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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상인 Oct 08. 2015

노가리

대화란 서로 간의 차이를 간직한 채 서로를 직면하는 것.  -마틴 부버-

  입을 열면 꾸역꾸역 닫아서 잠궈놓은 사물함 문을 연 것 처럼 대책없이 말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입을 닫아야 하는데 속이 시끄러워서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이 와르르 쏟아져서 여간 골치 아픈게 아니다. 요즘엔 입꼬리에 지퍼를 달고 다니다가 순간 아니다 싶으면 입을 지퍼로 여며 잠그고 싶은 때가 있다.

  연일 회식과 모임과 약속으로 심신이 너덜너덜 하지만 어디서 떠들 에너지가 나오는지 한참을 주저리 주저리 말을 쏟아내고 있다가 나는 왜 지금 이 얘길 하고 있는가를 이야기 후반부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난 왜 이 분들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이 시점에 또 왜 그런 생각을 해야하지? 라는 생각이 치고 올라오면서 인간관계에서 대화의 깊이가 곧 만남의 깊이를 의미한다고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또 생각해본다.

  요즘은 부쩍 사람들이 모든 만남에서 이야기들을 배설하듯 내뱉을 뿐 서로 간에 사고의 흐름을 공유하거나 감정에 공감하는 대화는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씁쓸하다. 대화는 소비되어 없어져 버리고 서로 주고 받은게 없다는게 참 공허했다. 그 원인을 찾자고 타고 타고 올라가면 결국 또 나라욕을 하며 마무리 되겠지.라며 이건 좀 골치아픈 생각이니까 다음번으로 미루고자 한다.

  '나'와 '너'의 관계를 이야기한 철학자 마틴 부버 할배는 대화에서 우리는 인격적 만남을 가진다고 말했다. 대화는 인격적인 만남이라.. 얼마나 멋진 말인지.


  정현종의 시 방문객에서도 나온다.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라고.
그렇다. 우리의 대화가 있는 지금 이 순간 만남이라는 것은 너의 지나온 시간과 내 지나온 시간이 마주하는 순간인거지..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이 완벽한 생각이다.

  우리의 만남 속에서 나도 내 앞에 앉은 사람에게 내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기 보다 인격적 만남에 충실한 내가 되고 싶다고 스스로를 설득해본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게 내가 쏟은 마음만큼 상대방도 그러해주길 늘 바라기 마련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내가 솔선수범하여 인격적 만남에 충실할 수 있을지는 나도 나 자신을 앞으로 두고 봐야 알 것 같다. 오늘 같이 이렇게 말을 와르르 쏟아내고도 개운치 못한 날은 이유가 무엇인지 골똘하게 되니까.




노가리야, 그래서 내가 너의 눈을 바라본다.
너의 지나온 시간들과 마주하기 위해서.
너의 어머니는 싱싱한 명태였겠지.
너는 훌륭한 안주로 생을 마감하는구나.
슬프지 않아. 멋져. 그런 표정 짓지마라 부디..

그나저나
맥주엔 노가리지. 라고 했던 사람이,
노가리나 까면서 술이나 깨자던 사람이,
왜 또 우린 굳이 소주잔을 부딪히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숱한 대화가 오고간 후 누군가가 말한다.
4차는 영화나 보러가시죠.
어머나, 참신하여라. 4차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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