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문학동네
엄청난 책을 선물로 받았다. 첫 페이지를 읽다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갔다. 집중력을 높여 다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그는 결코 무심하지 않았고, 모든 것에서 행복이나 불행을 보았으며, 그것을 통해 늘 활기차게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이런 사람들은 남에게 비범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들은 항상 도덕적 움직임 속에 있고, 그것이 남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개인적인 의미를 띤다. 또한 사람들은 그들과 교류하면서 부단히 자신에게 몰두해도 되기 때문에, 보통은 정신분석가나 개인 심리학자에게 보수를 주고서야 얻을 수 있을 만족감을 얻는다. 그것도 정신분석가를 찾을 때와는 달리 자신이 병들었다고 느낄 필요 없이 말이다. 발터는 사람들이 지금껏 모르고 있던 이유를 들며 그들이 스스로를 매우 소중한 존재로 여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90
울리히의 어릴 적 친구 발터에 관한 이야기다. 발터의 이야기 속에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작가의 숙명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저 사람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어떤 고통을 감당하면 저런 눈빛을 가지게 될까? 저 사람은 왜 저런 말을 자주 할까? 저 사람의 꿈은 뭘까? 밝아 보이는 모습 뒤에 감추려는 어둠은 무엇일까? 저런 습관은 어떻게 생긴 걸까? 성향이나 기질은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학습된 것일까?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으로 스쳐간다.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을 공부한 이유도 어쩌면 주변의 사람이 스스로를 소중한 존재로 여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자신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유럽이 구제할 길 없이 타락해 버렸다는 생각이었다. 겉으로는 잘 굴러가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퇴보를 견뎌내고 있는 시대.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시대정신에 특별한 노력과 새로운 사유가 공급되지 않으면 정신적 발전을 포함해 시대의 모든 것이 퇴보를 겪게 될 그런 시대에 가장 먼저 대두되는 질문은 그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92
100년 전의 소설 속 배경이 요즘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퇴보를 겪게 될 그런 시대에 그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발터는 변화하는 세상에 순응할 것인지 맞서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다. 가치관의 혼란은 개인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만한 거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무능하고 건강하지 못했던 게 그였다면 이제는 무능한 건 시대이고 자신은 건강하다는 것이다.
-93
발터의 본능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시대 탓으로 돌리는 방향으로 흐른 것 같다.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끊임없는 질문을 마주할 때 할 수 있는 선택은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스스로를 탓하는가 혹은 세상을 탓하는가.
울로는 특성 없는 남자야!
-96
발터가 말했다. 울리히는 현대가 만들어낸 인간 유형이라고.
수학자는 개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처럼 생겼어. 전체적으로는 지적으로 보이지만, 그만의 고유한 내용이 없다는 거야! 오늘날엔 가톨릭 성직자 빼고 그만큼 자기 직업에 맞게 생긴 사람은 없어. 우리는 손보다 머리를 훨씬 비개성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지. 수학은 그 정점이야. 수학은 언젠가 고기와 빵 대신 영양제로 식사할 사람들이 들판과 송아지, 닭에 대해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
-97
발터는 울리히가 수학자처럼 생겼다고 말한다. 내 주변에 수학자가 없어서 이런 표현에서 외모나 분위기를 상상할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하고 계산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발터가 울리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음 구절에 나온다.
외모로는 울로의 직업을 짐작할 수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직업이 없어 보이지는 않아. 자, 이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봐. 그 친구는 항상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어떤 것이든 매 순간 깊이 숙고할 줄 알아. 거기다 권투까지 해. 그는 재능이 있고, 의지가 강하고, 선입견이 없고, 용감하고, 끈기가 있고, 대담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야. 그런 것들을 일일이 따지고 싶지는 않아. 다만 그에게 이런 특성이 모두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아냐. 그는 그런 특성을 갖고 있지 않아! 그 특성들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고, 그의 길을 결정한 건 사실이지만 그의 것은 아냐. 그가 겉으로 화를 내면, 속에서는 뭔가 웃고 있어. 마찬가지로 슬퍼하면서도 속으로는 뭔가를 대비하고, 무언가에 감동받으면서도 그것을 거부해. 그에겐 어떤 나쁜 행위도 다른 맥락에서는 좋게 보일 수 있어. 그래서 어떤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항상 가능성의 맥락에 따라 결정돼. 그의 눈엔 고정된 것은 없어. 모든 것에 변화 능력이 있고, 모든 것이 전체 속의 부분이야. 그것도 무수한 전체들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전체의 일부지. 물론 그 친구도 그런 거대한 전체에 대해선 전혀 몰라. 그래서 그의 대답은 모두 부분적인 대답이고, 감정 역시 모두 하나의 견해에 불과해. 어떤 것에서든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상태냐'하는 사물의 양태야. 그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부가적인 것이지. 내가 알아듣게 설명했는지 모르겠군
-98
발터의 설명을 들으면 정말이지 울리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로베르토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소설인지 철학책인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다. 이 문장에서 보면 발터는 울리히를 사물의 본질보다 사물의 양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오늘날 누군가 성 프란체스코나 당신처럼 새들을 형제라 부르고 싶다면, 그건 결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뿐더러 용광로 속으로 뛰어들거나, 송전관을 통해 땅속으로 꺼지거나, 아니면 하수시설을 통해 하수도에 빠질 결심을 해야 한댔어요.
-100
클라리세가 울리히의 말을 전한다.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울리히는 타인뿐 아니라 동물도 함부로 이해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섣부른 공감뿐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사원소에서 수십 가지가 만들어져. 그러다 마지막에 우리는 관계와 사건, 그리고 사건과 공식의 더러운 개숫물 속에서 떠다니고만 있어. 혹은 사물인지, 사건인지, 허깨비 같은 생각인지, 또는 신밖에 모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위를 떠다니지! 그렇게 되면 더이상 태양과 성냥 사이에는 차이가 없게 되고, 소화 통로의 한쪽 끝인 입과 반대쪽 끝도 차이가 없어져! 동일한 사물에 수백 가지 측면이 있고, 한 측면에는 수백 가지 관계가 있고, 또 거기에는 제각각 다른 많은 감정이 들러붙어 있어. 그래서 인간의 뇌는 행복하게 그 사물들을 분리했어. 그러자 사물들은 외려 인간의 가슴을 분리해 버렸어!
-100~101
발터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인간소외를 인식하고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적응하는 것이 맞다고 느낀 모양이다. 숫자가 모든 것을 분리하는 세상에서 순응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외치는 것 같다.
나는 집에 돌아오면 커피를 마시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얼마간 산책을 다녀오고, 이웃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하루를 조용히 마무리할 용기가 있어! 그게 인간의 삶이야!
-101
현대인이 평화롭다고 느끼는 행위를 인간의 삶이라고 발터가 말한다. 그것에도 용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