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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Oct 20. 2015

오송역 예찬론

휴식을 원한다면 이만하면 됐다.

  오송역에 갔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송역을 거쳐갔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 보다. 헤어지기 싫은 연인의 모습으로 오송역을 떠나온 날, 사진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빠져본다.


  바쁜 마음을 등에 업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면서 징징대는걸 달래서 겨우겨우 내 육신을 이동시키고 있는데 마치 옆에 앉은 맘 좋은 아저씨가 보채는 아기에게 호주머니에서 꺼낸 박하사탕 하나를 입에 물려주듯 불평귀신이 잔뜩 씌인 삐죽나온 내 입에 사탕을 넣어주며 오송역은 그렇게 나에게 찾아왔다.

  전국에서 다 모여 무슨 대책협의회를 한다고 하는데 어쩌다가 내가 서울 대표가 되었다. '어쩔'이란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침착하게 직무를 받아들이고 '대표'라고 하는 부담감의 고유명사를 넘겨 받았으니 언감생신 홈런이나 안타는 고사하고 눈 질끔 감고(사실은 눈을 똑바로 떠야 하겠지) 번트라도 쳐내고 오자며 비장한 각오로 미션을 수행하기로 마음을 다졌는데 회의 장소가 세종시정부청사란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어쩔.. 장거리 출장에 짜증이 확 올라왔지만 짜증 뒤에 곧바로 따라온 것은 사실 내심 있어도 너무 있어보인다는 생각이었다. TV를 통해서만 보던 그 정부청사에 일개 직장인인 내가 출입하게 되다니 이건 정말 판타스틱한 일이 아닌가.(사실 나는 이렇게나 우매한 생각을 갖고 있다)

  아무튼 그 곳에 가려면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오송역으로 가야했다. 티켓에 박혀있는 도착지의 이름은 오송. 오송역은 이름이 참 이쁘다. "오송"이라고 발음할 때 마지막 '송'이라는 글자가 아주 둥글둥글 하면서도 안정감 있고 발음은 짧아도 긴 여운을 주는 경쾌하고 귀여운 리듬이 있다. 여기에 더 즐거운 점은 허허벌판 한 가운데에 홀로 멋지게 자리하고 있는 건물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주는 풍경이 참 멋지다(고 나만 자꾸 주장하)는 것이다.


  일단 역사에 통행하는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려 다음 목적지를 향해 아주 바쁘게 오고가기 때문에 역사 내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어 건물 안에 사람이 많지 않다. 고요하고 한적하다. 대부분 정장을 입거나 단정한 차림으로 일감이 들었을법한 가방을 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저 사람들도 정부청사로 가는 사람들인가 보다.

  건물 내부는 새 건물답게 아주 깔끔한데 1층 로비에서 부터 몇개의 층에 걸친 큰 창이 있다.(건축과 인테리어에 관한 내 상식수준으론 창이라는 것 이상의 표현은 불가하다.) 그 창가엔 실내 벤치가 있는데 사선으로 기울어져 있는 벽면 아래에서 폭 안기듯이 위치 해 있고, 창가로 빛이 한껏 들어오지만 바깥에 있는 구조물들 덕분에 그렇게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나에게 몇시까지 참석하라는 시간제한이 없었다면 아마도 난 거기서 일정 시간을 보내다가 왔을 것이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또는 나의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 치고)와 체면만 허락한다면 벤치에 누워서 한숨 청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역 건물은 세련되고 멋진반면 주변은 허허벌판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재난SF영화에서 흔히 나올법한 생존자들이 모여있는 아지트 같다는 인상을 풍겨준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폐허가 된 도시에서 각종 외계인의 침략과 바이러스, 좀비 이런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비밀스럽고 폐쇄된 안전지역에서 한 세대의 인류가 삶의 터전을 만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상상과 망상의 경계에서 오송역을 예찬해본다.)

  이렇게 말하면 오송역이 뭔가 어마어마하게 크다거나 대단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지만 뭇사람에게는 그저그런 흔한 역 중에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그런 곳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가을맞이 센티멘탈 질주와 바쁜 스케쥴로 인한 신경질 풍년을 겪고 있는 나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오직 하나 뿐인, 나의, 오송역이다 이말이다. 대책없이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기 전 건넌다는 요단강같은.. 그런데 황천길 떠나는 그 요단강이 너무 맘에 드는 나머지 저승에 가기는 싫지만 요단강 때문에 저승가는 길이 한결 편안해졌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정부청사까지 가려면 BRT를 타러 밖으로 나가야하는데 1층 출입문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3층에서 구름다리를 건너 육교를 통해 내려갈 수도 있다. 이 구름다리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나에게는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노출 콘크리트(건물 외부에도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진 몰라도)로 지지대 역할을 하는 기둥들이 줄을 서 있고, 그 아래로 이 도시의 질서를 보여주는 도로상황이 보인다. 도로 위를 통행하는건 거의 두 가지 밖에 없다고 봐도 된다. 버스와 택시. 구름다리를 건너다가 한적한 거리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약간 지루해 보이는 택시 두 대가 보여서 사진을 찍어봤는데 눈으로 찍은 모습보다는 덜하지만 나름 근접하게 표현 된 것 같아 만족스럽다. 돌아다녀봐야 이 허허벌판에서 태울 손님도 없을테니 내 생각에도 차라리 BRT를 놓치고 약속시간이 임박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거 참 한적하다.

  먼 곳에 왔다, 사람이 없다, 시끄럽지 않다, 깨끗하다, 질서가 있다, 화려하지 않다, 낯설다. 내가 공간에 대해 추구하는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이 곳이 참 맘에 든다.

  잠시도 쉬지 않는 미친듯한 회의를 마친 후(10분이라도 일찍 마쳐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정말 '짤'없다. 맙소사.) 임무를 수행했으니 이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예매해야 한다. 근데 이건 뭘까. 왜 헤어지기 싫은거지? 집에 가기 전 조금이라도 오송역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당장 20분 후 출발할 수 있는 18시 23분 기차를 보내 버리고 나는 18시 59분 열차를 선택했다. 구석진 벽에 조용히 숨어있다 나에게 딱걸린 전기콘센트에게 다가가 휴대폰 베터리의 에너지를 수혈하게끔 시켜놓고 나는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관찰한다. 잠시 후 출발하겠노라고 자꾸 찔러보는 안내 방송에도 18시 23분 열차를 탈 생각이 없다며 새침하게 앉아 절대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저기 저 발걸음이 아주 다급한 저 분은 어서 뛰어 가셔야겠다. 저는 좀 있다 갈게요. 먼저 가세요. 맘 속으로 혼자서 배웅 인사도 해본다.


  먼저 보낸 사람들이 일으킨 먼지 바람이 채 가라 앉기도 전일텐데 다음 열차를 탈 사람은 몇번 승강장으로 나오라고 이 친절한 안내방송이 끈질기게 또 찌르기 시작한다. 이제는 가야겠지. 집에는 가야하니까. 충분한 수혈이라 하기엔 아직 미흡하지만 나름 수고해서 채워준 내 휴대폰 베터리를 데리고 다시 나는 서울로 향한다. 언젠가 다시 오는 날이 있다면 그 때도 지금 처럼 변함없이 한적하기를.


 스치는 우리인연. 잘있어라 오송.

(참나,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바쁜데 이 먼곳까지 일개 직장인을 오라가라 해서 매우 신경질이 났었지만 막상 모든 것을 손에서 잠깐 내려놓고 먼곳으로 떠나 오고 보니, 오송역 같은 조용한 공간만 있어줘도 오히려 이것은 휴식을 위한 꿈같은 도망이었다 라는 생각이 드는거다. 하염없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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