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암스테르담을 떠나는 날이었다. 매우 환상적인 암스테르담의 하룻밤을 보낸 탓에 몸도 가볍고 마음도 들떴다. 잠을 한숨도 자지 않았지만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여정은 암스테르담에서 프랑크푸르트! 유레일패스와 미리 발권해둔 1등석 티켓을 안고, 나의 캐리어와 함께 암스테르담 역으로 향했다.
우연히 플랫폼에서 기차를 놓치는 승객들을 보았다. 내 맞은편에 서있던 기차였는데 가족으로 보이는 승객 넷이 짐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갔으나 이미 기차는 출발하고 난 뒤였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하며 독일행 기차가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문을 열고 탑승했다.
출발까지는 여유가 있었고 나는 다른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뉴햄프셔에서 왔다는 노부부는 결혼한 지 15년 차에 접어든다고 했다. 아내는 필리핀 사람으로 둘은 인터넷으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특히 엔지니어인 아저씨는 서울에도 와본 적이 있다며 남산타워를 연신 칭찬했다. 아저씨도, 아주머니도 굉장히 선한 인상의 소유자셨다. 또 다른 승객 역시 부부로 아내가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왔고, 고향방문 겸 여행 중이라고 했다.
앞으로 족히 4~5시간은 함께 기차를 타고 가야 할 사이였던 우리. 우리는 이미 하하호호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기차 여행 또한 지루하지 않겠구나 하며 나는 마지막 암스테르담 역의 사진을 담으려 기차 밖으로 잠깐 내렸다.
그리고 이게 명백한 실수였다.
내가 잠시 핸드폰 카메라에 집중 한동안, 갑자기 기차가 문을 닫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급히 열차에 다가가 열림 버튼을 눌렀으나 이미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차는 출발해버렸다.
달리기를 전혀 못하는 나지만 일단 쫓아갔다. 순간적으로 기차에 매달려서라도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미친 생각이다.) 우사인 볼트가 오면 기차를 따라잡을 수 있었으려나. 하지만 나는 우사인 볼트가 아니잖아. 아까 기차 놓치는 승객들 보며 나는 그러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차를 놓쳤다.
여권과 짐가방 모두 기차에 이미 있는 상황.
나는 전속력으로 아래층의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뛰어갔다. 숨을 헐떡이며 "몇 시 몇 분 기차를 탈 예정이었고, 내 여권과 짐은 기차에 있고, 나만 기차를 타지 못해 모두 잃어버렸다. 찾아야 한다."라고 두서없이 말했다. 그러나 인포에 서있던 네덜란드인은 "너의 그 절망감은 알겠어, 하지만 여기는 네덜란드 국내선 기차만 담당해. 그러니까 위층에 있는 국외선 기차 담당 데스크로 가도록 해. 미안."이라 답했다.
당장 해결된 것은 없지만 그 절박한 상황에서 그가 "너의 그 절망감은 알겠어"라고 말해준 것만으로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그러나 우는데 감정을 소비할 시간도 없었다. 당장 여권과 짐 찾기가 급했다. 그대로 2층으로 다시 뛰어올라갔다.
2층 국외선 인포 데스크는 굳게 닫혀있었다. 아무래도 이른 시간이라 그랬을까. 답답한 마음에 문을 거세게 흔들어보아도 아무도 나와보는 이 없었다. 나는 다시 엄청나게 당황했다.
급한 마음에 옆의 경찰서로 직행했다. 문을 열려는데, 문이 잠겨있다. 분명 안에는 사람이 있는데. 당황한 나는 문을 더 거세게 흔들었다. 그러자 문에 달려있는 마이크에서 "너 무슨 일인데? 그렇게 함부로 경찰서 못 들어와"라는 퉁명스러운 여자 경찰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어에는 반말과 존댓말이 없다고는 하지만 분명 친절한 영어와 불친절한 영어는 있다. 나는 거의 비는 수준으로 내가 경찰서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짐을 잃어버렸다고요, 기차가 나를 두고 출발해버렸어요, 인터내셔널 데스크가 열지 않았어요, 들어가게 해주세요, 짐을 찾게 해주세요... 징~ 그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경찰서 안은 이미 소란스러웠다. 약에 취한 것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경찰과 대화 혹은 대치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프랑스 사람이라 했고 신분증을 제시하라 하자 신분증을 제시했다. 영어 억양은 프랑스인이 맞는 것 같았다. "후렌취, 후렌취" 비음 섞인 영어 발음.
경찰은 그에게 "신분증 진위여부 좀 확인하겠다"며 그의 신분증을 낚아챘는데 그 모습이 가뜩이나 온전치 않아 보이던 그의 정신상태를 결정적으로 자극한 듯싶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결국 남자 경찰들이 나와 그를 거칠게 움켜쥐고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무서웠다. 나는 정말로 겁을 먹어서 경찰서 한구석에 가만히 서서 눈치만 봤다.
경찰서 내부 사진을 마땅히 설명할 사진을 찾지 못해서 신세계 중구 오빠 짤로 일단 대신
경찰서 안에 들어갔다 해도 바로 경찰을 대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렇게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화해야 한다. 아까의 소란으로 나는 바짝 얼어있었다. 아까 끌려간 프랑스 남자는 같은 EU 국민 이기라도 하지 여기 유럽 땅에서 나는 완전한 외국인아닌가. 손짓으로 내가 다가가도 되겠냐는 제스처를 취하자 통유리 너머의 경찰이 가까이 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나는 세 번째로 다시 내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관은 무척 시크하게 "알았다. 담당 경찰관들 올 때까지 기다려."라고 말하고 통유리 뒤편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일단 경찰에게 상황을 접수하고 나서야 경찰서에 벤치가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앉을 정신이 좀 들었다. 친구들에게 상황을 카톡으로 마구 전파하자, 이미 유럽여행을 다녀본 친구들은 내게 여권과 짐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주변에 잃어버렸다가 찾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나는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함께 이야기 나눴던 다른 승객들이 내 짐을 지켜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론 나의 유럽여행에 첨부할 썰 하나가 더 느는구나 하며 웃음이 나기도 했다. 물론 대놓고 웃지는 않았다. 내가 원래 좀 이상한 포인트에서 웃는 버릇이 있어서 가끔 오해를 사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이곳은 무시무시한 유럽의 경찰서인데 웃었다가 나도 프랑스인처럼 잡혀 들어가면 일이 커진다. 참아라 여느. 참아라.
이 와중에 잊혀지지 않는 카톡 하나, 아니 몇 개는 내가 네덜란드 경찰서에 있다고 하자 "너 드디어 약하다가 경찰서 잡혀간 거냐?"라고 묻던 이들이었다. 이 싸람들이 장난하나...! 나를 뭘로 보고!
이윽고 경찰관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외로 빨리 왔네'하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내가 기다리던 담당 경찰이 아니었다. 두 명의 흑인과 나타난 경찰은 네덜란드 경찰이 아닌지 안에 있는 네덜란드 경찰에게 영어로 "기차역에서 잡았는데 표도 없고 여권도 없고 그 어떤 아이디도 없다."라고 말하곤 나가버렸다.
불법 체류 중이면서 무지하게 당당한 그들의 태도에 내가 더 당황했다. 나는 불체자로 몰릴까봐 더 쫄아있었는데.
네덜란드 경찰이 다시 두 흑인에게 "여권도 없고 아이디도 없다고?" 하니까 흑인들은 매우 당당하게 "노오"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그럼 너희 어느 나라에서 왔는데?" 하니까 "We from Sudan"이라고 했다. 경찰관들은 그들에게 어떤 종이를 주며 "여기로 가라"하고 그들을 내보냈다. 살짝 당황스럽긴 했다. 그 표 받고 그 흑인들은 그냥 엮 밖으로 도망가버리면 되지 않나? 뭐 어쩌면 내가 엿듣다가 중간을 좀 잘라먹고 들은 걸 수도 있고 밖에서 그 경찰관이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고.
만리타향에서 불법체류자와 함께 경찰서에 있다는 생각이 드니 헛웃음도 나왔다. 물론, 역시 겉으로는 웃지 않았다. 달리 생각하면 나도 여권을 찾지 못하는 순간 같은 불법체류자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기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갑은 주머니에 넣고 내려 한국 운전면허증과 대학교 학생증, 그리고 아직 만료 안된 캐나다 드라이버 라이센스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 죽상만 봐도 진짜 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는지 내가 제일 먼저 내민 내 캐나다 드라이버 라이센스는 검사도 제대로 안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태만 행정 아닌가? 아까 프랑스인 신분증은 진위여부 확인한다고 뺏어가기까지 했으면서. 나 같이 만만하게 생긴 동양 여자는 위협 요소로 의심도 안 한다 이건가. 근데 사실, 내가 뭘 하겠어. 근육량도 얼마 안 되는데.
드디어 담당 경찰관들이 나타났다. 둘이나 왔다. 그들은 내게 다가와 열차번호와 자리 번호를 물었다. 정말 다행히도 핸드폰에 표를 스크린샷해 담아뒀기 때문에 이 부분은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하필 내가 타려 했던 열차의 번호가 153이었던 것도 나의 기억에 도움을 주었다. 어릴 적 교회에 다녔거나 모나미 153 볼펜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친숙한 숫자다.
그들은 무전기로 한참을 통화했다. 이 부분은 좀 답답했다. 모든 대화가 네덜란드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어라 대화하는지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어 상황 돌아가는 것을 모른다는 게 이번 사건에서 가장 갑갑한 일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내게 가방이 어떻게 생겼느냐 물었다. 분명 내 가방이지만 갑자기 이걸 어떻게 묘사해야 하나 뇌가 멈춰버렸다. 색깔을 묻는데 내 케리어가 로즈골드였는지 그냥 골드였는지마저 헷갈렸다. 이번에도 다행히 가방 사진 찍어둔 게 있었기 때문에 그 사진을 보여주었고 경찰관이 대신 설명해줬다.
무전을 마치고 경찰관은 내게 "지금은 네 짐이 기차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고, 기차가 다음 역에 정차하면 확인해줄 거야. 그동안 기다려." 하고 또 시크하게 한마디 했다. 당장 확인이 안 된다는 말에 나는 죽상에 울상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나는 "내가 그냥 운이 없는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하고 물었다. 그는 쿨하게 "응~ 니가 멍청한 거야."라고 말했다. 뒤에는 "조크, 조크"라고 했지만. 아저씨... 진심이었던 거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경찰관의 무전기가 울렸다. 또 네덜란드어로 통화하더니 내게 무전기를 들이밀며 "이 사람한테 가방 생김새를 설명해"라고 했다. 나는 또 당황해서 "어... 크지 않은 슈트케이스고... 위에 동그란 스티커가 붙어있고..."라며 더듬더듬 설명했는데 상대방이 귀찮은지 딱 끊고 "야 니꺼 골드 메탈 맞지?" 했다. 맞았다. 내 거였다. 아마 가방은 이미 찾았으나 내가 진짜 주인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무전을 친 것 같았다.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또 울뻔했다.
짐을 찾았다는 소식에 경찰관들은 나를 경찰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해주고. 이때 내 심정은 연행당하는 범죄자의 그것과 같았다. 그럼 데려갈 때 미란다 원칙이라도 좀 읊어주시던지요...
경찰관도 문신이 있는 나라. 이곳은 네덜란드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따라오라니까 졸졸졸 따라갔다.
내가 결국 "짐 찾으러 가는 거야?"라고 물어보자 "응. 너 기차 타고 니 짐 보관 중인 역으로 갈 거임. 니가 기차 타고 갈 때까지 우리가 같이 있을 거임."이라고 했다. 물론 그의 표현과 억양은 굉장히 강했다. 목소리도 쩌렁쩌렁한 그는 내 바로 옆에서 "아 윌 풋ㅊ츄 인 다 튜!레인! 아 윌 풋ㅊ츄 인 다 튜레인!" 했는데 솔직히 귀가 아팠다... 아마도 내가 짐을 잃어버렸던 공포로 심신 미약 상태여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는 "너 진짜 운 좋은 거다. 보통 짐 못 찾아. 너 진짜 운 좋은 소녀다 You are such a lucky girl!"이라고 계속 강조했다. "마! 운이 좋았으면 짐을 안 잃어버렸지!"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까불면 짐 안 찾아줄 거 같아서 조용히 있었다.
경찰관은 이어, "다른 승객들이 너 왜 안 오나 기다리고 있었단다." 했다. 그 사람들 덕분에 짐이 도난당하지 않은 거라고. 고마워요 뉴햄프셔 아저씨, 아줌마, 고마워요 미국인 부부분들......
짐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턴 솔직히 기뻐서 약간 실실 웃음이 나오려고도 했는데 학교 다닐 때 선생님 앞에서 웃다가 "너 왜 웃어 지금 이게 웃겨?" 하며 혼난 적이 많았던 나기에 입술 꾹 깨물고 참았다. 대신 나의 팔자 눈썹을 십분 이용해 계속 속상한 척 연기연기. 경찰관들한테 미안한 척 연기연기.
그리고, 아직 짐의 내용물을 확인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권이나 물품들이 그대로 있는지는 미지수라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경찰관은 또 내게 "너는 위트레흐트(Utrecht)로 가야해. 그러려면 표를 사야 하는데 공짜로 타게 해 줄게. 대신 내가 기차장이랑 얘기해야 해."라며 은근히 친절한 면모를 보였다. 위트레흐트는 처음 듣는 도시 이름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초등학생 때 사용하던 볼펜에 그려진 미피의 고향이란다.
안녕 미피 볼펜, 너의 향 맡는 것을 참 좋아했어
위트레흐트로 가는 기차가 도착하자 경찰들은 열차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열차장은 네덜란드인 치고는 키가 중키인 약간 나이 든 아주머니였다. 걸음부터 통통 튀는 매우 사랑스러운 사람의 바이브가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네덜란드어로 경찰들과 대화했다. 이윽고 상황 파악이 끝난 그녀는 "오!" 하며 나를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그윽이 바라봤다. 그리고는 "내릴 곳을 알려줄게~ 일단 타~" 했다. 내가 "아무 데나 앉아도 돼?" 하니까 "응~ 빈자리 아무 데나 타~" 했다. 내가 그녀의 말에 물결을 넣는 이유는 유난히 그녀의 영어와 말투가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경찰들은 내게 웃는 얼굴 한번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내릴 역을 포스트잇에 적어주고, 몇 번째 역인지 까지 알려줬다. 역에서 내리면 몇 층에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있으니 거기에 가서 짐을 찾으라고 했다. 물론, 난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포데스크가 몇 층인지 같은 건 듣자마자 까먹어버렸다. 뭐... 기차역에 내려서 물어 물어 찾아가도 되니까.
열차 2층에 탑승해 있는데 아까 그 차장 이모(이모라고 부르고 싶다)가 내게 와서 "위트레흐트에서 내려서 나를 찾아~파인드 미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찾아?" 하니까 두 손가락을 이용해 걸어가는 제스처를 보여주며 "유 껌 뚜미~ 아이 껌 뚜 유~♪"라고 했다. 맹세코 그녀의 이 두 손가락 제스처는 유치원 졸업 이후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녹화라도 해두고 싶을 만큼 정말 귀여웠다. 그녀가 내게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기차에서 내린 뒤 어디 가지 말고 자기도 같이 내릴 테니 만나자는 뜻이었다. 다만 그녀의 영어 레벨이 그리 높지 않아 meet 대신 come이나 find로 설명한 거였다. 그것마저도 귀여워... 초면에 사랑해요.
목청 큰 경찰아저씨가 적어준 내릴 역이 적힌 쪽지(왼) 기차 밖 네덜란드 풍경(오른)
그렇게 나의 예정에 없던 또 다른 여정이 추가되었다. 기차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제야 조금 웃을 수 있었다.
약속한 역에서 내려 두리번두리번 거리자 차장 이모가 또 나풀나풀♬ 함박웃음 지으며 내게 걸어왔다. 하... 저 사랑스러운 사람. 그녀는 나를 직접 인포데스크로 데려다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인포데스크까지 가는 동안 그녀는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지만 참 아름답다며 자국 자랑을 신나게 했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사람들이 유럽 국가를 부르는 애칭이 있는데 네덜란드를 '튤립국'이라고 부른다고 하니까 재미있다며 깔깔 웃었다. 그러면서 자기 집 옆에도 아름다운 튤립밭이 있는데 일 때문에 보러 갈 시간도 없다고 귀여운 투정을 부렸다. 자기가 타는 기차 옆으로도 튤립밭이 펼쳐지는데 그 풍경을 두고도 자기는 일만 하고 있다면서 슬퍼했다. 튤립 저랑 보러 가요 언니...
인포에 도착하자 그녀는 인싸력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직원들 모두와 인사를 했다. 나를 위해서 대신 번호표도 뽑아주고, 내가 말할 틈도 없이 내상황을 인포 직원들에게 설명해줬다. 드디어 직원이 내 짐을 꺼내왔을 때 나는 정말 울뻔했다. 너무 기뻐서... 하아... 드디어 찾았구나.
차장 언니는 내게 "그래도 네가 정말 빨리 신고를 해서 다행이야. 정말 잘했어"라고 나를 다독여줬다. 사실 그래서 또 한 번 울뻔했으나 참았다. 이번 사건을 겪으며 눈물을 한 대여섯 번은 삼킨 것 같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나의 짐! 위트레흐트의 직원들은 엄청나게 친절하게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다음 기차표도 끊어주었다. 돈을 내야 했는데 유레일 패스 소지자라고 하니까 차장 언니가 "완전 잘됐당~~~♬"하면서 공짜라고 했다.
심장 떨어질 뻔했던 여권, 짐 분실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네덜란드 경찰 아저씨들, 네덜란드 차장 언니(이모...?), 그리고 인포 직원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으헝헝.
여권과 짐을 찾았을 때 내 모습... 겉으로는 의연한 체 했지만 속으론 이랬다...
여러분 안전 여행하세요!
후기- 급하면 당신은 초인이 된다
나는 원래 길치다. 길눈도 어둡고 눈 앞에 있는 건물도 못 찾아서 빙빙 돈다. 그런데 여권과 짐을 잃어버렸던 그 순간에는 갑자기 내가 도움을 청할 모든 곳들의 위치와 도달하는 길이 다 기억이 났다. 기차가 떠나버리고 나자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1층에 위치한 암스테르담 기차역 인포메이션 데스크였다.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의. 그래서 누구에게 묻거나 어지러운 화살표를 따라가는 것 없이 곧장 뛰어갈 수 있었다.
1층 인포메이션 직원이 다시 위층 인터내셔널 데스크로 올라가라고 했을 때도 바로 어렴풋이 2층에서 본 의자가 주욱 늘어서 있던 공간이 떠올랐다. 거기가 인터내셔널 데스크라는 확신이 들었고 바로 그리로 향했다. 내부가 비어 있어 다시 눈앞이 깜깜했지만 1초도 안돼서 바로 옆이 경찰서라는 것이 떠올랐다. 기차를 기다리다가 경찰서를 발견하곤 '이런 곳에 경찰서가 위치하고 있네?' 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바로 경찰서로 뛰어갈 수 있었고 네덜란드 기차장 이모의 말처럼 신속한 신고덕에 짐을 찾게 되었다.
길치, 방향치, 지형지물 까먹기 1등 치고는 재빠른 상황 대처였다. 나도 내가 신기했다. 역시, 급하면 당신은 초인이 된다. 그렇다고 일부러 겪으라고 추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전.혀. 오히려 요지는 혹시라도 이런 일을 겪을까 두려워 여행을 망설이고 계신다면 조금은 당신을 믿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여유는 기차 시간 봐가면서 부리자. 나는 십년감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