어차피 컨설팅사의 직원들도 영어를 어느 정도는 할 줄 알기에 짧은 내용은 나의 통역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답변하거나 질문을 주고받았다.
만 하루의 준비였지만 미팅 통역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만 두 회사가 서로 원하는 방향이 맞지 않아 보였지만 그건 나의 몫이 아니니 어찌할 내가 어찌할 수 있으랴.
인생에서 가장 급박하게 한 통역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