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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Aug 27. 2019

나는 누구 여긴 어디 - 여긴 히드로공항이 아니잖아!

영국에 아는 공항이라곤 런던 히드로 공항 하나였다. 한국-아부다비-런던 노선을 탔을 때도 히드로에서 내렸고, 브리티시 에어라인을 타고 독일로 나갈 때도 히드로에서 탔다. 나는 맹세코 짐을 찾고 밖에 나갈 때까지 내가 내린 곳이 런던 히드로 공항인 줄 알았다.




공항에서 영국 언더그라운드를 타고 호스텔이 있는 런던 시내로 이동하려는데 언더그라운드가 보이지 않았다. 원래 보던 히드로 공항과 달라 보였지만 원체 내가 길눈이 어둡고 히드로 공항에는 많은 터미널이 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일단 ‘트레인’이 쓰여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내려 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뭔가 달랐다. 게다가 내가 유일하게 런던에서 기억하는 지하철역인 패딩턴까지 가는데 16파운드나 내라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나는 자동발권기를 포기하고 안내원에게 향했다.


나이 지긋한 영국인 안내원 할머니는, 트레인은 16파운드이고, 네가 가려는 곳은 차라리 버스를 타는 게 낫다고 했다. 버스는 위쪽으로 올라가면 탈 수 있다고. 그래서 버스를 타러 다시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긴 여정이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내린 곳은 히드로 공항이 아니라. 샌드포드 공항이라는 것을. 우리로 치면 서울 간다고 인천공항이 아니라 김포공항에서 내린 격. 그런데 김포공항보다 훨씬 먼 곳에 내린 격...


버스 매표원에게 구글맵을 켜고 물어본 결과 매표원은 언더그라운드를 탈 수 있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주는 버스표를 끊어줬다.


버스표를 들고 터덜터덜 버스 타는 곳으로 갔다. 이때는 정말 당황했다. 게다가 나는 런던에서 친구와 저녁 약속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휴대폰 배터리도 간당간당했다. 내게 길을 알려주는 유일한 문명의 이기인 휴대폰마저 배터리가 간당간당하자 나는 당황했다. 일단 약속을 했던 친구에게 지금 히드로 공항이 아니라 다른 곳에 내려서 오늘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는 카톡을 남겼다. 나는 본래 불안증이 있는 가운데 계획이 틀어졌을 때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우왕좌왕하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 앞의 영국인 아줌마가 “걱정 마, 버스 곧 올 거야”라며 나를 안심시켜줬다. 친절하시기도 하지.




버스는 한 시간여를 달렸다. 그런데 이상히도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의도치 않은 여정이 추가되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이었을까. 묘하게 행복하고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그리고 그리운 사람이 생각났다. 밴쿠버에서 만났던, 시애틀 출신의 어느 사람. 연락을 안한지 1년 여가 넘었지만 왠지 모르게 편지를 쓰고 싶어 졌다. 그래서 급히 베를린 호텔에서 받았던 인보이스에 편지를 썼다.


“안녕, 나야. 잘 지내니? 우리 사이를 다시 어떻게 해보려는 의도로 편지를 하는 것은 아니야. 그냥 네가 잘 있는지 궁금해서. 나는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지금은 유럽을 떠돌고 있어. 그렇게 급히 사라져서 미안해. 나도 널 좋아했어. 하지만 겁이 났어…”


나중의 일이지만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연락처인 그의 이메일은 사용 중이 아니었고 이름으로 페이스북을 들어가 보니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연애 중에 있더라. 그래서 결국 이 편지는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

버스에서 내렸는데 언더그라운드 역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당황했다. 걸어 다니며 역을 찾기에는 솔직히 다리가 너무 아팠다. 나를 데려다준 버스 기사에게 묻고자 해도 그는 누군가와 긴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침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성에게 "혹시 언더그라운드 어떻게 가는 줄 알아?"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도 너처럼 여행객이야! 나는 체코 사람인데 나도 언더그라운드를 찾고 있어. 일단 이 담배를 다 태우고 나와 함께 찾아보자”라고 했다. 피곤한 데다 조급증까지 도져 얼른 언더그라운드에 몸을 싣고 싶은 가운데 천하태평한 그의 대답... 마침 버스 드라이버가 전화를 마친 것이 보여 그에게 다시 걸어갔다.


언더그라운드의 위치를 묻자 드라이버는 연신 손가락질을 하며 “저기, 저기잖아. 안 보여? 안보 일수가 없어! It can't be unseen!”하면서 열심히 설명해줬다.


다시 체코남에게 다가가 "저쪽이 언더그라운드래! 보이진 않지만..."이라고 하자 그는 “오케이 이거 다 피우면 같이 가자”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그는 체코에서 온 안드레이, 나는 한국에서 온 여느.

안드레이와 조금 걸어서 보니 정말 버스 드라이버가 말했던 것처럼 언더그라운드가 있었다.


안드레이는 노선을 확인하겠다고 이것저것 봤다. 빅토리아로 가는 그는 예전에 빅토리아에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10년 전에. 그때는 영어를 잘했는데 지금은 못한다고 했다. 사실 안드레이와의 의사소통은 좀 힘들긴 했다. 쏘리!





영국 언더그라운드에는 에스컬레이터도, 엘리베이터도 열악하다. 온통 계단인 이곳에서 안드레이는 흔쾌히 나의 9.8kg짜리 캐리어도 들어주었다.


체코에서 금형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는 안드레이는 뉴질랜드, 호주 등지를 여행했다고 했다. 오늘은 브라질로 휴가를 다녀왔다가 빅토리아에 살고 있는 옛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다 좋고 즐거운데 모아 둔 돈은 없어서 그게 걱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체코에 동유럽 사람들이 많이 와서 3D 직종에서 일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나마 일자리라도 구할 수 있는 체코가 나은 편이라고 덧붙이며.




사실 많은 동유럽 사람들이 유럽 각지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머문 런던의 호텔 주방과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전부 동유럽계로 보였다. 수다스러운 동유럽계 아줌마는 연신 내 테이블에 와서 "커피 더 줄까?" "토스트 더 줄까?" 하며 밝은 미소를 보냈다.


런던 호텔에서 조식으로 먹은 그 유명한 잉글리쉬 브랙퍼스트


한국도 요즘 주방 같은 곳에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일하고 있지 않은가. 소련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동유럽은 여전한 빈곤을 겪고 있다.




안드레이는 런던에 다시 와서 살까 했지만 집값이며 생활물가와 자신이 벌 수 있는 돈이 맞지 않다고 혀를 내둘렀다. 정말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런던 역시 몇 년 전 전 세계 부동산 거품 1위 도시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지루한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신의 생각도 공유해주고 무거운 내 짐도 흔쾌히 들어준 고마운 체코 남자 안드레이. 즐겁게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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