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로 승진한 지석-데이비드는 그를 대하는 동료들의 태도가 묘하게 변했음을 느꼈다. 단순히 그가 승진을 해서는 아니었다. 허울 없이 그를 대하던 동료들이 이제는 대놓고 그의 지시를 무시하거나 작은 실수에도 과민하게 반응했다. 아무래도 혜율-헤일리의 아버지가 스토어에서 지석-데이비드의 신상 조사를 한 탓에 그가 어른아이라는 사실이 직장에 퍼진 모양이었다.
어느 날 지석-데이비드는 아침에 출근해 커피를 내리다 손에 커피를 쏟고 말았다. 혜율-헤일리의 부모님을 만난 후로 수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탓에 비몽사몽 실수를 했다. 많은 동료들이 이를 목격했으나 그를 돕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한 동료는 그에게 악력 발달이 더디냐고 다소 공격적으로 묻기까지 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다른 동료가 그 동료를 말리며 "쉿! 조심해!"라고 말한 점이었다. 그 동료가 말한 "조심해"에는 지석-데이비드가 공격성을 드러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하루아침에 돌변한 동료들의 태도에 지석-데이비드는 일에도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혜율-헤일리가 곁에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됐다. 마침 그날은 혜율-헤일리와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힘겨운 하루를 그녀 생각으로 버틴 지석-데이비드는 설레는 마음으로 스토어 유니폼을 환복하고 전기 자전거에 올랐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혜율아! 지금 가고 있어!"
혜율-헤일리의 전화에 지석-데이비드는 밝게 말했다. 하지만 전화기 넘어 혜율-헤일리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지석아, 미안해.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안 되겠어."
이날 지석-데이비드의 세상은 무너졌다.
지석-데이비드는 며칠간 무단결근을 하며 작은 단칸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손가락질하는 기분이었다. 수십 번이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눈을 질끈 감았다 떠보았지만 진정이 될 리가 없었다.
혜율-헤일리를 잡지도 못했다. 그녀는 설령 둘이 결혼한다 해도, 2세를 걱정했다. 세상은 그랬다. 아직 정확한 의학적 데이터나 연구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은 어른아이가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기형아 등 후손에게 나쁜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다는 소문을 의심 없이 믿었다. 혜율-헤일리의 부모님도 이 점으로 그녀를 설득한 모양이었다.
지석-데이비드는 억울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른아이가 됐고 전쟁터로 보내져 자신은 물론 타인의 목숨까지 지키려 싸웠던 그였다. 전쟁이 끝이 나고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공치사와 함께 전역했을 뿐, 세상은 그를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나 괴물 취급했다.
'안 되겠어'
지석-데이비드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재홍아. 너 저번에 말했던 그 모임, 나도 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