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언제인가? 묻는다면, 역시 겨울이다. 나는 겨울이 좋다. 태어난 계절도 아니고, 추위에 강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눈이 내리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창가 너머에 눈이 내리고 있다면, 외투를 주워 입고 혼자 나가 슬그머니 새하얀 눈에 발자국을 찍어놓는다. 유치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왜 눈을 좋아하는 걸까.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산에서 살면 겨울에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기 어렵다. 특히 내가 살던 영도는 다리 두 개로 육지가 연결된 섬이다. 아파트 창문 너머로 황금빛으로 물든 바다 위에 배가 떠다니는 걸 보는 게 일상일 정도로 바다와 가까웠다. 바닷바람에 머리가 쉽게 눅눅해졌고, 소금기를 머금은 공기를 자주 들이마셨다. 비와 안개는 익숙했지만, 눈이 내리는 풍경은 마치 다른 세계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만 이렇게 눈을 좋아하는가, 하면 그건 아닌 듯하다. 남동생도 눈을 좋아한다. 대학교 졸업식 때였다. 부모님과 남동생이 KTX를 타고 부산에서 올라오기로 했다. 일 때문에 바로 내려가야 해서 부모님은 학교에서 나와 만나기로 했었는데, 교정을 들어서자 멀리서 눈에 들어온 건 남동생이었다. 전날 서울에는 눈이 제법 내린 탓에 학교에 눈이 쌓여있었는데,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남동생은 캠퍼스 온 곳을 눈을 밟으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정신없다, 그만 뛰어라. 하고 결국 아빠가 결국 동생의 옷깃을 쥐고 다녔다. 그때 내 남동생을 처음 본 남편은 아직도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나만 이렇게 유난스럽게 겨울을 기대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부산에서 눈을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 방학 때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무도 없었다. 물을 마시려고 거실로 갔더니, 베란다 유리창 너머에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에서 눈송이가 마치 왈츠를 추듯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움직이었는데, 나는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마치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산에 눈이 오다니, 사막에서 꽃이 핀다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당장 두꺼운 코트 하나 걸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새하얀 눈송이가 하염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뒤집어 눈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눈 한 송이가 손바닥 가운데에 내려앉았고, 닿자마자 사르르 녹았다. 맨손으로 눈을 만지자 손이 얼얼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보이면 나는 슬리퍼로 발자국을 냈다. 내 발 크기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새겨졌고, 그 위로 눈송이가 다시 내려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발가락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참을 수 없어 양말을 신으러 집으로 돌아갔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밥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연락이었다.
엄마의 과일가게는 집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아마 과일 장사를 했다. 아빠는 농협 공판장의 중도매인이었는데 과일이나 채소를 경매로 구입해서 유통상인에게 파는 일을 했다. 경매 때문에 새벽 세 시만 되면 일을 하러 갔고, 오전에 돌아왔는데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백수처럼 여겨 불만이라고 했다. 아빠가 경매로 산 물건 중 일부를 엄마의 과일가게에 가져와 팔았다. 엄마의 장사 수완과 아빠의 품질 좋은 과일 덕분인지 단골이 많았다. 이사를 가서도 찾아오는 손님도 있었고, 자기 자식들이 명절에 올 때면, 꼭 이곳에서 과일을 사라고 당부하는 분들도 있었다.
가게의 메인 손님은 종교 행사를 위해 과일을 사러 온 종교단체였다. 절에서는 스님이,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성당에서는 신부님이 왔었다. 부적이 벽에 붙여진 가게에 신부 옷을 입은 신부님이 돌아다닐 때면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종교 단체 손님들은 같은 시간에 방문할 법도 한데 겹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중간에 이야기가 셌다. 다시 돌아가서, 그날은 눈이 많이 내린 탓인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엄마와 여동생은 가게 안에 있는 난로에 손을 쬐고 있었다. 나는 동생과 가게 앞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을 꾹꾹 뭉친 다음 바닥에서 돌돌 굴렸다. 눈사람이 커지자, 동생이 만든 눈덩이 위로 올렸다.
"엄마 당근!"
나는 엄마에게 외쳤다. 엄마는 박스에서 당근 하나를 집어 부엌 안으로 들고 갔다. 깨끗하게 씻은 사각형의 당근을 들고 와 나에게 건네주었다. 건네받은 당근으로 눈사람의 눈, 코, 입을 만들었다. 나무젓가락을 가져와 손을 만들었다. 인생 첫 눈사람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동생이 또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냐고 묻자, 그녀가 말했다.
"얘는 우리 동생"
여동생은 앞치마 위로 배가 불룩한 엄마의 배를 가리켰다.
"그럼 큰 건?"
"그건 나"
나는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뚝 부러뜨려 동생이 만든 눈사람에도 손을 만들어 주었다.
언 손을 녹이려 난로 위에 나와 동생은 앉았다. 엄마는 검은 봉지에 담긴 떡국떡을 한 움큼 꺼내어 난로 위에 놓인 호일 위에 올렸다. 떡 한쪽이 크게 부풀어 오르면 뒤집었는데 그러면 금방 부푼 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몇 번 뒤집으면 노릇해졌다. 나는 난로에 손을 쬐며 가게 밖에서 내리는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눈송이는 더 굵어졌고, 뉴스에서는 앵커가 49년 만에 부산에 폭설이 내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화면에는 꽉 막힌 도로에 차가 움직이질 않는 화면을 보였다. 나는 구운 떡을 다 입에 집어넣고 나서야 아직 아빠가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점심 먹기 전에는 항상 아빠가 있었는데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묻자, 엄마가 대답했다.
"글쎄 조금 늦는 것 같네"
오후가 되자 눈이 그쳤고, 아빠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의 점퍼 위에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겉옷에 쌓인 눈을 모조리 털어내고 나서야 긴 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퇴근하고 중간쯤 갔을 때 엑셀을 밟아도 바퀴가 헛돌았다고 했다. 부산은 여간해서 눈이 내리지 않으므로 제설 장비도 충분치 않았고, 스노체인을 파는 가게조차 없으니, 결국은 모든 차가 길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 사람이 차를 두고 도로를 걸어서 빠져나갔다는 게 아빠의 말이었다. 아빠는 늦은 점심을 먹고 집으로 아파트에 갔고, 나와 여동생 엄마만이 가게에 남았다.
저녁 8시가 되고 가게 문을 닫기로 했다. 폭설 때문에 평소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갈 순 없어 아파트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빙판길이라 임신 중인 엄마는 위험할 수도 있었으므로 이웃에게서 징이 박힌 축구화를 빌려 신었다.
우리들은 어둑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가서 길이 미끄럽지 않은지 확인했고, 여동생은 엄마의 손을 잡고 걸었다. 사람이 밟고 지나가지 않은 눈이 보이면 푹푹 발로 밟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아파트로 가려면 언덕길을 제법 올라야 했는데,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언덕길이 보였고 우리는 멈춰 섰다. 언덕 양쪽의 환한 가로등 아래로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작은 미니 썰매장 같았다. 언덕길 안쪽 구석에 비닐 쌀 포대가 버려져 있었는데, 엄마가 물었다.
"눈썰매타기 딱 좋은 곳이네. 타고 갈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대는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동생과 번갈아 타기로 했다. 나는 쌀 포대를 한 손에 쥐고 언덕 위로 끝까지 뛰어 올라갔다. 비닐 포대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앉았다. 포대의 끝부분을 들어 앞쪽으로 상체를 천천히 구부리자, 포대는 눈에 미끄러져 빠르게 내려갔다. 찬 바람이 얼굴에 부딪혔고, 눈 깜짝할 새에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동생은 나도나도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엄마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고무대야를 들고 와 동생에게 주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위에서, 아래로, 또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어둑한 밤이 낯처럼 환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엄마의 불룩한 배를 보았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타 탔어 엄마. 이제 그만 가자"
나는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차가운 내 손과 달리 엄마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나는 엄마의 배를 보았다. 거기에는 작은 생명이 있었고, 곧 태어날 것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 아이는 눈을 좋아할까.
2주 뒤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나와 같이 눈을 좋아하는 동생이.
아린 추위 때문에 방 안에서 꼼짝도 못 하는 겨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을 좋아한다. 여전히 기대하고 설레는 건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