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Huh Oooh Ju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Yonu Nov 27. 2019

입사 앞으로


 브런치는 퇴사가 화두다. 이런 와중에 나는 조만간 입사를 한다. 그동안 나는 입사와 퇴사를 수없이 반복했다. 학원의 선생이었다가, 피디였다가, 기자였다가,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으면 큰일 난다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서를 받아 들고 유럽으로 훌쩍 3주간 떠났었다. 


 3주간 떠나고 돌아온 뒤 스스로 10월까지는 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쉬는 것도 내겐 익숙지 않았다. 사실 수도 없는 퇴사를 하면서 나는 계속 주변에 그리고 내게 '이번엔 쉴 거야, 이번엔 한 몇 달 쉴 거야'라고 말해놓고 금세 사람인에 이력서를 돌렸다. 그리고 또 출근을 해버렸다. 그래서 내 별명은 '프로 퇴사자'이자 '프로 이직러'였다. 유럽에서는 수십 차례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는 정말 쉬자. 제발 좀 쉬자.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쉬지 못하는 나의 병은 계속되었다. 어느새 또 사람인에 이력서를 돌리고 있었다. 면접 연락이 왔다. 쉬자는 마음 반, 일하자는 마음 반이었기에 몇 군데는 면접을 보고 몇 군데는 보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몇 군데 회사에 합격했지만 한 군데도 가지 않았다. 외려 맘속으로 '그래, 이번에도 재취업이 어렵지 않게 되겠구나'라고 안도했다. 


 9월에 일이 하나 터졌다. 더 이상 쉬면 안 되었다. 추석께부터 나는 이력서를 돌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동안 쉴 새 없이 나를 찾던 면접 전화가 한통도 오질 않았다. 수 차례 이력서를 손보고, 헤드헌터들과 이메일을 주고받아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 꼭 기회는 겹쳐서 온다고 이력서를 손 볼 틈도 없이 면접이 겹쳐 잡히는 바람에 이력서도 보내지 못하고 손 안의 모래처럼 흘려보낸 기업도 있었다. 물론 헤드헌터님이 내게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이유도 크긴 했지만, 돌아보면 조금은 아쉽다. 


 원티드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알게 되었고 그쪽을 통해 면접을 두 번 보았다. 다 떨어졌다. 두 번의 면접 참패는 너무 쓰라렸다. 


 쉬고 싶지 않은데 강제로 쉬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 9월, 10월, 11월이 됐다. 사이사이 프리랜서로 번역일을 받아 하긴 했지만 나는 몹시 가난했다. 내가 친구 생일날 호탕하게 선물 하나 쉽게 고르지 못할 인간이 될 줄은 평생 생각도 못해봤다. 내 평생 최악의 가난은 캐나다에서 다 겪은 줄만 알았는데 이번 가난은 더 고됐다. 병원에서도 '선생님, 그 약은 빼주세요'하며 약값마저 줄이기 위해 의사 선생님과 흥정을 했다.


 고정적인 아르바이트를 하기에는 언제 취업이 될지 모른다는 문제가 나를 가로막았다. 이것도 취준생들이 겪는 고초라면 고초다. 공연히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가 덜컥 취업이 되어버리면 또 아르바이트를 그만둬야 하는데 나를 채용한 아르바이트 사장님께도 못할 짓이 아닌가. 


 그동안에도 브런치를 통해 글을 쓰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브런치를 통해 글쓰기라도 하지 않았다면, 브런치 북을 몇 개 엮지 않았다면 나는 우울감과 불안감에 빠져 하루 종일 천장만 바라보고 살았을 것이다. 다만 인기글을 갈 때 주변에서 '얼마 벌었냐?'하고 가끔 물어올 때는 가슴이 선덕선덕 했다. 한 푼도 못 벌었는데...


 사람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나만 이렇게 고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연봉 2600 ~ 2800 동남아시아 근무. 석사만 여섯 명이 지원했더라. 2년 차 스타트업 연봉 협의. 석사만 네 명이 지원했더라. 나이도 거의 내 또래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사를 졸업하고, 취업 시장에서 취업이 호됬던 밀레니얼들이 안 되겠다 싶으니, 여기에 교수의 꼬드김에까지 넘어가 석사까지 마치고 다시 취업시장에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러나 취업시장은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연히 보게 된 아파트 경비 업무는 지원자가 500명이었다. 중근 근무 지원자는 300명. 

 해외 기업과도 면접을 봤다. 그런데 위치만 해외에 있지 사장은 한국인이었다. 잡플래닛에 들어가 보니 악평이 자자했다. '교민이나 현지 유학생들로 채용 안 하고 한국에서 직원 채용해가는 기업에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라는 평가글을 보고 그 기업의 2차 면접을 포기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프로 이직러'가 프로처럼 이직을 하지 못하자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혹시 기업들사이에 내 이름이 블랙리스트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굉장히 피해망상적인 생각도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유대인 속담에 '빈 지갑을 조심하라'고 했다던가. 비어 가는 잔고와 거절당하고 있다는 굴욕감은 내 정신과 자존감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1월에 한 기업에 합격했다. 그러나 연봉이 도통 맞질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입사 후의 내가 걱정됐다. 가지 않았다. 며칠 뒤 다른 곳에서 1차 면접을 봤다. 업계는 낯설었지만 그쪽에서 감안해주기로 하여 오히려 내가 다행이었다. 영어 면접 부분에선 저쪽에서 흡족한 웃음을 먼저 보여 다행이라는 마음마저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계속 이력서를 넣었다. 1차 면접 합격 통보가 왔다. 2차 면접일이 잡혔다. 2차 면접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계속 이력서를 넣었다. 2차 면접을 봤다. 2차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데 대기실에 있던 선한 인상의 여자분과 눈이 마주쳤다. 그분은 내가 면접을 보러 온 것인지 몰랐는지 내게 '안녕하세요'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나도 인사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아참, 저분도 내 경쟁자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채용인원 0명. 그녀를 응원조차 할 수 없는 내가 미안해졌다. 


 나는 해당 기업에 최종 합격했다. 마냥 기쁠 줄 알았는데 알량하게도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두려워서. 또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분명 울고 웃어야 할 일이 터지고 터질 것인데 프로 퇴사러가 잘 견딜 수 있을까. 이번 취업이 고됐던 만큼 쉽게 퇴사는 못할 것 같은데... 그리고 어느새 내 어깨에는 우리 가족을 함께 책임져야 할 책임의 무게가 자리하고 있었다. 합격통보를 받자마자 그 주 예약돼있던 병원에 가서 불안증세를 호소하며 불안증 약을 결국 높이고 말았다. 


 이제 회사에서 약속한 입사일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 브런치에 있는 수많은 회사원 작가님들의 글을 읽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었을 때는 기왕 사회인이 된 것 일도 즐기면서 하는 열정적인 회사원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깨지고 산산이 부서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그런 꿈같은 개소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아니 잘 견딜 수 있을까. 


 누군가 내게 말했다. 아니 여러 명이 그랬다. 입사를 하면 적금을 들던가 신용카드를 만들라고. 고정적 지출을 만들거나 빚을 내놓으면 그것 때문에라도 퇴사를 못한다고. 

 아무래도 신용카드부터 만들어야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기다리 고기다리 출판을 기다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