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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Sep 04. 2023

제2부 비슷비슷한 일이 일어나다(28)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2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96. 대저술가, 표면의 생각


대저술가의 실존에서 본래적인 어려움은 정신생활에선 장사꾼의 사고방식으로 행동하면서도 오랜 전통의 이상주의적 언어를 사용한다는데서 생겨난다. 상업과 이상주의의 이러한 연결은 아른하임의 삶에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54


사업에서도 인문학이 강조된다. 그 이유는 사업도 인간의 행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의 심리를 알아내고 그에 맞는 아이템을 개발해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 아른하임은 결국 인간의 행동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연구하고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활용하여 대부호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대략 두 세대 전 상용 편지에서 푸른꽃으로 된 미사여구가 장식으로 등장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사랑에서부터 순수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계를 공급과 수요, 담보와 감가율이라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심리학이나 종교적 언어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들 하지 않을 뿐이다. 그 이유는 새로운 언어가 아직 너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야망 큰 금융가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과거의 권력들과 동등한 힘을 가지려면 자신의 일을 위대한 이념과 연결시켜야 하는데, 오늘날엔 아무 이의 없이 믿을 수 있는 위대한 이념이라는 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심과 회의가 판치는 이 시대는 신과 휴머니즘, 왕과 도덕도 믿지 않는다. 어쩌면 이 모두를 믿을지 모른다. 어차피 결과적으로 모두 똑같은 것들이니까.
-154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의 질서'는 아른하임의 생각처럼 결과적으로 모두 똑같을지 모른다. 인간의 발명품 중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것은 아마도 화폐일 것이다.


이제는 위대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위대한 시대가 되었다. 그건 곧 효과적 선전을 통해 위대하다고 소리쳐 알리는 것이 결국 위대한 것으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155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해졌다. 위대하다는 것은 시간이 지난 후 후세들이 과거를 보고 판단한다. 역시 판단하는 사람마다 위대함이 다를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울리히의 말처럼 모든 위대한 것에는 반대되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 아른하임은 자본과 저술활동으로 위대함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아니 그가 주장한 것을 위대하다고 믿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울 것 같다.


아른하임은 자기 시대에 너무 많은 비판을 가하지 않는 것이 위대함의 표식이라고 확신했다! 최고의 말을 탄 최고의 기수라고 하더라도 말과 사이가 좋지 못하면, 볼품없는 말을 타면서도 움직임에 잘 적응한 기수만큼 장애물을 부드럽게 넘지 못하는 법이다.
-155


아마 거의 모든 권력자들이 언론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는 이유일 것이다. 권력자의 행위에 긍정적인 미사여구로 찬양하는 언론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 이면에는 반드시 이권이 존재한다.


자잘한 분석적 정신은 복잡하게 얽히고 느린 음모로 귀결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직관적 종합의 정신은 놀랍도록 천재적인 방식으로 현시대가 자신들에게 제공하는 수단들을 잘 결합시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재빨리 이용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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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 종합의 정신'이란 단어가 무척 낯설다. 오늘날 사업분야에서 스티브잡스가 실행한 것이 직관적 종합의 정신일까? 손에 컴퓨터를 가지고 다니는 시대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97. 클라리세의 신비스러운 힘과 사명


‘인간의 몸이 곧 영혼’이라는 니체의 말만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168


몸과 정신을 구분하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정신이 있더라도 당장 몸이 아프다면 바로 영향을 받지 않을까? 시대마다 삶의 숙제는 '무엇을 믿고 사는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보가 적었던 시절, 많은 시절을 막론하고 결국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클라리세는 인류가 낳은 위대한 천재들이 거의 항상 수난을 겪었다는 사실도 안다. 자신의 삶에서 많은 시간이 마치 무거운 판에 깔린 것처럼 납덩이 같은 무거운 압력에 짓눌리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매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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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 고통을 받는 시간은 정말 길게 느껴지지만, 평온한 상태가 되면 다시 빠르게 느껴진다. 통속적인 말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그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사실이다. 우린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간다. 물론 아무리 소중하게 살아간 시간도 매번 지나갔다.


그녀는 발터에게 울리히를 죽이라고 했다. 물론 실제로 죽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자신도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그를 자기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만큼은 분명했다. 무슨일이 있더라도.
그와 싸워야 했다.
웃음이 났다. 그녀는 코를 문질렀고, 어둠 속을 서성거렸다. 평행운동과 관련해서 무언가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174


클라리세는 울리히에게 어떤 특성을 부여하고 싶은 걸까? 싸워서라도 그를 자기 밖으로 끌어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고민을 하는 시간에 발터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등장인물 중 가장 이해가 어려운 캐릭터는 클라리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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