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상인 Oct 11. 2015

여수 아침바다는 아름답다

여수와 기대치와 호들갑에 관한 사항


간밤엔 실망이 컸다.


  내 실망의 길 대장정을 말하자면 이런거다.
여수로 여행을 가기로 마음 먹은 순간부터 내 음악 플레이리스트엔 장범준이가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고 교회오빠 목소리로 끝도 없이 외치는 '여수 밤바다'라는 곡이 추가 되었고, 난 매일 이 노랠 들으며 여수여행 디데이를 손꼽아 기다렸으며, 장범준이 이노무 자식 목소리에 그만 꼬여서 어쩐지 누가 여수 밤바다 물가에 데려가서 나랑 오늘밤 같이 도망치자고 꼬득이면 난 분위기에 취해 홀딱 넘어갈 것 같은 기분으로 여수여행에 대한 남다른 판타지와 애티튜드를 지니고 기다렸다.

  고난과 역경은 내 기대치에 비하면 아주 하찮았다.
서울-여수 360.4km라는 장거리를 운전해서 가겠다는 무모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일요일 부산에 결혼식이 있어 부산에 들려야 해서 정장이다 구두다 바리바리 싸들고 내려가야 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가뜩이나 연휴라 온세상 사람들이 모두 도로 위에 나왔는지 소요시간은 무려 9시간이나 걸렸고! 갈대밭 쓰나미로 낭만이 뚝뚝 흐르는 순천만과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동백꽃이 흐드러질 겨울에 가면 더 좋겠다고 생각한 오동도에 가서도 여수 밤바다를 위해 감격적 리액션을 최소한으로 아끼며 난 그렇게 여수의 밤이 오길 기다렸던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이었다. 여수밤바다는 부산이 고향인 내 기준에선 해운대, 광안리, 태종대, 송도의 풍경에 비하자니 이건 칠흑같은 어둠처럼 매우 매우 매우 깜깜했고, 아주 멀리 보이는 가로등에 거기부터가 도로겠거니... 그러면 그 앞부터는 바다겠거니 하며 결국엔 내 환상과 망상이 기대하는 그 어떤 모습도 나타나진 않을 것이란걸 서서히 직감 하면서 졸지에 내 사고의 흐름은 ‘여수는 엑스포를 치른 지역이지만 아직도 이렇게나 밤풍경이 관광객의 기대치에 석연치 않으니 나라에서 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광객 유치를 위한 투자가 적극 이루어져야 한다’는 건설적인 생각에까지 나를 몰고 가게 만들었다. 낭만은 어디로 간 것인가. 우리의 아름다운 밤은 어디에 갔느냐 말이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싶다던 가수에게 물어본다. 뭐가 보여야 걸을 것 아니냐, 응?


  멍하게 서서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워보려 애썼다. 내가 지금 화가 난 것은 바다 때문인가,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떠나온 나를 견디기 힘들어서인가.


  그래도 역시 시각에 들어오는 정보가 없으면 청각을 곤두세우게 되어 있었다. 집중 또 집중.. 물결이 방파제에 밀려 와 부딪치고 부서지는 소리는 바다 위로 백열등을 켠 듯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고도 가깝게 들렸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 보았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하늘에 아무렇게나 뿌려져 있는 별이—그저 우주아래 미물 중 미물인 나는 별자리에 대한 식견이 개미눈물만큼도 없는 바람에 그냥 저건 흩뿌려졌다 표현하는 수밖에 없었지만—서울에선 도저히 볼 수 없는 진귀한 존재이기에 하늘에서 반짝이는 모레밭을 조용히 마주하고 섰다. 밤바다에 실망은 실망이지만 그래도 이순간 저 별을 보니 어이없게도 갑작스레 감성 망나니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그나마라도 반겨주는 별천지께 감사함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뭐 이렇게라도 감상에 젖은 나는 이 정도의 정취에서 만족을 해야 하는 것인가..이런! 결국 이 모든 허무함이란게 내가 만들어낸 환상과 과도한 기대치가 불러온 것이라니.. 마음이 따끔따끔한 것이 칠흑같은 저 어둠이 내게 이제 그만 호들갑은 좀 집어치우라고 따끔한 일침을 놓는 것 같기도 했다. 거참, 너무들 하시네! 좀 더 과장되게 표현해볼까? 실연 당한 기분이었다. 너를 보러 가는 길이야. 오늘 밤 너는 내게 고백을 하겠지? 정말 잊지 못할 설레는 밤이 될거야. 이건 비밀이지만, 난 너의 고백을 받아줄거야. 어때? 너도 떨리지? 하며 달려간 약속장소에 그새끼는 나오지도 않고 애먼 여자가 한 명 나와선 제가 그새끼 여자친구인데요, 오늘 못 나온다고 전해달라고 그러네요. 하면서 휙 가버리면 나는 거기에 대고 말하겠지. 야! 그자식도 원래 내 스타일 아니었거든?! 이러면서 처절하게 울어재끼는.. 뭐 그런 장면이랑 이 상황이랑 똑같다 이말이다. 에휴...지난 시간 출퇴근길에서부터 시작하여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조차도 나를 설레게 했던 건 여수밤바다에 대한 기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생각하니 허무하기 짝이 없고 끝끝내 ‘별 볼일 없는’ 여수 밤바다 풍경을 원망하며 별이나 한 번 더 쳐다보고선 한숨으로 잠이 들었다. 에휴, 잠들기 전 마지막 생각이 내 기대치에 대한 반성이라니 얼마나 슬프냔 말이다.




정확하게 오전 6시 40분,


   남자가 아침 댓바람부터  어제의 내 호들갑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커텐을 열어 젖히고 이불을 걷어 치우며 크게 박수를 짝짝짝 치면서 온갖 야단법석을 떨어대는 것이 아닌가. 부부가 된지 어언~ 6년이다. 잠든 나를 함부로 깨운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장을 내미는 것과 같다는 것을 남자가 모를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게 지금 당장 빨리 일어나 보라고 시끄럽게 깨웠다. 단잠에 방해를 받은 나는 우주에서 가장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온 얼굴에 등고선을 그리고 일어났고 세상 모든 신경질의 유형을 남자에게 선사함에도 부족하여 거기에 추운데 왜 함부로 이불을 걷냐며 버럭 화를 내기까지 했지만... 이내 남자가 내게서 겪은 방금 그 언어폭력의 수모를 즉각 사과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남자가 열어 젖힌 커텐 사이로 큰 창을 통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어제의 모든 고난과 역경과 시련과 설움과 허무함과 쓸쓸함을 모두 소용없게 만들 만큼의 격렬한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폭발시키고 있는 여수의..아침 바다였다. 두둥. 실연이 아니었다.



  일단 이 순간이 언제 또 올까싶어 당장에 카메라를 들고 테라스로 뛰쳐 나갔고, 카메라를 든 내 손은 바쁘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곳은 어제의 그 곳과 같은 곳이 맞는 것인가. 간밤에 이 남자가 날 어디로 옮겨 놓은 것인가. 하늘과 바다가 마치 방금 막 굳은 파라핀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비굴하게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셔터를 눌러대는 나에게 바다는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간밤에 나를 별 볼일 없는 비루한 바다라 능멸하였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거룩한 바다란다. 그 모습은 뭐랄까.. 어제의 내 마음에 대한 위로 같기도, 복수 같기도, 과시 같기도, 야단 같기도 하여 나는 아주 잠깐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을 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 나는 고백한다. 지금 본 저 바다의 모습은 그 어떤 풍경보다도 아름답다. 저 멀리 보이는 키 작은 섬들이 단정한 옷차림새로 아침을 마중 나와 있었고, 그 주변을 지키고 있는 어선들은 성실하고 충실한 병정이었다. 날개를 활짝 편 구름은 나와 함께 기지개를 펴 주었고, 따뜻한 색깔로 치장한 태양은 인자한 미소로 나를 품었다. 여수로 오길 잘 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될까, 내가 좀 더 잘 할게 내지는 너 되게 예뻐졌더라 같은 질척대는 멘트들이 나를 사로 잡았다. 비굴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사실 널 정말 사랑해.


   정말 우습게도 그 순간 10cm의 2집에 수록된 [Fine Thank You And You?] 라는 곡에서 “너의 얘길 들었어”로 시작하여 "우리 옛날에 사랑을 했다니 우스워."라는 가사가 스칠게 뭐람. 아까의 내 우주대폭발 심기불편감 체험은 짧게 마감되고 나는 오감의 촉을 있는 힘껏 끌어모아 시공간을 초월한 어떤 지점에 소중히 펼쳐놓고 이 순간을 느꼈다. 누군가에게서 위로 받는 기분은 아마도 아침 바다의 모습일가야.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크게 들이 마셔 보았다. 내 속에 있는 먹구름이 순식간에 희석되어 새하얀 한숨으로 빠져 나온다. 아침 바다에 현혹된 탓인가 내 안에서 까끌까끌한 무언가가 재채기처럼 후두둑 빠져나가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청량해진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을 서서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여기 공기는 내가 다 마셔버려야지..

  아름답다.
  그 이상의 완벽한 표현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여수는 비현실적 평화를 선사하는 갈대쓰나미의 순천만, 케이블카를 곁들인 쨍하고 해뜯날의 오동도, 그리고 숭고하게 바라보게 될 이 바다를 추천한다. 물론 장범준이가 노래하는 그 밤바다 말고 아침바다 말이다. 잘 빗겨지지 않는 내 머리칼처럼 삐그덕대던 요즘의 나는 한가득 생각을 안고 여행이라는 찬스를 써서 여수를 왔지만 실망의 한가운대에서 추락할 뻔한 것을 아침이 건져내어 모든 마음을 부드럽게 빗겨 주었고, 한가득 싣고 온 근심은 오늘 아침 별안간 절반을 도둑 맞았다. 기쁘다. 정말 잘 왔다. 잘 빗겨진 내 마음을 곱게 땋아 간직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각들에 씨앗을 뿌렸다. 이렇게 또 헝클어진 한순간을 떠나보내며 새 힘을 얻는 거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는구나. 거룩한 바다여, 감사합니다. 결심한다. 앞으로 나의 주변에 무언가 털어낼 것이 있는 사람은 나의 말을 믿고 일단 여수로 떠나라고 말해줄 것이다. 모든 호들갑도 무수한 실망도 비겁한 후회도 다 보듬어 준 오늘의 아침, 한동안 이 여운을 끌어안은 채 내일부터는 산뜻한 잡생각을 키워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황홀했던 나는 마침내 이 기분을 글로 남겼다.



오, 나의 아름다운 여수 아침 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가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