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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May 06. 2016

비, 흐리고 바람 부는 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요 며칠 내내 황사와 미세먼지에 꽃가루까지 트리플 액셀의 향연으로 나는 물론이고 내 주변 많은 사람들의 눈과 코는 무척 고생을 했더랬다. 자동차는 모래 바람을 뒤집어쓴냥 꾀죄죄하고, 어린아이들의 눈은 토마토 속살을 닮아 있고, 마주치는 사람들 마다 서로 인사말보다 연신 내뱉은 재채기와 기침으로 기별을 전하기 일쑤였다.


   초봄에 자주 불러대던 말, 꽃샘추위. 우리가 봄의 입구에서 이제 떠나야 하는 겨울이 어여쁜 봄을 시샘하여 주머니에 남은 한파를 톡 털어 사정없이 뿌리며 가는 모습을 보고 일컬었던 말이었다. 왕년의 눈꽃 여왕은 꽃봄에게 밀려 길게 걸친 망토를 질질 끌면서 돌아가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다소 지루한 퇴장이긴 했다. 그러면 황사와 꽃가루는 누구 소행일까.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에 왜 우리는 매번 줏대 없이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와 건넛마을 모래바람으로 이렇게나 고생을 해야 하냔 말이다. 곧 있으면 여름이라고 그럴 텐데 얼마 안 남은 봄의 풍경에 이 무슨 행패인가 싶은 마음이 들어 심기가 굉장히 언짢던 찰나, 일기예보에서 그러는 거다. 내일부터는 강풍을 동반한 세찬 빗줄기가 예상됩니다. 옳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비가 내린다


   어제부터 내린 세찬 빗줄기는 하늘과 땅 모든 지면의 주인공이 되어 집집마다의 지붕과 우산 위로 공평하게 물기가 뿌려졌다. 먼지로 뒤덮인 세상이 말끔하게 세탁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황사비라 어느 정도 감당해야 할 피해들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바싹 마른 학교 운동장엔 이리저리 얕은 도랑이 만들어져 그 위를 지나다니는 아이들의 발걸음에 첨벙첨벙 소리가 따라다녔다. 라디오에선 비와 관련된 사연과 노래가 흘러나오며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추억을 공유했고 더불어 친근하고 친절한 DJ는 곧 다가올 연휴엔 비가 그쳐야 한다며 한 마디씩 보태곤 했다. 비가 내리니 다들 반가운 듯 보였다. 나의 경우에도 평소 비 오는 날의 풍경과 분위기를 참 좋아하는데, 이번 비는 여러모로 즐거움을 안겨줬다. 며칠 전 나무 아래 주차를 한 날, 얄궂게도 새똥으로 앞유리와 옆 문이 범벅이 되었지만 시간이 없어 그 더러운 꼴을 보고도 인내하며 견뎌야만 했고, 이제나 저제나 이번 주말엔 꼭 세차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더랬는데 비가 내리니 세상에나 이건 뭐 자동 세차 기능이 있는 거다. 굵은 빗줄기에 연신 두들겨 맞아도 어쩜 그렇게 즐거운지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지붕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워 동네를 한 바퀴 더 돌았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언젠가 자동세차기를 이용하거나 또는 비가 엄청 퍼붓는 날 차를 세워놓고 잠시 빗속에 파묻힐 상황이 생길 때, 베토벤 월광 소나타 1악장과 3악장 연주를 볼륨을 크게 키워 들어 보길 적극 추천한다. 어딘가 독특하면서도 새로운 기쁨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 개인적 경험으론 자동세차기에 들어갔을 땐 월광 소나타 1악장이 사실 효과가 더 크긴 하다. 사정없이 비누거품을 투하한 뒤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세차 브러시가 격정적으로 앞유리를 휘감을 때, 차 안에서는 음악과 함께 중후하고도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지상으로 용해되며 숲길을 비추는 달빛을 느낄 수가 있다. 잠시 동안 나는 착각에 빠질 수 있고 심장은 두근거릴 것이다. 비는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하다. 유리에 부딪히는 빗방울은 흩어지기도 합쳐지기도 하면서 줄기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폭포수가 되었다가 하며 내 공간의 포근함을 극대화시켜준다. 그와 동시에 세상의 모든 소리까지 다 먹어 삼켜 우리 모두가 같은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 수 있게 해준다. 자동차 안에선 푸둑두둑둑, 우리 집 창가에선 차닥탁타닥으로 시작하던 소리가 저녁밥을 먹고 나오자 츄와아아아-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듣기 좋았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희소식이 소리를 가졌다면 그건 아마도 빗소리일 게야.


월광 소나타 1악장 듣기 (출처: YouTube)
저와 함께 들으실 분은 제목을 눌러 보세요.
월광 소나타 3악장 듣기 (출처: YouTube)




비개임 (2014)


   낮까지 쏟아붓던 비가 서서히 그쳐 간다. 사람들의 손엔 아직도 우산이 하나씩 들려있고 그걸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비 내리는 일상을 능숙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맨몸으로 그 사이를 걸어 다니는 동안 티셔츠가 젖기는 했어도 굳이 우산을 쓰고 싶진 않을 만큼 빗줄기는 가늘어졌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마무리 지으려는 듯 가늘어지자 괜히 아쉽다는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내려준다면 해가 구름 뒤로 숨어들어 어둑어둑한 오후 4시쯤 흘러간 발라드를 들으며 거실에 배를 깔고 엎드려 바삭한 과자를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소설책이나 읽으면서 말이다. 그러면 참 한가롭고 행복할 테야.


비가 개어가는 하늘, 이 하늘을 참 좋아한다. 잔뜩 흐려있지만 이제 곧 해가 나타날 테니까 더욱 매력적이다. 흐린 하늘은 대부분 회색이 되어 있다. 그러나 흐린 하늘을 관심 있게 본 사람이라면 흐린 하늘만큼이나 색채가 멋진 것이 흔치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먹구름을 좋아하는 내 휴대폰의 사진첩엔 정말 많은 하늘 사진이 있다. 가만 보면 가까이 있는 먹구름은 엷은 남색을 띤다.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 있는 먹구름은 회색이고, 태양을 등으로 가린 먹구름은 갈색과 황금색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 색들의 조화는 참으로 고상하다. 어찌 보면 결혼식장 양가 어머니 화촉 점화식 할 때 즐겨 입는 치마 색깔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새벽에 일어나서 바라보는 바다의 빛깔을 닮아 있기도 하여 우아하기까지 하다.


비 개인 하늘 (2015)




흐리고 바람이 분다


   강풍이 분다고 예고를 하더니 진짜 세긴 센가 보다. 비행기가 뜨네 마네, 비닐하우스가 벗겨졌네 어쨌네 하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려오고, 재난안전 관련 어플에 소식받기 등록을 해놨더니 시간마다 부지런히 내게 부디 조심하라는 뜻으로 경고 쪽지를 찔러준다. 날씨 어플에도 내가 좋아하는 표현이 또 등장했다. 바람이 거셈. 찔금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우우웅- 하며 능글맞은 소리로 바람이 끼어든다. 활짝 열었더니 와락 달려들어 얌전히 잘 있던 내 머리칼을 빗어준다. 에어컨 광고에 등장하는 단아하고 머릿결 고운 소녀의 모습처럼 예쁘게 보였으면 좋으련만 찡그린 표정과 헝클어진 파마머리 덕분에 순식간에 못생겨진 것은—원래는 분명 난 미인이지만—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헴.


   이렇게나 흐린 하늘에 바람까지 분다는 건 내게 정말 행복한 상황이다. 바람이 분다는 걸 촉각이 아닌 시각으로 느끼게 되는 순간 행복감은 더욱 강렬 해진다. 건물에 길게 매달린 현수막은 바람에 나팔거리며 큰 소리로 건물 벽을 찰싹찰싹 때리고, 저 멀리 허여멀건 비행체는 새 인가 풍선인가 싶어 눈여겨보면 연약하기 그지없는 비닐봉지가 공기 덩어리들 사이에서 마치 수면 아래 해파리처럼 이리저리 유영을 하고 있는 장면, 이런 것들 말이다. 나도 모르게 눈이 고정되는 장면들이다.



엄마,
바람이 부니까
나무들이 쎄쎄쎄를 해요.



   어린 마음에 순수하게 바라 본 나의 시각엔 그랬을 것이다. 이런 말을 했을 때 엄마가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나서 살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자주 나무를 바라보곤 했다. 바람 부는 날 나무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인다. 나무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같이 즐거워진다. 머리칼을 이리저리 휘날리며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도 보이고, 아장아장 걸음마하는 아가의 달랑달랑 꼭지 머리도 보인다. 가끔은 고속버스 디스코 삼매경에 빠진 아주머니의 갈 곳 잃은 두 팔도 보이고, 팔 하니까 88올림픽 공식 주제가 '손에 손잡고'를 함께 불러야 할 것 같은 팔 동작도 보인다. 정열적인 기타리스트의 헤드뱅잉 같기도, 찰랑찰랑 허리춤을 털어대는 밸리댄서 의상에 반짝이는 수술 같기도 하다.


구름과 빛 (2015)


네 눈에나 즐겁겠지.

네 마음이 즐거우니까 나무도 즐거워 보이는 거야.


우리 친구가 언젠가 내게 지나가며 했던 말이다. 그랬다. 모든 이에게 흐리고 바람 부는 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즐거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보다는 어렸던 어느 젊은 날 병원에서 만났던 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또 옆길로 새는 이야기지만 내 나무 이야기에서 아저씨의 대사가 빠질 순 없다.


- OO님, 저것 좀 보세요. 바람이 부니까 나무들이 춤을 추네요.


- 네.. 나무들은 춤을 추지만 먹이 찾아 떠나간 어미새는 둥지가 걱정되어 곧 돌아올 겁니다.


   슬픈 눈으로 나무만 보고 있었다.

   학생 때 여러 과목별로 실습을 나가는데, '정신건강 간호학'이라는 과목의 실습을 위하여 어느 정신과 전문 병원으로 몇 주간 실습을 간 적 있다. 한적한 외곽에 위치한 병원은 시골 같은 비포장 길을 걷다가 공원처럼 잘 꾸며진 언덕을 오르면 동그랗게 감싸안는 산의 품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 눈엔 산도 화단도 모이를 쪼아 먹는 비둘기도 모두가 평화로워 보이는, 낯설기는 해도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응당 이 정도 자연경관은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그런 곳이었다. 여하튼 그곳에서 만난 정말 많은 환자들의 사연은 공부하는 학생인 나의 수준에선 참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한편으론 무슨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희한한 이야기도 있어 어린 마음에 재미있기도 하였던 기억이 난다. 물론, 대화를 하면 할수록 나 같은 애송이 학생은 페이스를 잃고 환자분의 언변에 완전히 휘말려 들어갔었다는 점을 고백해본다. 그중 진하게 기억되는 이 아저씨 환자는 나만 보면 같이 탁구를 치자고 하거나─정말 탁구를 발로 쳐도 너보다는 잘해라는 말을 들어왔던 내가 약 기운으로 행동이 무척 느린 그 환자에게 매번 패배하곤 했었으니 나는 정말 탁구를 치면 안 되는 아이인가 보다 싶었고─ 창문으로 데려가 대화를 나누자고 하곤 했었다. 그때 대책 없이 긍정적이었던 촐랑촐랑한 내 눈엔 저 나무가 춤을 추듯 움직였지만, 분명 같은 공간에서 같은 장면을 보면서 둥지가 걱정대는 한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그날 아저씨의 그 말을 곱게 접어서 마음속 깊숙한 사물함에 넣어 두었다.


나무는 춤을 추지만
어미새는 둥지가 걱정 되겠죠.







   어쨌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여하튼 나는 비 내리고 흐리고 바람 부는 날이 무척 좋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날씨가 사람의 감정에 참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말이다. 최근 몇 날 며칠을 미간에 주름이 잡힌 채로 살아야만 했다. 직장에서는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벌려놓은 일은 많고 욕심만 냈지 다 해결할 역량은 부족하니 다소 예민하고 몸은 시들어 건조하고 머리는 무거웠다. 그러다 비가 온 거다. 그리고 흐린 하늘이 지긋이 나를 바라본다. 바람은 나무를 통해 내게 손을 흔들며 요기 좀 봐라, 어떠냐 기분 좋으냐. 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와 풍경, 그리고 그 풍경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추억, 나의 감성, 나의 이야기가 스며들며 기분이 좋아졌다. 어쩐지 무언가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우리 집 TV 뒤에 뒤엉켜 있던 전선을 정리하듯 모든 짜증이 한순간 정리되었다. 맑고 쾌청한 날도, 쨍하고 무더운 날도 그 날마다의 즐거움이 있겠지만 비 내리고 흐리고 바람 부는 날 나무는 여전히 춤을 춘다고 여기는 내게 찾아온 이 즐거움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사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글로 남겼다.



아래의 동영상은 글에 같이 실으려고 급하게 찍어

스마트폰의 어떤 어플을 이용해 엮은 것입니다.

어설프지만 음악에 맞춰 춤추는 나무들을 함께 보아요.

어플의 특성 상 35초 밖에 편집이 안되네요.

배경음악은 DJ soulscapeHe and Sh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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