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변태를 만났다.
여기서 변태는 성 도착증세를 심하게 앓고 있는 그들을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변태 자체를 마주친 지는 거의 5-6년만이지만 단순 하의노출(일명 바바리맨의 성격을 띠는) 변태는 스무살 대학 시절 택시기사 아저씨 이후로 10년도 훌쩍 지났으니 사실상 오랜만이라는게 맞기는 하다. 그렇다고 살면서 그런 변태를 자주 또는 정기적으로 만날 필요는 절대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면 내 주거와 생활환경의 변화가 영향을 준 것일까? 아무튼 오랜만에 마주치자 반갑(어휴, 큰일날 소리)다기 보다.. 뭐랄까 "어머나, 요즘도?"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있을 때 내가 일하는 병원은 그 일대지역에서는 가장 큰 병원이었는데 주변에 자주 출몰하던 악명높은 변태가 한 명 있었다. 그런 큰병원의 특성상 인력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게 간호사이고 그래서 여자인구가 비교적 집중되어 있으니 그들에게는 이건 뭐 옛날 여고, 여중 앞에서 한창 잘나가던 시절과 맞먹는, 병원근처는 그야말로 타겟의 '노다지'인 셈이다. 게다가 3교대 근무자들은 밤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늘 있어주니까 그들에겐 얼마나 적절한 대상이냔 말이지. 그는 늘 흰색 SUV에 타서 창문을 열어 지나가는 여성에게 길을 물어보다가 여성이 가까이 다가와 질문에 답을 해주고 있으면 타이밍에 맞춰 자신이 계획한 행동이나 언행을 실행한 다음 여성의 표정이 이루말할 수 없는 불쾌함으로 물드는 순간 꺄르르(정말 꺄르르가 맞습니다) 웃으며 쌩하고 차를 타고 달아나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안 그와 똑같은 차종의 자동차가 내 주변에 서 있기만 해도 경계를 하는 불안함을 겪기도 했었다. 어느 순간 그의 행태는 원내 몇백명이나 되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미 소문이 나있었고 병원내 전상망으로도 주의하라는 공지가 나간 상태라 내가 그를 마주쳤을 땐 아 요놈이구나 싶어 이미 112버튼을 누르고 대면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결국 신고는 실패로 돌아갔다. 눈치는 또 어찌나 빠른지. 신고는 고사하고 차량번호판 사진을 찍을 겨를도 없는 빛의 속도로 달아나는거다.
아무튼 변태는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내 슬픔은 변태가 던져준 것이 분명하다.
오늘 만난 변태에 대해 좀 말해보자면 이런거다.
나는 모임이 있어 약속장소인 평소에는 잘 가지 않는 낯선 동네에 가야했고 평소엔 잘 타지도 않는 번호의 버스를 타고선 내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을 지나칠까봐 안내방송에 청각을 곤두세우고 바깥 정류장의 표지판에 시각을 집중하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타고 있던 버스에서 내렸고 밖에 서있던 할아버지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다. 할아버지 얼굴이 너무 붉어서 아마도 저 할아버지는 대낮부터 약주를 한잔 하셨구나 하고 있던 중 할아버지가 머리에 쓰고 있던 등산모자를 벗어서 바지를 가리는 것이 아닌가. 난 별 의미 없이 시선이 할아버지 손으로 따라 갔는데, 맙소사! 할아버지는 생식기 노출 변태였던거다. 그 음흉한 미소는 술기운에 충동적으로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의 얼굴에서 나오는 미소가 아니었다. 뭐랄까 상대방을 농락하고 수치스럽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정말 능숙하고 숙련된, 습관이 된 그런 미소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어떤 반응을 취하기도 전에 버스는 떠났다. 순간적으로 아주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창문을 열어서 욕을 한번 해볼까, 사진을 찍어서 신고를 할까, 버스기사 아저씨에게 고자질을 해서 버스를 멈추게 하고 온천하에 이 상황을 고발할까.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이 할아버지는 저만치 멀어져 갔다.
나는 슬펐다. 이상하리만치 그러했다.
일단 나는 [우리사회에서 뿌리 뽑혀야 하는 심리성적장애를 겪는 저러한 부류의 인물들은 빨리 사라질 수 있도록 철저한 신고정신과 예방 및 대처교육이 필요하고, 더불어 적발된 변태들에 대해서는 행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아주 무거운 처벌을 내려야 하며, 저런 중증들은 치료적 접근을 하여 더 이상은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저 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하고 참 슬펐다.
그 상황에서 나는 왜.
몹쓸병(사실상 성도착증은 여러가지 정신질환 증상 중에 한가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겠지만은 그 성적도착행동 자체가 병, 즉 '장애'는 아니다.라고 배웠다.)을 고치지 못하고 저 나이가 될 때까지 아직도 저런 행동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나는 왜 너무 안쓰럽다는 쓸데없는 감수성을 갖다대며 쓸데없는 슬픔이 치고 올라올게 뭐냔 말이다. 평생을 저러고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욕을 들어먹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저런 식으로 괴롭혔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에 갇혀버리게 만드는 발달적, 심리적 기전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저렇게나 몹쓸병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라는 온갖 연민에 나의 수치심이 가려져서 한동안 할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는데 시간을 할애해 버렸다. 물론 나도 여자사람이기 때문에 나름 놀랐고, 수치심까지는 아니지만 불쾌함이 있기는 했다는 것을 한번쯤은 언급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민 또한 나의 정신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용하여 자아낸 것이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인 건강과 돌봄에 대해서 공부하는 간호학을 전공했다는 것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그런 노출 변태의 호황기(?)이었으므로—각 학교마다 그런 변태가 있었고, 심지어 여학생들은 변태에게 별명까지 지어주고 부르기도 했으며 체육선생님이 방망이를 들고 그 변태를 쫓아내실 때 우리는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모르지만—익숙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나는 수치심 보다는 연민으로 핸들을 꺾어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불쌍함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나의 슬픔에 대해서 말을 꺼냈을 때 몇마디 꺼내기도 전에 우리 지인 한 명은 "정말 너도 참 가지가지 한다."라는 말로 모임을 웃음바다로 만들었고, 또 한 명은 가을맞이 감수성이 변태에게까지 미칠 필요가 있느냐고 한 마디 보태 줬지만 이상하리만치 그러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오늘 오랜만에 변태를 만났다는 것, 그리고 변태를 만났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글로써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아무렇지 않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고, 보통의 뭇여성들은 이런 상황에서 받는 정신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인데,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저런 변태들이 남아 있고, 나는 다만 저런 할아버지 변태처럼 불치병인냥 노인이 될 때 까지도 몹쓸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그리고 인간의 몸은 이렇게나 흉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 한숨을 한 번 쉬어본다.
잡생각을 정리하느라 위에서 뱉은 수많은 단어와 구절 중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잡생각의 일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