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얀족 여인들, 길어진 목만큼 깊게 파인 절망의 연대기
셔터 소리 뒤에 숨겨진 5kg의 족쇄
태국 북부 치앙마이나 매홍손의 깊은 산속 마을. 흙먼지가 날리는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이질적인 풍경이 이방인들을 맞이한다.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고 베틀 앞에 앉아 있는 여인들. 그들의 목에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두꺼운 황동 고리가 겹겹이 감겨 있고, 턱을 괼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길어진 목은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와, 정말 목이 기네. 어떻게 저렇게 살지?"
관광객들은 신기한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린다. 여인들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포즈를 취하고, 자신이 직접 짠 조잡한 스카프나 목각 인형을 사달라며 서툰 영어로 손짓한다. 며칠 뒤, 이 여인들의 사진은 전 세계 사람들의 소셜 미디어에 '신비로운 오지 체험'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전시될 것이다.
하지만 그 해맑은 미소 아래, 태양빛을 받아 뜨겁게 달아오른 황동 고리가 여인들의 살갗을 얼마나 짓무르게 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평화로워 보이는 민속 마을이, 사실은 철창만 없을 뿐 국적 없는 난민들을 가두어 두고 돈벌이 수단으로 착취하는 철저한 '인간 동물원(Human Zoo)'이라는 서늘한 진실을 아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
오늘의 비망록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잔혹한 신체 훼손과, 자본주의의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카얀족 여인들의 잃어버린 존엄에 대한 뼈아픈 기록이다.
◆ 황동 고리의 기원, 보호를 위한 갑옷에서 미(美)의 굴레로
카얀족 여인들이 언제부터, 왜 목에 무거운 쇠고리를 차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혼재한다.
가장 유력한 설은 생존을 위한 '갑옷'이었다는 것이다. 깊은 정글 속에서 호랑이 같은 맹수가 인간의 가장 취약한 부위인 목을 물어뜯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차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혹은 타 부족이 여인들을 납치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무겁고 불편한 고리를 채워 기형적인 외모를 만들고 도망치지 못하게 발목을 잡았다는 서글픈 역사적 가설도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맹수의 위협이 사라진 뒤에도, 이 지독한 족쇄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부족 사회 내에서 여성을 평가하는 기괴한 '미(美)의 기준'이자 '정조와 부의 상징'으로 굳어져 버렸다. 고리가 많고 목이 길수록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으로 칭송받는,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기제가 전통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여성들의 목을 휘감은 것이다.
방어의 도구로 시작되었던 황동 고리는, 이제 여성을 부족의 규범 속에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두는 거대한 철창이 되어버렸다.
◆ 뼈를 깎아내는 고통의 해부학: 길어진 것이 아니라 주저앉은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고리가 목을 위로 늘린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의학적으로 완전히 틀린 착각이다. 인간의 경추(목뼈)는 늘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기형적으로 긴 목의 정체는 무엇일까?
비극의 실체는 '늘어남'이 아니라 '주저앉음'에 있다.
카얀족 소녀들은 고작 대여섯 살이 되면 처음으로 목에 쇳덩이를 감기 시작한다.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고리의 개수를 점차 늘려가는데, 성인 여성이 차는 황동 고리의 무게는 자그마치 5kg에서 무겁게는 10kg에 달한다.
이 엄청난 쇳덩이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면, 성장기의 연약한 쇄골과 갈비뼈는 견디지 못하고 기형적으로 아래로 푹 꺼지며 함몰된다. 즉, 목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가슴통과 어깨뼈가 찌그러져 내려앉으면서 상대적으로 목이 길어 '보이는' 착시 현상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수반되는 육체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쇄골이 무너져 내리는 끔찍한 통증, 황동 고리와 쓸려 짓무르고 진물이 나는 턱밑과 목덜미의 피부. 우기가 되면 녹이 슬어 피부병을 유발하고, 건기가 되면 태양열에 쇳덩이가 달구어져 화상을 입힌다. 고리를 감은 채로는 고개를 숙일 수도, 뒤를 돌아볼 수도, 편하게 누워 잠을 잘 수도 없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평생을 쇳덩이에 의지해 목을 가누다 보니 목 근육이 완전히 퇴화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만약 어떤 이유로든 이 고리를 한꺼번에 풀어버린다면, 척추가 머리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목뼈가 부러지거나 기도가 막혀 질식사할 위험에 처한다. 한번 감은 고리는 죽을 때까지 벗을 수 없는, 말 그대로 '육체의 감옥'인 셈이다.
◆ 국경의 경계에 버려진 사람들, '인간 동물원'의 탄생
이 끔찍한 관습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 아니 오히려 독버섯처럼 번성하게 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들의 가혹한 정치적 운명과 맞닿아 있다.
본래 카얀족은 미얀마(버마)의 카야 주에 살던 소수 민족이다. 하지만 미얀마 군사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과 내전을 견디지 못하고, 수많은 카얀족이 살기 위해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목숨을 건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태국 정부는 이들에게 난민 지위도, 태국 시민권도 부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 특이한 외모를 가진 소수 민족의 상업적 가치를 꿰뚫어 보았다.
태국 당국과 관광 업자들은 치앙마이 외곽의 척박한 땅에 이들을 몰아넣고 일종의 '보호 구역'을 만들었다. 밖으로 나갈 거주 이전의 자유도, 직업을 가질 권리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권리조차 박탈했다. 무국적의 유령이 된 카얀족에게 허락된 유일한 생존 방식은, 화려한 전통 옷을 입고 목에 쇠고리를 감은 채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며 관광객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뿐이었다.
입장료를 내고 마을에 들어온 관광객들이 신기하다며 여인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그 막대한 관광 수익의 대부분은 태국의 관광 업자와 브로커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여인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관광객이 쥐여주는 팁 몇 푼과 조잡한 기념품을 판 돈, 그리고 정부가 배급하는 한 줌의 쌀이 전부다.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우리에 갇혀, 목을 길게 빼고 낯선 이방인들을 향해 자본주의의 서글픈 미소를 지어야만 하루를 연명할 수 있는 이 기막힌 구조. 이것이 현대판 인간 동물원의 적나라한 실체다.
◆ 고리를 벗어던질 용기, 그러나 가로막힌 생존의 벽
물론 모든 카얀족 여성이 이 끔찍한 굴레에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바깥세상을 접한 젊은 세대의 소녀들 중 일부는, 용기를 내어 펜치로 목의 황동 고리를 끊어내기도 한다. 무너져 내린 쇄골의 고통을 견디며 재활 치료를 받고, 구경거리로 전락한 삶 대신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리를 벗어던진 이들에게 세상은 가혹하기만 하다.
고리를 푼 소녀들은 관광객들의 외면을 받는다. 볼거리를 잃은 마을에서 그들은 더 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는 '가치 없는 존재'로 취급된다. 게다가 태국 정부는 이들이 태국 사회로 흡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전히 신분증을 발급해주지 않는다.
국적도, 신분증도, 고등 교육의 기회도 없는 젊은 여성이 고리를 벗고 마을 밖으로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뻔하다. 결국 도시의 빈민가로 흘러 들어가 불법 일용직을 전전하거나, 심지어 성매매의 늪으로 빠지기도 한다.
고리를 차고 동물원의 원숭이로 평생을 갇혀 살 것인가, 아니면 고리를 풀고 무국적의 유령이 되어 도시의 밑바닥을 헤맬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카얀족 여성들 앞에는 참담한 가시밭길뿐이다. 그들에게 목의 황동 고리는 폭력인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굶어 죽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밥줄이자 서글픈 이력서인 셈이다.
◆ 카메라 플래시와 관람료, 우리가 소비하는 야만의 풍경
우리는 이 지독한 역설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입장료를 지불하고 그들의 마을에 들어가, 신기하다는 듯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우리는 과연 무해한 이방인일까?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나 '문화 상대주의'라는 그럴듯한 변명 뒤에 숨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여가와 오락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 마을의 부모들은 태어나는 어린 딸의 목에 주저 없이 무거운 쇳덩이를 감을 것이다. 그것만이 내 딸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불한 달러 지폐는, 그 어린 소녀들의 연약한 쇄골을 짓부수는 가장 단단하고 잔인한 망치가 된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신체 훼손, 그리고 무국적 난민들을 볼거리로 전락시킨 국가의 묵인, 마지막으로 이질적인 것을 관음증적으로 소비하려는 세계 관광객들의 탐욕.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카얀족 여성들의 인권은 처참하게 갈려 나가고 있다.
길어진 목 대신, 길게 내뻗은 두 팔로 세상을 안을 수 있기를
치앙마이의 뙤약볕 아래, 관광객을 향해 억지미소를 짓던 한 소녀의 목에서 흘러내리던 땀방울이 못내 가슴을 찌른다. 무거운 쇳덩이에 짓눌려 고개조차 자유롭게 돌리지 못하는 그 아이가, 평생을 이 산비탈에 갇혀 이방인들의 앵글 속에 박제된 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먹먹함을 넘어 거대한 분노로 다가온다.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명제는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이 지켜질 때 비로소 성립한다. 신체를 훼손하고 인신을 구속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시스템은 문화가 아니라 타파해야 할 악습이며, 명백한 범죄다.
태국 정부는 그들을 동물원 우리 밖으로 풀어내어 온전한 거주와 노동의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 국제 사회는 난민으로서의 그들의 법적 지위를 보장해야 하며, 무심코 셔터를 누르는 우리 관광객들은 나의 소비가 누군가의 목을 옥죄는 사슬이 되고 있지 않은지 철저히 성찰해야 한다.
황동 고리에 짓눌린 것은 그들의 쇄골이 아니라, 문명사회를 자처하는 우리 모두의 양심이다.
그 무거운 고리를 끊어내고, 부서진 어깨를 펴고, 길어진 목 대신 자유롭게 길게 뻗은 두 팔로 온 세상을 껴안으며 달려 나갈 카얀족 여성들의 눈부신 내일을, 처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가볍게 치부했던 무지함을 뼈저리게 반성합니다.
5kg의 육중한 쇳덩이가 연약한 어린아이의 쇄골을 무너뜨리고,
살갗을 파고드는 그 끔찍한 고통을
우리는 그저 '독특한 전통문화'라는 세련된 단어로 너무나 쉽게 덧칠해 왔습니다.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태어난 고향에서 쫓겨났다는 이유로
평생을 울타리 안에 갇혀 구경거리로 살아야만 하는 삶.
고리를 풀면 굶어 죽고, 고리를 차면 육체가 망가지는
이 잔혹한 선택지 앞에 놓인 여성들의 운명이 가슴을 날카롭게 베어냅니다.
누군가의 고통과 훼손된 신체가 나의 볼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끔찍한 '인간 동물원'의 입장권을 사는 행위를 멈추는 것.
불편하더라도 이 야만적인 진실을 세상에 똑똑히 알리는 것.
그것이 쇳덩이에 짓눌린 그녀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는
우리의 최소한의 속죄일 것입니다.
척박한 땅에서 모진 삶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 카얀족의 모든 어머니와 딸들에게,
깊은 연대와 가슴 저린 위로를 보냅니다.
Written By Yooda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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