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영도2
부모님의 아파트에는 살림살이가 거의 없었다. 거실에 소파도 없고, 방에 침대도 없다. 주방에는 밥솥과 네 벌의 그릇과 냄비, 숟가락, 젓가락이 다였고, 드레스룸은 휑했다. 오랫동안 나주로 귀농했다가 이제 막 부산 아파트로 돌아온 참이라 그런가 했더니, 더 이상 집에 많은 물건을 들이는 게 싫어서 안 들고 왔다고 하셨다.
그런 부모님이었지만 작은 방에 놓여 있던 것이 있었다. 우리 남매의 어린 시절 앨범이었다. 한때 유행했던 캐릭터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앨범들은 겉이 해져 있었지만, 코팅지 안에 붙어 있는 사진만큼은 세월을 잘 버티고 있어 보였다.
동생들의 어린 시절 앨범을 펼쳐보다, 주황색 앨범을 꺼냈다. 목도 못 가눌 시절에 누워 있는 나의 신생아 시절부터, 바닥에 앉아 얼굴만 한 토마토를 들고 있는 내가 보였다. 어딘지 모를 동네에서 연두색 풍선을 들고 웃고 있기도 하고, 아빠와 오리배를 타고 있기도 했다. 유치원에서 간호사 복장으로 병원 놀이를 한 사진, 생일상 뒤에서 다른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한 사진, 얼굴에 페인트칠을 한 채 인디언 분장을 한 사진도 여러 장 보였다. 앨범 사이사이에는 오래된 500원짜리 지폐, 만원권이 있었는데, 엄마는 나중에 너희들에게 보여주려고 붙여 놓았다고 하셨다.
엄마는 몇 장의 사진을 가리키며 도아가 꼭 너를 닮았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표정이랄까, 분위기가 닮아 보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오랜만에 본 어린 시절의 내가 귀엽게 보였다. 엄마에게 “나 어렸을 때 도아만큼 귀여웠어?”라고 물었더니, “말도 못 하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아를 낳기 전만 해도 내 어린 시절 사진을 봐도 감흥이 없었는데,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다니. 솔직히 말하면 예전에는 어린 시절 내 자신을 한 번도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저 내 얼굴이었으니까. 그러나 도아의 얼굴이 내게 비쳐 보이니 다르게 느껴졌다. 조그만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는데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달까. 그때 부모님에게는 내가 도아를 생각하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 이렇게 부모님의 마음을 하나둘 알아간다.
도아는 아직 앨범이 없다. 대부분 사진이 아닌 동영상이고, 워낙 많기도 많아 아직 정리할 엄두도 나지 않아서다. 하지만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언젠가 이렇게 도아와 내가 나이가 들고, 커서 앨범 한 장씩 넘기며 이때는 이랬구나 하며 추억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질까. 그리고 내 어릴적 앨범도 도아에게 보여주고 싶다. 자신과 닮은 엄마의 얼굴을 보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바래지지 않는 깨끗한 디지털 파일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세상이지만, 빛바랜 앨범을 넘겨보며 세월과 같이 그 시절을 느끼는 맛을 도아에게도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