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상인 Jun 20. 2023

식물이 아직도 살아있다

꼬마가 식물을 돌보는 방법

  지난겨울, 화분이 거실로 들어왔다. 처음 있는 일이다.

  무슨 말이냐면 베란다 창가에 있던 화분들이 추위를 피해 거실로 들어온 것인데 우리 집에서 이제껏 화분이 생존을 위해 이동되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다소 생경한 풍경이었다. 우리 일곱 살 아들이 키우는 중이라 그러한데, 돌아서면 자라 있는 아들의 손톱처럼 우리 집 초록들도 까치발을 들어가며 잘 자라고 있다.


  이러다간 저들의 뿌리가 화분을 깨고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생기며 난생처음 스스로 분갈이도 해봤다. 분갈이를 잘못하면 죽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흙을 퍼담으며 그때는 슬며시 직감을 했다. 아, 이제는 죽겠구나. 미안하다 화분들아. 나는 진짜 이런 걸 잘 못해서 그래. 그런데 벌써 두 번째 분갈이를 할 타이밍이 오기까지 했다는 어마무시하게 무서운 이야기인데,  살면서 내 손으로 키운(처절하게 방치해 놓고 키웠다고 표현하기 민망하다만) 화분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희한하다.


  그동안 내손을 거쳐간 화분들의 처지를 표현하자면.. 우리 집은 거의 식물계의 아우슈비츠라고 해도 변명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많은 식물들이 바삭하게 마르거나 흥건하게 젖어 물러버리며 비참하게 죽어나갔다. 식물계의 아우슈비츠 만행을 저지르는 사람이라 이런 표현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화분 키우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지. 정정하겠다. 화분 쇼핑을 좋아한다. 꽃집을 지나갈 때나 화훼단지에 구경 갔다가 돌아올 땐 꼭 양손에 식물이 들려있거든. 진짜 괴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죽였으면서 자꾸 사고 죽으면 또 사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어떤 마음인지 화분의 무게가 상당함에도 배달 서비스를 거부하고 기어이 곧 죽을 그들을 내 손으로 집에 모시고 온다. 나의 정성은 늘 거기까지였다. 그 외엔 들판에서 알아서 자라는 잡초 대하듯 그 어떤 돌봄도 해 주는 게 없다. 좁은 우리 집에 가둬두고 방치하며 가끔가다 생각나면 물을 먹이고 어떤 날엔 진 빚을 갚으려는 듯 많이 마셔라 하며 바가지로 뜬 물을 콸콸 부어버리기도 하면서 거실 한편에서 식물들은 비참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곤 했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꼬마가 생기면서 역사의 흐름은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된다.




엄마, 이거는 이름이 뭐야?

나도 살 때는 의례 이름을 물어보곤 하지만 키우면서 기억하고 지낸 적은 거의 없었다.(물론 선인장이나 산세베리아 정도의 차이는 구별할 줄 안다.) 이름이 무엇인들 어떠하리. 어차피 바삭하게 죽을 텐데 말이다. 인공지능 검색창에 화분사진을 넣어 검색해 보고 이건 고무나무, 이건 아레카 야자수, 이건 산세베리아, 이건 홍콩야자, 이건. 이건. 이건. 알려주고도 나의 기억력에선 가뿐하게 삭제시켰는데 꼬마는 잘 기억해 뒀다가 도장 찍듯 이름을 읊어주곤 했다.


엄마, 이것 봐. 여기는 연두색인데 여기는 갈색이야.

식물은 죄다 원래 그런 거 아니겠는가. 어느 날엔 시들어버리기도 하는 거지 뭘 그게 신경 쓸만한 일인가. 그런데 아들은 어디서 듣고 왔는지 그 갈색으로 변한 부분을 떼어내라고 내게 시킨다. 뚝하고 힘 없이 떨어져 나온 그 갈색 부분을 만지작 거리면 이상한 기분이 손목을 휘감는다. 어쩌면 이렇게 간단하게 힘 없이 떨어지는 걸까. 붙어만 있을 뿐 사실은 끝난 거였구나. 생명의 연결성이 사라진 촉감에 마치 시체를 만진 기분마저 들어 냉큼 쓰레기통으로 달려가 던져 버렸다. 갈색을 떼어내고 보니 이전보다는 깔끔해 보였다.


엄마, 여기는 골짜기같이 파였어.

고무나무(라고 기억하는데)가 무럭무럭 자라다가 이파리의 무게도 무겁고 줄기가 길어 옆으로 축 늘어지면서 줄기 사이가 꺾이고 갈라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뭘 어쩌라는 건지. 나는 이들에게 뭘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건지. 길 가다가 고추나 토마토를 심은 텃밭에서 막대기 세워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걸 해줘야 하는 건지..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볼까 내지는 식물관리 관련한 책을 사볼까 하는 큰일 날 생각까지 근접하게 되었다. 그냥 모른 척하고 싶은데 왜 내가 그걸 알아야 하는지 한숨이 나오는데 이 본심을 아들에게 들키면 안 될 것 같아 심장이 쿵쾅거리는 갈등 속에 허우적거리다가 정신 차려보니 내 손은 주방 서랍에서 나무젓가락을 주섬주섬 꺼내어 막대기 비슷한 흉내를 내고 있기도 한 기이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더란 말이다. (물론 나무젓가락은 적절한 솔루션이 되지 못했고 꽃집으로 들고 가서 분갈이를 해줬다)


엄마, 여기 있잖아. 여기. 이거는 왜 이파리가 없고 볼록 튀어나왔을까?

’ 여기‘를 보라고 한다. 이쯤 되면 나는 정말 귀찮고 성가신데 호응을 안 할 수가 없어서 아들이 손가락을 가리키는 쪽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척이라도 한다. 와! 새로운 줄기가 올라오는 것인가. 왜 뿔이 나 있지?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들어 가. 지금도 충분해. 그만 자라란 말이야!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데 며칠 뒤 그 뿔 위에 소꿉장난처럼 굉장히 앙증맞은 이파리가 달려있다. 괜히 막 날개뼈 사이의 등이 간지럽다.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그렇다.


자,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얘(오른쪽 화분, 덩치가 꽤 큼. 덩치에 비해 이파리가 작고 가늘고 상대적으로 허약한 느낌)랑 얘(왼쪽 화분, 역시 덩치가 꽤 크고 오른쪽에 비해 상당히 건장함)한테 똑같이 물을 주는데 얘(오른쪽)는 빨리 뱉어내고 얘(왼쪽)는 한참 있어야 뱉어내. 얘(오른쪽)는 목이 안 마른가?

몰라. 모른다고! 그냥 다 다른 거야. 우리 사람 인생이 다양하듯 화분도 원래 그런 거야.라고 적절하게 비벼버리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속내를 말도 못 하고 물을 줄 때마다 그 소리를 해서 자꾸 주문을 넣으니 내가 그 주문량을 처리하지 않고 버틸 요령이 없었다. 어디 물어볼 데라곤 동네 꽃집 말곤 없어서 역시나 그 분갈이마스터께 데리고 가서 화분을 ‘까’ 보니 물을 뱉어내던 그 녀석은 뿌리가 얇고 짧아 기력이 형편없었다. 그래도 아직 살릴만한 상태라 영양도 주고 가지도 좀 정리해서 새 화분에 담아 키우면 될 것 같다고 한다.


엄마, 할머니 집에 있는 화분은 반짝반짝한데 우리 집 고무나무는 왜 이렇게 먼지가 많지? 좀 닦아줄까?

물티슈를 꺼내서 닦으려고 나서길래 삶아놓은 뽀얗고 고운 내 행주를 내어주었다. 세수를 시키고 나니 녀석들도 꽤 예쁘다. 잎사귀 위를 손가락으로 스치면 뽀드득 소리가 날 것 같은 말간 얼굴이다.


엄마,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달걀껍데기를 화분 흙 위에 얹어놓으면 식물이 튼튼해진대. 우리도 달걀프라이 할 때 생긴 껍질은 화분한테 줄까?

정말이지 냄새나고 지저분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데(실제로 냄새는 없었지만 왜 기분상 그럴 것 같은 찝찝함이랄까) 그게 싫다는 것을 티 내지 않고 부드럽고도 태연하게 피해 가려면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했다. 그 제안을 합리적인 이유를 대며 거절하거나 그 제안에 버금가는 타당한 다른 대안을 제시하거나. 둘 다 하지 못할 것이기에 아들의 제안에 따라 달걀껍데기를 얹어놓는 찝찝함을 실행으로 옮겼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그 달걀껍데기가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 그렇지만 아들은 굉장히 뿌듯해하며 달걀프라이를 할 때마다 껍질을 교체해 주고자 옆에 서서 내 손이 휴지통으로 향하는 것을 막아서며 마치 달걀껍데기를 구조하듯 건네받아 화분으로 조르르 달려간다.


  이밖에도 아들이 식물을 돌보는 일련의 행동들이 있다. 화분 외벽에 눈알 스티커를 붙인다거나(난 그들과 눈 마주치면 꼭 피한다), 햇볕을 따라 기울어진 화분들은 각도를 살짝 틀어준다거나, 냄새를 맡아본다거나(고도의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냄새구별이 가능한가 싶지만), 흙 위에 산에서 주워온 솔방울을 얹어준다거나(아무래도 미학적 표현이겠지?) 하는 등의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도 화분은 그 자리에, 그리고 여름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서도 화분이 아직도 살아있다.


  자주 들여다보고 살피고 쓰다듬고 물을 주면서 화분이 생기를 얻는 모습을 보니 지난 시간 내가 저지른 만행이 얼마나 잔인했었나 생각하게 되었다. 돌볼 줄도, 돌보고 싶은 마음도 없이 화분 쇼핑만 즐기며 그저 소모품처럼 그 자리를 새 화분으로 순회시킨 시간들 말이다. 아들이 키운 고무나무는 하마터면 비정한 나를 만나 한 계절 살다가 생을 마감할 뻔했는데 이름에서 느껴지는 투박함처럼 건장하고도 묵직하게 한 구성원으로 자리를 차치하고 있다. 그뿐인가, 아레카 야자수? 희미하게 생긴 너는 왜 아직도 살아있는지. 그리고 아직까지도 내가 이름을 모르겠는 초록옷을 입은 이들이 두 번의 분갈이를 해대며 아주 만수무강할 태세다.


신기하다.

잠시지만 마음이 따뜻하면서 순수해진다.

돌보면 산다.

이 당연한 원리에 눈물이 왈칵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걱정이다. 언제까지 살아있으려고 그러나? 하는 마음이 아직까지 심장 한구석에 뽈록뽈록 올라와 있지만 왜 그런 마음이 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잘 돌볼 자신. 그래도 이왕 이렇게 생존한 식물들과 함께 속내를 티 내지 않고 앞으로 한 동안은 잘 살아보려고 한다. 아들이 어제 말했다. 날씨가 더워져서 (식물이겠지) 물을 자주 마셔야 한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킬리만자로의 야옹이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