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뷰 상자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11)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1 -문학동네

by 유병천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40. 자기 속에 온갖 특성이 존재하지만 그 특성들에 무관심한 남자. 정신의 군주가 체포되고, 평행운동이 명예 사무총장을 얻다



그는 왜 그렇게 선명함 없이 우유부단하게 살았을까? 스스로에게 말했다. 세상에서 동떨어진 이런 이름 없는 현존재의 삶으로 자신을 추방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세상을 풀고 묶는 것’, 즉 한마디로 사람들이 다른 것과 연결해서 쓰기 좋아하는 그 ‘정신’의 강요였다고! 울리히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다. 문득 슬픔이 밀려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야.’ 그는 돌처럼 굳고 얼어붙은 도시의 몸속 깊은 곳에서 자신의 심장이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내면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어디에도 머물려 하지 않았고, 세계의 벽들을 따라가며 세계에 존재하는 수백만 개의 다른 벽들을 느끼고 생각했다. 그것은 천천히 차가워지는 ‘나’라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물방울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불꽃과 미세한 불덩이 핵을 내주지 않으려는 물방울이었다.
-236~237


40장에서는 '정신'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람은 살면서 육체와 정신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육체가 있어서 정신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정신이 있어서 육체가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정신은 현대의 뇌과학이 연구하는 뉴런들의 전기 신호인가 아니면 내면이라고 불리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영역의 것인가.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체에 모두 정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울리히는 세계에 존재하는 수백만 개의 벽 중에 자신의 정신이 물방울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지식은 날마다 바뀔 수 있기에 정신은 어떤 구속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음의 창조 행위가 있기 전까지 일정한 가치를 지닌다. 말을 할 때마다 표정이 바뀌는 것처럼.
이렇듯 정신은 경우에 따라 달리 대처하는 위대한 기회주의자다. 어디에 묶어둘 수도 없다. 어떻게 보면 정신의 영향으로 남는 것은 와해밖에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진보는 개별적으로 보면 이득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분열이다. 또한 힘의 증대이기는 하지만 결국엔 무기력의 증대로 이어질 뿐이며, 그것을 저지할 방법은 없다. 울리히는 거의 시간 단위로 불어나는 사실과 발견들의 몸뚱이를 떠올렸다.
-238


현실의 세계는 새로운 발견과 발명에 의해 바뀐다. 우린 그것을 관찰을 통해서 접할 수 있다. 당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던 사람이 현대의 자동차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혹은 현대에 살던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게 된다면 어떨까? 정신은 현실을 따라 변하는 유동적인 허구에 지나지 않는 걸까? 한 생애를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진보는 얼마나 작은 것일까? 경우에 따라 달리 대처하는 위대한 기회주의자라는 말처럼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정신일까? 시도 때도 없이 변하던 정신이 어떤 종착역을 맞을 때 우린 죽음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신은 어쨌든 충분히 존재하니까 결국엔 정신 자체에 정신이 없는 게 아닐까?
-239


육체의 소멸에 따라 개인의 정신은 소멸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의 죽음 뒤에도 의지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정신은 소멸되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여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인생의 의미를 정신에서 찾을지 육체에서 찾을지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지기도 할 것 같다. 삶의 목표를 위대한 정신의 계승으로 정한 사람이라고 해서 육체의 허기짐을 외면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국가라는 강철 기계에서 끝부분이 버튼과 다른 금속 부품으로 이루어진 말단 돌출부라고 할까? 잘 조직된 국가에서 살아가는 것에는 항상 무언가 섬뜩한 것이 어른거린다. 우리는 법규와 상호 관련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국가기구의 잘 맞춰진 레버들을 건드리지 않고는, 또 그 레버들을 움직이거나 우리의 평화로운 실존에 그 레버들의 영향이 유지되지 않고는 거리로 나가지도, 물 한 잔을 마시지도, 전차를 타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면 깊숙이 촉수를 뻗쳐오는 그 레버들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것들은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고, 그 네트워크의 전체 구조를 푼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기를 부정하며 허공에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 레버의 존재를 부정한다.
-242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떤 구조 속에서 태어나 살아갈 뿐이다. 전쟁 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평생 전쟁을 경험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평화로운 국가에서 태어나 그 시대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전쟁 속에 살아가는 사람도 평화로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도 그 레버를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는 개미만큼도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요하게 안으로 파고드는 오물과 조잡한 세제 사이의 음습한 싸움이 이 공간에도 가득 차 있었다.
-244


습도가 높은 화장실이나 욕실에 곰팡이와 세제가 싸우는 모습이 그려진다. 취객과 경관의 싸움에 휘말려 울리히가 잡혀간 곳에도 그런 냄새가 난 모양이다.


울리히는 유무죄 여부가 드러나기도 전에, 자신을 비인격적이고 일반적인 요소로 해체해 버리는 기계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적으로 빈약할지언정 감정은 풍부한 두 마디, 즉 그의 이름도 여기선 아무 의미가 없었고, 학문 분야에서 평소 굳건하게 여겨지던 명예로운 성취도 이 세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한 번도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246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곳을 좋아한다. 이는 너무도 당연하다. 선량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경찰이나 검찰에 끌려갔다고 생각해 보자. 그곳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더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혐의를 벗어나기 위한 증거만이 필요할 뿐이다. 수학박사 울리히도 얼떨결에 끌려간 파출소에서는 그의 명예나 성취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던 모양이다.


정신의 내적 권위는 파출소장의 외적 권위에 고통스러울 만큼 무기력했다.
-247


울리히는 자신의 처지가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최근 일어나고 있는 평행운동의 사무총장이라는 말을 한다.


이런 사람을 괜히 오래 잡아두었다가 생길 수 있는 책임도 지고 싶지 않았고, 그냥 방면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책임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48


라인스도르프 백작이 울리히를 간절히 찾고 있었고, 경찰서장에게 찾아달라는 부탁까지 해둔 상태라 상위 기관으로 인도된 울리히는 경찰서장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울리히는 자신의 정신이 체포되고 평행운동은 명예 사무총장 울리히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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