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를 부수지 않고 껴안는 법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이해 불가'다
연애 시절, 우리는 서로의 '다름'에 끌렸다.
나의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은 그의 활달함 덕분에 밝아졌고,
그의 덜렁거리는 성격은 나의 꼼꼼함 덕분에 보완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환상의 짝꿍'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생활의 뚜껑을 열자, 그 '다름'은 곧장 '지옥'으로 변했다.
나는 물건 하나를 사도 아껴 쓰고, 치약은 끝부터 말아 올리며, 집안에 머리카락 하나 떨어져 있는 꼴을 못 보는 예민한 사람이다. 반면 남편은 치약을 허리춤에서부터 푹 짜고, 휴지를 펑펑 쓰며, 주말이면 좀 쉬고 싶은 나를 끌고 기어이 밖으로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에너자이저다.
처음에는 잔소리를 했다. 그다음에는 싸웠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정도 '포기'했다.
하지만 그 포기는 평화가 아니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스트레스와 화가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다.
"도대체 저 인간은 왜 저럴까?"
오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우리가, 서로를 고치려다 상처 입히는 것을 멈추고,
어떻게 '공존'의 지혜를 찾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처절한 기록이다.
나의 기질을 심리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민감성(High Sensitivity)'이 높은 사람이다.
나는 타인의 감정을 잘 읽고, 눈물이 많으며, 환경의 변화나 무질서(더러움)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에게 집은 외부 자극을 차단하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성역'이다.
반면 남편은 '자극 추구형(Sensation Seeking)'이자 전형적인 외향인이다.
그는 에너지를 밖에서 얻는다. 사람을 만나고, 몸을 움직이고, 새로운 곳에 가야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에게 집은 잠만 자는 베이스캠프일 뿐이다.
이 두 사람이 만났으니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주말 아침, 나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싶은데, 남편은 눈 뜨자마자 "오늘 날씨 좋은데 어디 갈까?"라며 내 평온을 깬다. 나는 그게 피곤하고, 그는 나의 거절이 서운하다.
가장 참기 힘든 건 생활 습관이다. 나는 물건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아껴 쓴다.
휴지 두 칸이면 될 걸 다섯 칸씩 뜯어 쓰고, 비싼 로션을 팍팍 바르는 남편을 보면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물건을 대하는 그 '무심하고 투박한 태도'가, 마치 나의 섬세한 마음을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결혼 5년 차, 10년 차가 되면 많은 아내가 말한다.
"그냥 포기하고 살아요. 안 고쳐지더라고요."
나 역시 그랬다. 치약 중간부터 짜는 거? 그래, 내가 다시 밀어 올리면 되지.
양말 뒤집어 벗는 거? 내가 다시 뒤집으면 되지.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포기'와 '수용'은 하늘과 땅 차이다.
포기는 '판단'이 남아있는 상태다.
"네가 틀렸지만, 내가 더러워서 피한다" 혹은 "말해봤자 입만 아프니 내가 참는다"는 마인드다.
여기에는 억울함과 피해 의식이 깔려 있다. 그래서 남편이 치약을 또 막 짜놓은 걸 보면,
참았던 화가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반면 수용은 '판단 중지' 상태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아, 저 사람은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 사람이구나" 하고 팩트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거기엔 감정의 동요가 없다. 마치 "하늘에서 비가 오네"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오랜 시간 '포기'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남편을 경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식하게 낭비하는 사람', '섬세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낙인찍으면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던 건 남편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를 내 기준에 맞춰 뜯어고치려는 나의 '통제 욕구' 때문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남편이 나랑 똑같이 예민하고, 소심하고, 꼼꼼한 사람이라면 어땠을까?
치약 뚜껑 닫혔나 안 닫혔나 서로 감시하고, 휴지 한 칸 덜 쓰려고 서로 눈치 보고, 주말이면 둘 다 침울하게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집.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신의 한 수는 '상호 보완'에 있었다.
내가 작은 일에도 전전긍긍하며 눈물 흘릴 때, 남편은 그 특유의 무심함으로 툭 던진다.
"야, 그게 뭐라고 울어? 맛있는 거 먹고 털어버려!"
그의 그 투박함이, 그 단순함이, 나의 깊고 어두운 우울의 늪에서 나를 건져 올리는 밧줄이었다.
그가 물건을 막 쓰는 것?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대범함'이다.
내가 100원, 200원에 벌벌 떨 때, 그는 "그냥 사! 내가 벌면 되잖아!"라고 질러준다.
그 시원시원함이 내 삶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나를 화나게 했던 그의 단점이, 사실은 내가 가지지 못한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는 것을.
나는 '유리'라서 쉽게 깨지지만, 그는 '망치'라서 세상을 부수고 나아갈 수 있다.
유리가 망치보고 "너는 왜 투명하지 않아?"라고 따지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가.
방을 따로 쓰거나 물건을 칼같이 나누면 편하겠지만, 우리는 한 침대를 쓰고 한 화장실을 공유하는 부부다.
피할 곳이 없다면 방법은 하나다. 내 마음속에서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잔소리 사이렌'의 센서를 끄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부부만의 현실적인 '평화 조약'을 맺었다.
첫째, 물건을 보고 화내지 않기 : '중요함'의 무게가 다를 뿐이다
결혼 후 5년 동안, 나는 치약을 중간부터 푹 짜서 쓰는 남편과 전쟁을 치렀다.
"끝부터 짜야 알뜰하게 쓰지!", "보기 흉하잖아!"라고 수천 번도 넘게 말했지만,
다음 날이면 치약 허리는 여전히 잘록하게 들어가 있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살면서 몇천 번을 말해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건,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인생에서 '치약 짜는 방식' 따위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의 뇌 구조 속에서 치약은 그저 '이를 닦는 도구'일뿐,
끝부터 짜든 중간부터 짜든 아무 상관이 없는 하찮은 존재였다.
반면 꼼꼼한 나에게는 그것이 '질서'이자 '절약'이라는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다.
우리는 각자 삶에 중요하다 생각되는 부분의 '우선순위'를 서로 다르게 설정했을 뿐이다.
남편은 치약 짤 에너지를 아껴서 밖에서 돈을 버는 데 쓰고, 가족을 웃게 하는 데 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명확하다. 화내는 대신, 그냥 내가 조용히 치약을 밀어 올리면 된다.
그건 1초도 걸리지 않는다. 1초의 수고로움으로 가정의 평화를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남는 장사가 아닐까.
둘째, 공간의 공유 : '흐린 눈'으로 바라보는 지혜
우리는 방을 따로 쓰지 않는다. 잘 때도 다리를 척 걸치고 자야 잠이 오는 부부다.
그러니 남편의 어지러움은 피할 수 없는 나의 현실이다.
남편은 퇴근하면 허물을 벗는 뱀처럼 옷을 현관부터 거실까지 툭툭 벗어던져 놓는다.
예전에는 그 꼴을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내가 니 식모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제 나는 '흐린 눈' 기술을 시전 한다.
남편이 벗어둔 양말과 옷가지는 나를 공격하려는 무기가 아니다.
그저 밖에서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가장이
"아, 이제 집이다! 살 것 같다!"며 무장 해제한 '안도감의 흔적'일뿐이다.
그가 옷을 정리하지 않는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집이라는 공간에서만큼은 아무런 긴장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벗어둔 옷을 묵묵히 빨래통에 넣는다. 이것은 내가 져주는 것도, 그가 이긴 것도 아니다.
"깨끗한 집을 원하는 건 남편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해서 하는 청소는 노동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의식'이 된다.
'네가 치워'라고 강요하며 감정을 소모하는 대신, 내가 쓱 치우고 남편의 엉덩이를 한 번 토닥여준다.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옷은 내가 치웠으니까 푹 쉬어." 그
라면 남편은 미안하고 고마워서 설거지라도 한 번 더 하려 든다.
우리는 방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마음의 방을 넓혔다. 그 넓어진 방 안에서는 찌그러진 치약도, 바닥에 뒹구는 양말도 더 이상 싸움의 불씨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타고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뇌과학적으로 나는 불안을 감지하는 '편도체'가 예민한 사람이고, 남편은 도파민 수용체가 발달한 사람일 뿐이다.
이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 다름'이다.
남편이 내 말을 듣고도 까먹는 건 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의 뇌가 세부 사항보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는 데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휴지 낭비에 화를 내는 건 내가 쪼잔해서가 아니라, 나의 뇌가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비난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저
"아, 당신의 뇌는 오늘도 에너지가 넘치는군요", "내 뇌는 오늘도 평화를 원하네요"라고 인정하면 된다.
화가 올라올 때마다 주문을 외운다.
'저 사람은 나를 괴롭히려고 저러는 게 아니다. 그냥 저 사람의 방식대로 숨 쉬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 나만 참고 사는 게 아니다.
꼼꼼하고 예민한 나 때문에, 남편 역시 숨이 막힐 때가 많았을 것이다.
"대충 좀 넘어가지, 그걸 꼭 따져야 해?"
"집에서 쉴 때도 눈치 보여."
자유로운 영혼인 그가, 나라는 깐깐한 관리자를 만나 얼마나 많은 자유를 반납하고 살고 있는지 역지사지해 보았다. 내가 그의 무신경함에 지치는 만큼, 그 역시 나의 예민함에 지쳤으리라.
결국 결혼 생활은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는 동시에, 쉼이 되어주는 과정'이다.
내가 그의 낭비를 참아주는 것이 나의 사랑이고, 그가 나의 잔소리를 들어주는 것이 그의 사랑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며, 결국엔 구원자다.
우리는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다
오늘도 남편은 거실에 양말을 벗어두고, 치약 뚜껑을 열어둔 채 출근했다.
예전 같았으면 "전화해서 따질까?" 싶었겠지만, 오늘은 그냥 피식 웃으며 내가 닫는다.
그 열린 뚜껑 사이로 남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가지지 못한 그 여유, 그 헐거움, 그 따뜻한 무심함.
나는 평생 가질 수 없는 그 기질을 가진 남자가 내 옆에 있다.
그래서 내 팍팍한 삶에 틈이 생기고 바람이 통한다.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도 사랑할 수는 있다.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전쟁은 끝나고 진짜 부부의 세계가 열린다.
: 사랑은 서로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물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럴까?"
결혼 초, 찌그러진 치약과 벗어둔 양말을 보며 저는 매일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그 물음표는 곧 느낌표(화)가 되었고, 결국엔 마침표(체념)가 되더군요.
하지만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우리는 방을 따로 쓸 수도, 물건을 칼같이 나눌 수도 없는 '부부'라는 것을요.
피할 수 없다면, 제가 보는 '렌즈'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치약을 대충 짜는 건 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 에너지를 아껴 우리 가족을 웃게 만드는 데 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옷을 허물처럼 벗어두는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제 곁에 있는 이 집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안식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는 조용히 치약을 밀어 올리고, 남편의 양말을 줍습니다.
이것은 제가 져주는 패배의 기록이 아닙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의 부족함을 내 손길로 채워주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혹시 오늘도 배우자의 사소한 습관 때문에 화가 나셨나요?
눈을 조금만 흐리게 뜨고 다시 바라보세요.
그 헐렁하고 빈틈 많은 모습이, 팍팍한 당신의 삶을 숨 쉬게 하는 구멍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빈틈까지 사랑하며, 유다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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