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에게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안식처를 제공해주고 투어가이드에, 요리사, 운전사까지 자청했던 나의 친구 기예르모와의 이야기.
나와 기예르모는 내가 밴쿠버 생활중에 학교에서 만난 친구 중 한 명이다.
나는 스무 살 초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어학연수를 했었다. 그때 참 행복했다. 나는 간지럽지만 소위 명문대라는 한국에서의 대학교도 그만두고(자퇴하고) 학비를 끌어모아 캐나다 2년제 칼리지에 진학해서라도 캐나다로 '이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냉혹했다.
그때는 부모님 탓을 많이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많이 울고 잠도 못 자며 슬퍼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남 탓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니까.
어쨌든 그랬어도 나의 '캐나다행'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때문에 친구들이 취업에 열을 올릴 때도 나의 마음은 콩밭에 가있었다. 내게 한국에서의 '직업'이란, 캐나다로 가기 전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잠시 스쳐가는 돈벌이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럽게도 나는 캐나다 밴쿠버로 다시 가기 전까지 한국에서 직업적인 면에서도, 연봉적인 면에서도 그리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찝찝한 구석이 많았지만 몇 해 전에 쫓기듯 밴쿠버로 가게 되었다. 토론토로 가고 싶었지만 쫓기듯 가는 거라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저질렀다! 가서 들이받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나 나는 밴쿠버라는 도시를 몰랐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 도시가 반갑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떡해. 이미 왔는걸. 그렇게 내 밴쿠버 생활은 시작됐다.
나도 참 많이 노력했고, 영주권 프로세스까지 갔지만 결국 1년 반여만에 밴쿠버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밴쿠버에서도 참 많이 울었고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까지도 자주 갔었다.
떠나기 마지막 날 밤의 그 패배감과 돌아오고 난 후에도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는 죄책감, 인생에서 스스로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실망감,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 등으로 나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이 부분에서 나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 상태다.
이렇다 보니 밴쿠버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연락은 되도록이면 피했다. 딱히 정이 가는 친구들도 많지 않았고. 사실 기예르모에겐 미안하지만 캐나다에 있을 때 기예르모는 그냥 내게 '이상한 라틴 놈' 중 하나였다. 밴쿠버 생활 중에도 기예르모가 몇 번 어딜 놀러 가자고 했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뭐 돈이 없었던 이유도 컸지만.
나 수영하라고 수영장 열어주는 기예르모
마드리드에서 기예르모와 하루 종일 붙어있는 동안에도 되도록이면 밴쿠버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기예르모도 별 말이 없더라. 그러다 어느 날 밤에 기예르모는 와인을 한잔하고 술을 못 마시는 나는 주스를 한잔하는데 기예르모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근데 넌 언제 밴쿠버를 떠났어?"
"나? 나는 크리스마스전에. 너는?"
"나는 크리스마스 후에. 넌 어떻게 말도 안 하고 떠났더라. 나는 너 캐나다에 살 줄 알았는데. 페이스북 보다가 '어 잠깐? 얘가 한국에 있단 말이야?' 했어"
"(웃음) 나는 네가 밴쿠버에 오래오래 살 줄 알았어. 너도 처음에 그렇게 말했었잖아. 이민할 거라고. 너도 일 잘하고 있었잖아."
기예르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집값이 미쳤어(insane)"
하며 기예르모는 키득키득 웃었다. 나도 폭소했다.
밴쿠버는 작년 세계 부동산 거품 1위의 도시에 등극하는 영예를 얻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중국의 큰손들이지요. 위안화가 만들어내는 부익부 빈익빈 덕에 밴쿠버에서 살아온 기존 원주민(원주민도 한자어고 어보리진이 생각이 나니까 로컬이라고 할게요)들도 이미 밴쿠버 외곽도시 코퀴틀람으로 떠나고 있는 형국이다.
기예르모는 덧붙였다.
"그리고, 많이 준다고 해도 나가는 돈이 많아."
밴쿠버는 한 달 만에도 최저시급을 1불씩 훅훅 올리는 도시다. 덕분에 나는 최저시급이 오르면 물가도 같이 오른다는 것을 한국에 오기 전부터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는 최저시급 올리고 안 그래도 비싼 교통비도 바로 올려버리더라. 이럴 거면 뭐하러 최저시급 올리나 싶었다. 더하고 빼면 나가는 돈은 똑같이 만들어버리면서. 조삼모사예요?
"처음에는 공원은 좋았어"
기예르모가 말했다.
"스탠리 파크?"
밴쿠버에서 제일 유명한 스탠리 파크. 북미와 유럽을 포함한 모든 공원들이 다 그렇지만 낮에는 아름답고, 밤이 되면 우범지대로 변하는 스탠리 파크. 아무튼 유명하다. 나도 몇 번 가긴 했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내가 공원 타입은 아니어서... (게으름)
"응 스탠리 파크도 좋았고, 여기도 좋았고, 저기도 좋았고"
기예르모는 또 여기저기 공원들의 이름을 열거했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몰라서. 헤헤.
"근데 공원도 다니다 보니까, 거기서 거기고... 밴쿠버에 있는 공원을 다 가고 나면 이젠 뭘 해야 하나 싶더라. 밴쿠버 진짜 할 거 없잖아."
나는 이 부분에서 격하게 공감했다. 특히 겨울이면 6시에 해가지는 밴쿠버. 5시부터 추적추적 비가 오는 밴쿠버. 이 시절엔 집에 있는 것밖에는 할 게 없다. 상점들도 다 문을 걸어 잠그니까. 여름에도 길게 장사를 해봤자 8시, 9시면 레스토랑이, 펍이 문을 닫는다. 고등학생 때부터 야간 자율학습과 학원, 과외로 새벽 밖을 쏘다니는 게 익숙해진 (성인 이후는 말해 무엇하리)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토론토도 이렇지는 않았다. 토론토에서 온 교수도 밴쿠버의 삶에 만족하지만 토론토의 나이트라이프(Night Life. 마땅히 번역할 만한 단어를 모르겠어서)는 그립다고 했다.
"그리고..."
기예르모는 갑자기 슬픈 눈을 한채 말했다.
"외로웠어."
하. 외로움이라.
"나도."
외로움은 이민자라면 모두가 겪는 이민자 최대의 적이자 친구 같은 존재다. 가족이 함께 있다면,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함께 있다면 조금은 덜할 수 있겠지만 기예르모나 나나 혈혈단신이었으니까. 물론 한국에 있어도 외로움은 탄다. 다만 찾아오는 빈도의 수나 해소로 가는 과정을 찾기까지가 남의 땅에 있을 때 훨씬 어렵다. 스무 살부터 집 떠나 살며 외로움을 잘 안 탄다고 자타공인 자부해왔던 나도 문득문득 덮쳐오는 외로움과 향수엔 손쓸도리가 없었다. 갑자기 포장마차 떡볶이가 먹고 싶다거나 신림역 양꼬치집에 가서 양꼬치를 잔뜩 먹고 대림천에 가서 한바탕 웃고 떠들고 싶다거나 할 때. (궁상맞은 소리지만 밴쿠버에 있는 1년 6개월 동안 양꼬치를 딱 두 번 먹었다. 그나마도 양에 차게 먹지도 못하고 한 세 꼬치 먹었나. 당연히 이유는 비싸서. 아이고! 궁상맞아. 이 여자 완전 거지로구만. 정답!)
"그리고 맨날 다 떠나."
기예르모 주변에는 유난히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이건 기예르모가 처한 환경에 기인했다. 기예르모는 어학코스 등록으로 밴쿠버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주변엔 유학생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학생들은 언제나 떠난다.
나도 토론토에서 어학코스를 밟으며 유학생으로 지내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참 친하던 친구가 있었다. 조나단. 걔도 스페인애였다. 처음에는 인상도 느끼해서 내가 오해를 했는데 참 착했다. 같이 당시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던 화이트 라이즈의 작은 콘서트도 보러 갔었다. 조나단이 토론토에서의 짧은 어학연수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떠났을 때 느꼈던 그 공허함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 기분을 기예르모는 얼마나 자주 느꼈을까.
그리고 이건 나도 해당되는 환경의 문제였다. 나나 기예르모나 이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잡은 일자리는 로컬 캐네디언들이 하지 않으려는 직업이었다. 캐네디언들이 하지 않으려는 일이니 캐나다 정부가 외국인이라도 데려와서 영주권, 시민권을 줘가면서까지 빈자리를 채우려 하는 직업. 캐네디언들이 왜 하지 않으려는 일이겠는가. 일이 쉽지 않으니까. 그렇다 보니 나를 포함해 많은 외국인들이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왔다가 '이건 아니다'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언어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회사에 적응을 못하거나, 일할 사람은 부족하지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캐나다 이민국이 더 이상의 체류를 거부하거나,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에 진이 빠지거나 등 다양한 사연으로 친구들이, 동료들이 떠났다.
그래서 기예르모도 나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나에게 한국이 헤븐 조선도 아니거니와 기예르모에게 들어보니 스페인이 기예르모에게 헤븐 스페인도 아니다. 내식대로 표현하자면 스페인에서 대학교까지 졸업한 기예르모가 헬스 페인에 환멸을 느끼고 헤븐 캐나다를 꿈꾸며 캐나다에 갔지만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돌아온 뒤에도 기예르모는 괴롭다. 그도 현재 원하던 일자리를 찾지는 못한 상태다. 어째 한국도 스페인도 청년 취업난, 경제 상황이 비슷하고 기예르모도 나도 개인적 상황이 비슷하다.
이왕 글이 길어진 김에 밴쿠버에서 떠나지는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하게 행복하다고 말하지는 않는 나의 친애하는 일본인 친구 A의 이야기도 좀 더 적어볼까 한다. 일본, 일본인이라면 치를 떨고 언제나 선을 그어왔던 극단적 반일주의자인 나의 지평을 넓혀준 내 삶에 있어서는 새로운 사람이다. 이름이 공개되는 건 본인이 원치 않을 것 같아서 A라고만 하겠다.
A는 히피스타일이다. 부모님도 일본인이고 본인도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막상 일본에서 산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청소년기를 미국에서 보낸 A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자기가 일본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버블경제가 그녀 집안을 통째로 뒤흔들었고 그것 때문에 일본에 돌아갔다가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워킹홀리데이로 유럽에 갔다가 호주에 갔다가, 호주에서 학교를 다니며 일을 하다가, 몸이 아파서 일본에 돌아갔다가, 일본에서 레게를 하다가, 서핑을 하는 서퍼들과 어울리다가, 레게 페스티벌을 하는 팀들과 놀다가, 미국 전국 캠핑카 투어도 했다가, 밴쿠버에서 워킹홀리데이도 했다가, 스위스 갔다가 프랑스 갔다가, 또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아무튼 엄청나게 돌아다니며 살았다.
밴쿠버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떠난 지 꼭 10년 만에 A는 밴쿠버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이민을 목적으로. 그렇게 우리는 만났고 몇 달은 내가 워낙 그녀에게 선긋기를 해서 데면데면하게 지내다가 종내에는 속을 털어놓는 친구 사이가 됐다.
그녀 말로는 밴쿠버가 너무 변했다고 했다. 10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고. 사실 남이 들으면 당연하다고 할지도 모를 소리였지만 당시의 나는 그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번 행복한 기억이 남은 곳이라면 영원히 그런 곳이어야 할 줄 알았다.
내가 다른 친구에게 내가 6년 만에 캐나다에 돌아왔는데, 그때랑 너무 다르다고 하니까 그 친구가 "이봐, 6년은 존x 긴 시간이야(Man, 6 Year is fuxkin' long)"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그때도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또 하나. 이건 유럽 여행 덕분에 얻은 소득이다. 독일 내에서도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이라는 두 도시를 여행하며 느낀 점이지만 같은 나라여도 도시마다 특징이 다르고 색깔이 달랐다. 사실 같은 대한민국이어도 서울과 부산이 다르고 광주와 영덕이 느낌이 다르고 정취가 다른데 왜 나는 밴쿠버에서 토론토와 같을 것을 감히 기대했던 것일까.
이민자의 삶은 쉽지 않다. 혹시 여행 중에 연수중에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가 당신의 마음을 확 잡아당겨 꼭 그곳에 살고 싶다는 느낌이 확 왔다면 나는 가능한 한 빨리 가서 살기를 추천하고 싶다. 늦으면 도시도 변하고 당신도 변한다.
하지만 말했듯 이민자의 삶은 쉽지 않다. 잠시 여행이나 연수로 보는 그곳의 삶은 그저 아름답고 행복해 보일 수밖에 없다. 우리도 헬조선 헬조선 하지만 주머니 채워서 놀기에 한국은 환상적인 도시다. 당장 서울의 인프라와 24시간 문화, 안전함, 한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바다, 지하철 타고 갈 수 있는 산, 등등. 떠나기 전에 물가와 그 도시의 인프라, 삶의 질에 대해서는 정말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나도 다음 나라를 선택한다면 촉각을 세우고 고려할 거다. 신문 같은데 나오는 살기 좋은 도시, 국가 1위 이런 건 믿지 마시라. 밴쿠버도 전 세계 살기 좋은 도시 몇 위에 늘 오르내린다. 베드벅 때문에 비상이 걸리고, 배차시간을 지키지 않는 대중교통, 온갖 약물이 난무하고 응급실에 실려가도 무한정 대기, 층간소음 개념조차 없이 밤새 파티를 해도 문제가 없다는 도시 밴쿠버가 어떻게 살기 좋은 도시 1위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완전 사대주의적 발상인 것 같기도 하고. 여기도 비 오면 푹 꺼진 아스팔트 도로에 물도 꽉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