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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 Oct 10. 2023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사랑방 선물 사탕은 아니지만

질문을 읽고 한참을 생각했다. 이번주 에세이 주제가 '사랑방 선물 사탕'이다. 사랑방 선물 사탕이 뭐지? 하고 네이버에서 검색했더니, 100원짜리 크기만 한 사탕이 원통에 담긴 사진이 보였다. 어릴 때 과자 선물 세트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형형색색의 사탕을 말하는 건가. 그렇군. 그런데 그게 왜?

글을 더 읽어보니 '예기치 못했던 소소한 행복과 은은하게 퍼지던 달콤함'에 대해 쓰는 게 이번 에세이의 미션이었다. '내 돈 주고 사지 않지만, 선물을 받으면 무척 기뻐지는 물건, 필요는 없었지만, 인스타그램 광고에서 마주치면 금세 솔깃해지는 것들, 버킷리스트에 오를 정도는 아니지만 친구가 떠밀어 주면 못 이긴 척 시도하고 싶은 운동'이라는 예시를 읽으니 더 미궁 속에 빠졌다. '예기치 않은'이라는 형용사에 집중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그만둘까. 그렇다고 다른 에세이 주제인 나를 아프게 한 사회적 사건이나, 내 마음의 수챗구멍이나, 첫 키스 이야기를 쓸 수도 없고. 글감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머리를 굴리다 AI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chatGPT에게 물었다.     


질문

예기치 못했던 작고 소소한 행복의 예시를 알려줘.     


chatGPT

물론입니다! 예기치 못한 작고 소소한 행복의 예시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더니 기분 좋은 햇살이 내려와 있는 것을 보는 순간

· 길가에서 귀여운 강아지를 만나서 조금 놀아줄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

· 새로운 음악을 듣고 그것에 대해 마음속에서 감탄하며 일상에 즐거움을 더하는 순간

· 친구가 예상치 못한 선물이나 작은 서비스로 나를 놀라게 해주는 경우

· 바람이 부는 날, 가볍게 얼굴에 닿는 바람으로 상쾌함을 느끼는 순간

· 집에서 차려 먹은 맛있는 식사로 인해 자신감과 만족감을 얻는 경우

· 책을 읽다가 재미있거나 감동적인 부분에서 웃음이 터지거나 눈물이 나오는 경험     


역시 AI야. 고개를 끄덕거리며 목록을 읽다 보니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나는 처음 이 말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 말로 이야기를 써보는 건 어떨까.     




9월 6일 (수)

· 집 밖을 나가자마자 깨달았다. 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침 공기다. 기분 좋게 피부에 달라붙는 서늘한 공기.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나 가을도 좋아하는구나. 이제까지 가을은 가장 멋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말은 취소다.

그나저나 나이가 들어서인지 모르겠는데, 계절을 느끼는 감각이 더 예민해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사계절을 모두 선명하게 보낼 수 있는 곳에 살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계절도 좋아하지만, 한두 계절만 가지고 한 해를 보내고 싶진 않다.


· 요즘 퇴근 후 지하철 한 정거장을 걸어간다. 그러면 등 뒤에 땀이 날 정도로 열이 오른다. 그 상태로 걷다 보면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나는데, 가끔 소설 쓸만한 소재도 떠오른다. 오늘은 두 개나 떠올랐다. 그래서 에버노트를 열어 기록했다. 운이 좋은 날이다.     


9월 7일 (목)

· 천안에 출장을 다녀왔다. 날은 찌는 듯 더웠는데, 대리점 근처에서 초계국숫집이 있었다. 얼음이 동동 떠 있어 시원했고, 하얀 닭의 속살은 부드러웠다. 부산 밀면의 식감 같기도 했던 두툼한 면이 좋았다. 늦여름 마지막 보양한 기분.


· 회의를 마치고 선배와 잠깐 천안 빵집에 들렀다. 검색으로 알게 된 명물 빵집으로 마침 대리점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였다. 3층짜리 건물의 문을 열자 따뜻한 버터 향이 났다. 밥을 먹어 배가 불렀는데도 나는 눈이 뒤집혀 집게를 들었다.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빵이 많았다. 마늘 바게트, 거북이 빵, 샌드위치, 크로플 누룽지, 명란 모닝빵을 주워 담았다. 결국 출장비만큼 빵값이 나왔지만, 아침에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9월 8일 (금)

· 이번 주에는 남편이 없어 계속 지하철로 출근했다. 이동 시간에 심심할까 봐 오랜만에 전자책 리더기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기종은 예스24의 크레마 사운드업이다. 하얗고, 가볍고, 양쪽 물리 버튼이 특징이다. 좌우 페이지를 넘기는 단순한 기능이지만, 버튼을 누를 때의 느낌이 무척 좋다. 사실 리디페이퍼라는 다른 리더기도 있다. 그게 더 성능도 좋고, 배터리도 오래가지만 이 리더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순전히 물리 버튼 때문이다. 또각거리는 버튼을 누르면 왜 기분이 좋을까. 에어캡과 비슷한 느낌인 걸까.

오랜만에 지하철에서 버튼을 톡톡 누르면서 전자책을 읽으니 좋았다. 그동안 종이책만 읽어서 이렇게 방치한 게 미안해질 정도로 편하다니.      



9월 9일(토)

· 아침에 글을 쓰고 나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거실로 가 냉장고를 열어 꽁꽁 얼려둔 명란 모닝빵을 꺼냈다.

발뮤다 토스터에 5cc 정도의 물을 넣은 뒤, 타이머를 돌렸다. 이윽고 향긋한 빵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접시를 꺼내 방울토마토를 몇 개 올려놓은 뒤, 데운 빵을 옆에 놓았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빵을 포크로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식감 안에 부드러운 빵의 속살과 짭조름한 명란 맛이 느껴졌다.


나 명란 빵을 좋아하는구나.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오빠는 내가 음식을 먹을 때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는데, 지금 내 표정은 어떨까. 빵 한입에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스스로를 단순하다고 생각하면서 금방 먹어 치웠다. 좋은 한 끼다.     


· 종로에서 소설 수업을 마치고, 예술의 전당에 갔다. 그리고 예술의 전당 분수대 앞에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안 보여"

"나 바로 분수대 앞이야."

저 멀리서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오빠가 보였다. 나는 손을 흔들며 오빠에게 달려가 꼭 안았다. 일주일 만이었다.


9월 10일 (일)

· 메모어라는 회고 모임에 가입해 첫 회고글을 옮겼다. 기존에 시도해 보는 방식이 아니었는데 막상 써보니 신났다. 슬랙이라는 공간에 올리자, 하나 해냈군 하는 성취감이 몰려왔다. 메모어라는 커뮤니티에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향상심이라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마음이 몰입을 불러오고, 몰입 자체가 인생의 큰 행복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아침의 시작이다.




   

요즘 내가 느낀 소확행은 이 정도다. 사소하다. 다만 억지로 적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작은 것에도 행복함을 잘 느끼는 성격이 되었으니까.

예전에 서울대학교 행복 연구센터에서 진행한 100일간의 행복 기록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100일 동안 매일 문항에 체크해, 자신의 상태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였는데, 100일 동안의 나의 행복 지수는 10점 만점에 8.81이었다. 참여한 1,713명의 평균이 6.4 임을 감안하면 행복도가 높은 편이다. 연구소에서 보내준 보고서의 살펴보면 나는 삶의 의미와, 일상 만족도 부분이 높았고, 스트레스 수준은 다른 항목에 비해 낮았다.

행복 연구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명확하고,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더 높은 수준의 행복을 경험한다'라고 한다. 공감한다. 평소에 일상에서도 크고 작은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일상에 음미할 수 있는 것들을 곰곰이 씹어본다.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그렇다. 마치 습관처럼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습관은 어떻게 가지게 된 걸까.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냥 맥주보다 격렬한 운동 뒤에 마시는 맥주는 더 맛있게 느끼는 것이 그런 이유이기 때문이다.


굳이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게 없더라도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은 느낄 수 있지 않은가? 하고 처음에는 의문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지난할 정도로 반복하고 있는 루틴 덕분에 이런 행복감을 얻고 있는 건 아닐까 자문해 본다. 나는 매일 하루의 규칙을 체크하고, 일주일을 돌아보면서 다음 주 계획을 쓴다.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 컨디션을 조절한다. 대부분의 일은 잘 거절한다. 나머지 순간은 그저, 그냥 그 순간의 행복에 집중한다.


그런 생활을 하는 나는 확실히 20대의 나보다 지금을 좋아한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20대보다 더 놀지도 않고, 더 반복된 일상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그렇다. 가끔 주변에서 '뭔 재미로 사느냐?',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라고 말을 듣기도 하지만 역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어쩌면 이렇게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한 뒤, 몇 가지 스스로 세운 규칙대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만의 규칙으로 세워진 안정감이 있기 때문에 소확행을 느끼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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