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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Jan 21. 2016

옥상이 생겼다.

옥상이 좋아 이사를 선택한 수만 가지 이유

   이번 겨울에 이사를 했다.

   그러면서 10년 만에 옥상이 생겼다. 고향을 떠나온 지 만으로 딱 10년이 되었는데 고향을 떠나온 뒤로 한 번도 옥상이 있는 집에서 산 적이 없었다. 직장 기숙사는 아파트였고, 친구 셋이서 함께 살았던 자취집은 다세대 주택 1층이었으며, 결혼을 하여 차린 신혼집도 지붕이 달린 빌라 건물의 2층이었다. 옥상에 올라가길 좋아했던 내가 옥상이 있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옥상에 대한 추억은 특별할 것 없이도 그저 강렬하다.

   고향집에 살 때 엄마가 옥상에 가서 빨래를 걷어 오라면 그만큼 귀찮은 게 없었지만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까슬까슬 말라 있는 빨래를 한 아름 품에 안았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냄새, 알록달록 널려있는 옆 건물네 빨랫줄, 고슬고슬 잘 말라가고 있는 아래층 할머니네 빨간 고추와 표고버섯, 저 멀리 골목 끝까지 보이는 길쭉한 동네 풍경들이 생각난다. 형형색색 뽐내던 빨래집게는 세월이 흐를수록 색이 바래져 그러데이션을 이루고, 개미허리를 꿈꾸며 야심 차게 사놨던 훌라후프도 여려 차례 빗물에 씻기고 태양에 주물러져 한 낯 플라스틱 링으로 변해가는 옥상이었지만, 그곳에서 바라봤던 풍경들과 감정들은 내 마음에 선명한 원색들로 자리 잡아 그토록 정겹고 아련할 수 있는지 말이다.


빨래 집게 (2006, 부산)






    이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다.

   기존에 살던 집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 두개 호선이 지나가고 버스 노선도 많아 훌륭한 초역세권이었다. 집에서 횡단보도만 건너면 대형 마트에 식당가가 자리하고 있어 우리 집의 엥겔 지수(Engel's coefficient)를 한없이 드높여 주었고(더불어 외식에 길들여진 나의 요리실력은 한없이 추락했고), 집 주변은 카페도 많아 골목마다 잔잔한 음악과 사람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오고, 넘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영화관이 있어 영화 시작 5분 전에 집에서 나서는 여유로움을 만끽했었다. 그뿐인가 헬스, 필라테스, 요가, 스포츠댄스 등 눈만 돌리면 각종 운동센터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길 건너엔 경찰서까지 버티고 서 있어 늦은 귀가에도 온 동네가 아늑한 불빛으로 맞이해주니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말하자면 여긴 '젋은이'인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유토피아였다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서울살이 전세난민인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건물주의 전세금 조건을 맞춰주는 수밖에. 이 집 저 집 이사 다니느니 허리가 휘더라도 내 사랑 유토피아 동네를 위해 그냥 2년마다 전세금을 꼬박꼬박 올려주며 6년을 그 집에서 살았더랬는데 이번에도 그 타이밍이 찾아온 것이다. 그 동네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렇게나 내게 편리함을 주는 동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노라 다짐을 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 한편에선 소심하게 움츠러들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더 나은 조건'의 집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철없지만 재미 삼아 다른 집을 알아보러 다녔는데 별안간 이 집을 알게 된 것이다. 사건이었다.


   예전 집과 비교하면 정말 속이 답답하다.

   지하철 역에서는 한참을 걸어서 올라와야 하고 언덕을 올라야 해서 다리가 아프다. 늦은 밤 골목길은 어두컴컴하고 조용하다. 골목마다 주차난으로 말미암아 저녁엔 틈새 불법주차를 해 놓는 바람에 운전을 해서 골목을 지나갈 땐 묘기를 부려야 한다. 낮엔 건물 양 사방에서 공사하는 소리로 나의 일상에 반갑지 않은 배경음이 깔려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려고 슈퍼에 가기 위해선 아랫 골목으로 경사진 길을 한참 내려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5층 건물에서 우리 집은 5층이고 결정적으로 이 건물엔 엘리베이터가 없다. 맙소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옥상이 생겼다. 이리저리 경우를 따져봐도 꼭 이 집일 필요는 없었는데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떠돌아다닌 내 선택에 그저 옥상이 생긴다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버렸다. 나는 내 가족에게 '그 집으로의 이사'라는 어젠다를 놓고 '옥상이 있는 그 집'의 옥상 외 다른 여러 장점들을 부각하며 사기꾼의 입놀림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어필을 시작했다. 한 명뿐인 내 가족의 찬성으로 과반수 이상이 찬성을─만장일치라고 봐도 무관─하였으므로 결국 그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 평화적으로 의결되었다. 수만 가지 이유들이 내 발목을 붙잡고 이사를 못 가게 막았지만 옥상의 손짓 하나에 나는 홀려버렸고, 일련의 과대포장 과정을 거쳐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일은 벌어졌고, 어쩌겠나. 이후로 정말 많은 불편함을 발견하고 인내하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옥상 물탱크 (2006, 부산)






   옥상에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소복이 쌓인 낙엽들을 치우는 일이었다. 기분 같아선 운치 있게 쌓여있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운치 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는 어른들의 등짝 스매싱이 두려워 치우는 쪽을 선택했다. 바닥은 초록색이었다. 반질반질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한 것은 빨래 건조대를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올라가 옛 추억을 떠올리며 빨래를 널었다. 옷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탈탈 털어 한치의 흐트러짐도 양보하지 않고 각을 잡아 건조대에 반듯하게 널어놓았다. 최근 들어 가장 상쾌하고 설레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콧소리가 흥얼흥얼 흘러나오고 괜히 뒤를 한번 더 돌아보며 기분 좋게 집으로 내려왔다. 까슬까슬 말라가겠지. 아마도 그 바삭한 냄새가 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야. 하는 나의 로망은 반나절도 못 가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건조대는 바람을 끌어안고 한바탕 춤을 추다가 걸린 행색으로 구석 자리에 숨어 있었고, 공사현장과 도로에서 찾아든 검은 먼지들이 옷 사이사이에 촘촘하게 버무려져 있었다. 살뜰하게 달라붙은 먼지들을 보고 있으니 그것들이 내게 경종을 울린다. 꿈 깨라. 공기 좋고 햇볕이 잘 들던 달동네 너희 옛날 고향집 옥상을 생각했다간 큰 코 다친다고. 여긴 서울이란다. 알겠니?


   아뿔싸 싶고 꿈에서 갑자기 깬 듯 어리둥절 했지만 그래도 멈출 수는 없지.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옥상을 어떻게든 만끽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요즘엔 틈만 나면 옥상에 올라가 무엇이든 털고 있다. 무언가를 털기 위해 올라가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피부에 감각을 가만히 집중시켜 귀에 닿는 공기의 감촉과 머리카락의 흩날림으로 바람의 방향을 살핀다. 왼쪽에서 불어오는군. 그렇다면 왼쪽으로 등을 지고, 호흡기 건강을 최소한은 보호를 해줘야 하니까 일단은 숨을 참은 다음 손에 들고 나온 온갖 것들의 먼지를 격정적으로 털어낸다. 관성의 법칙에 농락당해 공중에서 등 떠밀려 떨어져 나간 먼지는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 어디론가 사라진다. 먼지를 떠나보낸 이들은 이런 것들이다. 첫 번째 주자인 이불은 내 짧은 팔로 땅에 끄이지 않도록 야무지게 움켜쥐고 머리가 울릴 만큼 흔들어 대며 한참을 털었다. 다음으로 베개는 몽둥이를 들고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고, 겨울 코트와 점퍼는 이불처럼 열심히 털다간 점퍼의 지퍼나 단추에 손이라도 맞으면 너무 아프니까 일단 얘네들도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있다. 이 밖에도 목도리, 방석, 심지어 가방까지 모조리 다 옥상으로 데리고 나와 흔들거나 때리며 속속들이 먼지를 털어버리고 있다.


   이것 보란 말이다.

   이 얼마나 상쾌한가.

   옥상이 있어서 얼마나 좋냔 말이다. 휴.


안테나 (2016, 서울)






   혼자 있는 낮에는 따뜻한 커피를 머그잔에 담아 손에 감싸 쥐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겨울이라 날씨가 차가워 손에 쥔 커피가 순식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변신을 해버렸다. 다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한다. 괜찮아, 내일은 텀블러에 담아오면 돼. 식은 커피에 상처받은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난간에 기대어 찬찬히 동네를 한번 살펴봤다. 카페도 없고, 경찰서도 없고, 상가도 없는 집들이 오밀조밀 붙어있는 그저 그런 주택가이다. 모두 출근을 했는지 불법주차는 자취를 감추고 골목은 넓어져 있었다. 골목을 지나다니는 몇 명을 제외하곤 정말 한적하고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간 내가 살던 지역에서 동네가 이렇게 조용한 모습을 본 적이 얼마만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소리에 집중을 해본다. 뚱땅거리며 뭔가를 두들기거나 드르륵 거리며 무엇인가를 뚫는 듯한 공사장 소리, 저기 멀리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골목에서 누군가가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뜯는 듯한 소리도 들리고, 저 아래 화단 사이로 바스락 거리며 숨어드는 고양이의 산책 소리가 들려온다. 앞 건물 빌라 지붕엔 환풍기인지 풍량계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동그랗게 솟아오른 철 뚜껑 같은 것이 프로펠러 모양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소리도 들려온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다 보니 그 순간만큼은 나도 어느새 고분고분하고 얌전해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거였다. 딱 이 느낌, 이것이었다는 생각에 괜히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웃 집 지붕 (2016, 서울)


   옥상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노라면 어쩐지 잠시 동안 시간이 멈추고 나 홀로 다른 차원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다. 세상과 분리되어 마치 영적인 세계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눈을 들어 바라보는 시선마다, 숨죽여 귀를 기울여 들려오는 소리마다, 가만히 차분하게 느껴보는 공기의 흐름과 질감마다 그 속에 혼자만 알 수 있는 선물이 숨겨져 있었다. 내게 선사하는 이 선물들은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그립게 하고 설레게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넓게 펼쳐진 스케치북에 제멋대로 배치된 조각구름도 떠 있고 저기 한쪽 구석엔 게으른 겨울 태양이 목을 못 가누고 졸며 서 있다. 가끔씩 기별하는 까만 점들도 무심하게 떠다니곤 하는데 저 점이 까마귀인지 비둘기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내심 까마귀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참 좋다. 이 밖에 어떤 표현을 더 할 수 있을까. 특별할 것 없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안정적이다.


   이사를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밤, 거한 만취 상태로 내 두 다리는 대각선의 행보를 걸으면서도 결코 나는 취하지 않았다고 당당히 선언하던 그 날 밤에 말이다. 인사불성 수준의 육신을 이끌고 겨우 집 앞에 도착하였을 때,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별들을 목격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 들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번 올려다보니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것이 분명 저것은 별이었다. 어머나, 별이다. 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감상하고 서 있지 못하고 집으로 향했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찾아온 궁금증이 이거였다. 안 취했다고 선언했지만 사실은 내가 취했던 거라 별을 보았다고 착각한 건지, 그게 아니라면 언제부터 거기서 반짝이고 있었는지, 이전부터 그래 왔었던 것이라면 나는 왜 이제껏 늦은 밤 낯선 골목에서 괴한이라도 튀어나올까 봐 경계만 했지 그토록 수수하고 단정하게 빛나고 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볼 생각은 못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옥상, 달과 별 (2016, 서울)

   그 날 밤에 나는 따끈한 홍차를 텀블러에 담아 들고선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모자까지 꽁꽁 싸맨 채 옥상으로 올라갔다. 누추하지만 어서 오세요.라고 반기듯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당황스러웠지만 스마트폰 날씨 정보를 들여다보니 '바람이 거셈'이라고 이미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찾아볼 필요도 없이 훤하게 나를 비추는 쪽으로 몸을 돌리니 거기에 어여쁜 둥근달이 있고, 그 아래 단정하게 빛나고 있는 별이 있었다. 지금 이 곳은 은은한 조명과 잔잔한 음악이 흘러 사람 살 맛 난다고 여겼던 카페 골목이 아니었다. 밤낮으로 오매불망 손님의 발걸음만 기다리는 24시 편의점의 간판도 아니었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내 그림자를 만들어 내면서도 그저 무뚝뚝하게 서 있던 가로등 불빛도 아니었다. 도시 빌딩 숲 상가의 간판들 사이에선 보이지 않던 별빛이 캄캄한 옥상 위에서 바라보니 누군가 어둠 속에 큐빅을 찔러 박은 듯 어쩜 그리도 반짝일 수 있는지 말이다. 텀블러 뚜껑을 열어 홍차를 한 모금 삼키고 하늘에 대고 '하-'하고 입김을 뱉어 본다. 어쩐지 내 입김에 촉촉이 젖은 저 큐빅을 옷소매로 슥삭슥삭 닦아줘야 할 것 같았다. 행복했다. 이대로 저 별빛들을 바라보며 달달한 꿈속으로 잠이 들고 싶었다. 그러기 전에 이미 내 코와 손가락이 거센 바람으로 감각이 없어져 가고 있어 황급히 집으로 내려오긴 했지만서도. 흠.


옥상, 밤 풍경 (2016, 서울)






   봄이 기다려진다. 아니 여름도, 아니 아니 가을도. 무지무지 기다려진다. 누군가가 내게 옥상이 그렇게 좋으면 텃밭을 한 번 가꾸어 보지 그러냐고 한마디 해줬지만. 아니오, 그 조언만 고맙게 받겠소. 나는 지금 옥상에 무언가 손대고 싶은 마음이 쌀 한 톨 만큼도 없다. 직장인 여성에게 텃밭을 가꾸는 취미란, 정말로 식물을 좋아하여 내 몸처럼 아끼고 돌봐주고 관심을 가져 줄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쉽사리 선택해서는 안 되는 활동이다. 더군다나 우리 집에만 들어왔다 하면 사람을 제외하고 식물, 금붕어 등 생명체란 생명체는 다 죽어서 나가는 판국에 텃밭이라니 안 될 말이다. 다만 조금 욕심을 내어 봤다면 옥상에 평상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하고 생각은 해봤다. 아니지, 먼지 쌓이고 빗물에 젖어있는 그 꼴을 보고 또 어찌 가만있을 수 있을까 싶어 그 아이디어는 그만두기로 한다. 평상을 만드는 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 테야. 그렇다면 돗자리가 어떨까. 너무 얇으면 딱딱하고 차가우니까 두꺼운 피크닉 매트가 좋겠다. 봄이 되면 노트북을 들고 그 위에 올라 가 글도 쓰고 노래도 들어야지. 독서등을 들고 올라가 책도 읽고 차도 마셔야지. 나는 이미 꿈에 부풀었고, 이 바닥에서 나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듯한 봉선화 같은 환상과 기대일지라도 옥상에서 꿈꿔보는 장면들이 나를 참 행복하게 만든다.


   이사를 했다. 이전 집에서 지하철 두 칸 옆으로.

   그리고 나에겐 옥상이 생겼다.


   이사하길 참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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