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뷰 상자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9)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1 -문학동네

by 유병천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35. 레오 피셸 이사와 불충분한 이유의 원칙


이 지인은 그날 아침 집을 나서기 전에 서류 가방 옆면을 열어보고 화들짝 놀랐다. 거기엔 라인스도르프 백작의 회람 서신이 들어 있었는데, 답장하는 것을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가적인 기질상, 높으신 양반들이 추진하는 그런 애국운동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도 "썩은 내 나는 짓거리"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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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피셸은 은행에서 이사 대우를 받는 인물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땐 몰랐지만, 서신을 잊어버린 탓에 평행운동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딸의 친구인 울리히를 만나서 묻는다.


피셸은 이제 권총을 가슴팍에 들이대듯 울리히에게 불쑥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진정한 조국애", "진정한 진보", "진정한 오스트리아"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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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에 적힌 진정한이란 단어가 거슬렸던지 피셸은 울리히에게 묻는다. 울리히는 '불이원'이라고 대답한다.


"불충분한 이유의 원칙이죠!" 울리히가 설명했다. "이사님은 철학자시니까 충분한 이유의 원칙이 무엇인지 아실 겁니다. 자기 자신의 경우만 예외입니다. 우리의 실제 삶, 그러니까 우리의 개인적인 삶과 공적 역사적 삶에서는 그래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는 일이 항상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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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충분한 이유의 원칙이라니. 약간의 말장난 같은 이 표현은 이유가 없는 일이 항상 일어난다는 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효소와 촉매는 물질적으로는 전혀 기여하지 못하지만, 물질들의 진행 과정은 계속 돕습니다. 이사님도 역사를 통해 진정한 믿음, 진정한 도덕, 진정한 철학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그럼에도 전쟁과 그로 인해 야기된 온갖 악덕과 증오가 세상을 오히려 풍요롭게 바꾸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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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의 답변을 보면 실체 없는 요소들이 바꾸어 놓는 현상은 역사 속에 수두룩하게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36. 앞서 언급한 원칙 덕분에 평행운동은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지기도 전에 구체적 현실이 되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라인스도르프 백작조차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고, 그 시점에 백작의 머릿속에 확고히 자리 잡은 유일한 것은 운동에 동참할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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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실체 없는 일을 벌일 때 사람부터 모으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모으면 어떤 일을 도모하기 더욱 용이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포크와 나이프가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야 인류가 예절을 갖추어 식사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 라인스도르프 백작의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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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스도르프 백작의 표현 대로 평행운동보다 평행운동에 참여할 사람을 먼저 모으는 것으로 시작했다.



37. 한 언론인이 ‘오스트리아의 해’라는 용어를 창안하자 라인스도르프 백작은 심기가 무척 불편해져 급히 울리히를 찾다



모호함에는 사람의 정신을 북돋우고 확장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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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함은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명료함은 상상의 날개를 꺾어버린다.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가 명료함이라면, 문학의 언어는 모호함이 어울린다. 어떤 기자가 표현한 '오스트리아의 해'라는 구호가 실체가 없던 평행운동에 엔진을 달아주는 느낌이다. 기자들의 상투적 수법으로 "믿을 만한 고위 소식통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썼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라인스도르프 백작은 자신의 계획이 백성들 한가운데서 자발적으로 치솟는 강력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관련해서 대학, 성직자, 자선 행사에 관한 기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몇몇 이름이 떠올랐다. 심지어 신문들까지 생각해 두었다. 그 밖에 애국 정당들, 황제의 탄생일에 국기를 내거는 시민계급의 '건강한 정신', 금융계 수뇌부의 지원도 염두에 두었으며, 정치계도 이 일에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조국'이라는 공통분모로 정치를 묶은 다음, 나중에 조국이라는 말에서 '나라國'를 빼버리고, '아버지祖' 같은 지배자만 남김으로써 궁극에는 이 위대한 운동으로 정치의 손발을 묶어버릴 계획이었다. 이처럼 많은 것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백작이었지만 생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마치 우연한 화재로 곤충알이 부화하듯 때마침 불어닥친 시대적 온기에 의해 부화해 들불처럼 번지는 세계 개선의 욕구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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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스도르프 백작은 정신적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발명, 이론 세계체계가 봇물 터지듯 쏟아질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주변에는 이런 상황에 대처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판단하고 제목처럼 급하게 울리히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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