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붙이는 집
집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이 오래된 기억의 먼지를 털어냈다. 눈부시도록 하얀 수건들이 빨랫줄에서 바람에 흔들린다. 수돗가 옆 작은 뜰에는 작약이 붉게 피어 있다. 앵두는 분홍빛을 띠며 탐스럽게 영글어가고, 호두나무 여린 잎들 사이로 오월의 햇살이 연둣빛으로 일렁인다. 미진 작가의『집이라는 그리운 말』을 읽으며 나는 아늑했던 어린 시절의 한복판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지금의 집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흙이 깔려 있던 마당은 회색빛 시멘트로 덮였고, 작약밭이 있던 한편에는 창고가 들어섰다. 마당을 포장한다고 했을 때 내가 제일 좋아했다. 비만 오면 질퍽해지는 마당이 싫었다. 부모님은 시멘트 마당이 되면 깔끔하겠지만 여름엔 더 덥다고 염려했다. 시멘트를 깔며 작약밭은 사라졌고, 앵두나무도 베어냈다. 그렇게 없어진 풍경이 이제 와 아리게 그립다.
『집이라는 그리운 말』에는 미진 작가가 지나온 시간 속 ‘집’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꺼내어 보여준다. 만리동 꼭대기 슬레이트집, 아현동 연립주택, 초콜릿색 대문과 마당이 있는 봉천동 집. 그 집들은 늘 사람을 품고 있었고 그 중심엔 엄마가 있었다. 닦고 쓸며 잠시도 몸을 쉬지 않고 집 안 곳곳을 반짝이게 만들던 엄마의 손길을 작가는 깊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리움이란 어쩌면 가장 빛났던 시간을 되돌아보는 마음의 모양일 것이다. 온기와 사랑이 넘쳤던 시절의 집들은 마치 밤에 켜놓은 스탠드 조명처럼 잔잔하게 빛났고, 나는 그 빛을 따라 작가의 기억 속을 서성였다. 때론 웃으며 때로는 눈물 흘리며 작가의 마음에 고요히 동화되었다.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집'은 단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향하는 곳이 아닐까. 외형이 아닌 그 안을 채운 사람들의 온기와 숨결을 소중히 품은 장소.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을 붙이는 곳이라는 것을.
"시간도 얼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장 좋았던 순간을 꽁꽁 얼릴 수 있다면, 그래서 내 마음이 허락할 때 녹여서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과거는 과거가 아닌 게 될까.
내게 단 한 번 시간을 얼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엄마의 손길을 얼리고 싶다. 그리고 아주 힘든 어느 날 따뜻한 햇볕에 녹여 만지고 싶다." (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