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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Dec 08. 2019

시대가 할퀸 예술가, 덩리쥔(등려군)


 아름다운 노래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안겨 주었던 대만가수 덩리쥔은 조국 때문에, 민족 때문에, 시대 때문에 참 많이도 할큄을 당했던 여성이다.


 1953년 1월 29일, 그녀는 중국 대륙 출신이나 국민당 소속이었기에 대만으로 도피한 부모아래에서 대만 국적자로 탄생한다.


 어릴 적부터 춤과 노래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덩리쥔은 결국 가수로 데뷔하고 대만은 물론 홍콩과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얻는다. 일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에는 한국 가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일본어로 부르기도 했다. 한 평생 한국에서 활동한 적 없던 등려군과 대한민국이 가진 유일한 끈이 '돌아와요 부산항에'일 것이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덩리쥔은 '말레이시아 여권 위조 사건'으로 순식간에 대만의 적이 되어버린다. 국내에서 방영된 서프라이즈를 통해 알려진것과는 달리 등려군은 당시 일본에서 음반 녹음을 마치고 체류 중이었으며 곧 홍콩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입국할때 말레이시아 여권을 사용했던 것이 빌미가 됐던 것이었고, 정확하게는 덩리쥔이 사용한 말레이시아 여권이 위조된 여권은 아니었다. 정식으로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발행한 여권이었으니 덩리쥔이 이중국적자였던 것이다. 당시 대만은 암암리에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있었고 정부관료들 조차도 여권을 두개씩 가지고 있었다.

 중국이 대만의 UN가입을 봉쇄하면서 대만 여권의 파워가 굉장히 낮아졌으며 대만 내에서도 해외로의 출국에 당국이 관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리쥔은 '국가의 배신자'라고 낙인이 찍혀 대만으로 돌아갈 수 조차 없었다. 덩리쥔은 미국으로 가서 휴식기를 보내야했다.

 덩리쥔을 욕하고 쫓아냈던 대만이면서 그녀를 다시 불러들인 것도 대만이었다. 중국과의 관계가 차차 나아지자 덩리쥔을 앞세워 문화외교를 펼치려 했던것이다. 실제로 덩리쥔이 대만으로 다시 돌아온 후 대만 정부는 여권사건에 대해 덩리쥔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덩리쥔은 다시 음악으로 꽃을 피웠다. 그런데 또 사건이 터진다. 중국에서 천안문 항거가 발생한 것이다. 덩샤오핑의 독재에 중국의 민주세력들이 항거한 의거였다. 덩리쥔과 홍콩, 대만의 가수들은 의기투합해 홍콩에서 천안문 항거를 응원하는 후원 콘서트를 개최한다. 덩리쥔은 당시에 "중국의 낮은 덩샤오핑이 지배하고 중국의 밤은 덩리쥔이 지배한다"는 말이 돌아 중국내 음반 판매가 전면 중지 됐을 정도로 중국내의 인지도가 높았다. 그런 그녀의 천안문 항거 지지에 천안문 민주세력 역시 큰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달랐다. 덩샤오핑은 천안문으로 탱크를 몰고 가도록 군부에 지시했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당했다. 현재도 이때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됐는지에 대해 중국 정부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있으며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천안문 사태에 대해 모른다.


 이 사건으로 덩리쥔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파리 등지에서 콘서트를 개최하며 망자를 기리고 피해자들에게 후원금을 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중국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리한 콘서트 진행, 무료 콘서트, 기금 기부 등의 이유로 덩리쥔은 건강도 그간 쌓아올린 부도 모두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1995년 5월 8일, 천식 발작으로 황망히 세상을 뜬다. 향년 42세.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그녀의 황망한 죽음의 배후에 중국 공산당의 공작이 있을 것이라는 음모론도 떠돌았으나 사실이 밝혀진 것은 없다.




 그녀가 불렀던 아름다운 사랑노래들. 이런 아름다운 가왕을 시대가 너무 많이 할퀴었다.



 마지막으로 등려군이 부른 일본어버전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항에' 발음이 제법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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