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숭 깨뜨리기
카페에 갔다. 종이 빨대가 나왔다. 홀짝홀짝 음료를 마시는 내 흡입 스타일(?)을 생각해봤을 때, 사실 종이 빨대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어느 순간 다 젖어서 분리된 빨대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빨대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아니, 불평하며 '안된다'고 생각했다. 환경 친화적 정책은 거스를 수 없는 전 지구적 흐름이며, 그 흐름에 나는 동참하는 게 맞고, 불평을 표출하는 건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근데 앞에 앉은 친구는 앉자마자, 일회용 빨대가 너무 싫다고 말했다. 환경을 생각하는 건 알겠는데 불편하다면서.
그 순간 나는 살짝 당황했다. 가장 먼저 머리에 스친 생각은 '이런 흐름에 불평을 해도 괜찮은 건가?'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속으로는 이 빨대가 불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불편하면 안 되는 거라는 객관성을 따르고 있었다. 나의 (주관적) 감정은 싹 뭉게 버리고 객관적으로 옳다고 생각한 것만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환경 친화적인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 감정을 애써 무시하면서까지 그 정책에 옹호한다는 듯이 행동하는 나 자신은 솔직하지 않다고 느꼈다. 엄밀히 따지면 불편하고 싫지만,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하기에 감내해야 하는 것이 맞다. '감내해야 한다'는 강박에 매몰된 나는 솔직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친구의 말에 당황한 것도, 이렇게 말해도 되는구나(괜찮은거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도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과감 없이 해준 친구가 부러워 보이기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자기 자신한테 솔직해도 되는구나. 나는 철없어 보이는 나를 안 좋게 볼까 봐 친구에게조차 나를 포장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내 생각을 날 것 그대로, 곧이곧대로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조금 더 멋진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조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가 크다. 내가 생각하는 괜찮은 사람이란 객관적으로 괜찮은 사람을 뜻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나의 모습이 철이 든 걸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는 조금씩 나의 진짜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지려고 한다. 객관성은 잠시 접어둔 채로. 내가 느끼는 온전한 그대로의 내 생각도 소중하니까, 또 그것도 사랑스럽게 봐줄 내 사람들이 있으니깐! 나도 내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걔를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속이 시원한 느낌을 받았던 것처럼.
문득, 내가 무슨 환경부 장관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올바른 말만 하려고 했지 싶으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연 작가님의 책에서 본 구절이 생각난다.
‘무명을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