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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Nov 08. 2023

제3부 천년제국으로(범죄자들)(3)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3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8. 2인 가족


울리히가 말한다. “두 남자나 두 여자가 꽤 오래 한 공간을 같이 쓰다 보면, 예를 들어 함께 여행을 가서 침대칸이나 만원 여관에 함께 묵을 때면 이상하게 친밀감을 느끼는 경우가 드물지 않아. 입을 헹구거나, 신발을 신을 때 몸을 숙이거나, 침대에 누울 때 다리를 구부리는 방식은 사람마다 달라. 속옷을 비롯한 의상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다 같아 보여도 개별적으로 눈에 드러나는 자잘한 차이는 수두룩해. 물론 처음엔 저항이 있어. 오늘날의 생활방식에 깊이 뿌리내린 개인주의가 지나치게 팽배한 영향으로 보이는데, 가벼운 혐오와도 같은 이 저항은 너무 가까이 다가온 타인으로 인해 자신의 개성이 손상되는 것을 거부하지. 그러다 거부감도 극복되면 흉터처럼 이례적인 것에 뿌리를 둔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겨나. 이런 변화를 겪고 나면 많은 사람이 그전보다 더 쾌활해져. 거기다 대부분의 사람이 순박해지고, 많은 사람이 수다스러워지고, 거의 모두가 다정해지지. 개성이 변한 거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어. 살갗 아래에서 좀 덜 개성적인 무언가로 교체되었다고. 그러니까 자아의 자리에, 무언가 불편하고 줄어든 느낌이 확연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는 ‘우리’라는 첫 싹이 튼 거지.”
 아가테가 대답한다. “타인과 가까이 지내는 데서 오는 혐오감은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심해요. 나는 이제껏 여자한테 적은한 적이 없어요.”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혐오감은 있어. 즉각적인 관심을 요구하는 ‘사랑’이라는 거래의 의무에 가려질 뿐이지. 그런데 거기 엮인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미망에서 깨어나 생판 처음 보는 것 같은 사람이 옆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아주 낯설어하곤 해.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그걸 놀라움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고, 아이러니나 도주의 충동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어. 심지어 오랜 세월을 같이 산 사람들 사이에도 그런 일은 많아. 그 순간이 찾아오면 그들은 타인과의 연결이 자신에게 더 자연스러운지, 아니면 이 연결에서 벗어나 상처 입은 채 자신의 유일성에 대한 환상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지 판단할 수가 없어. 물론 둘 다 우리의 본성 속에 있지. ‘가족’이라는 개념 속에는 이 두 가지가 뒤엉켜 있어! 가족 속에서의 삶은 결코 완벽한 삶이 아냐. 젊은 사람들은 가족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무언가 빼앗긴 것 같고, 자신의 개성이 줄어든 것 같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아. 늙은 노처녀가 된 딸들을 봐. 그 사람들은 가족에게 진액을 빨리고 빼앗겨. 그러다 ‘나’와 ‘우리’가 뒤섞인 기묘한 중간적 존재가 생겨나.”
-79~80


울리히와 아가테가 이야기를 나눈다. 공간이 주는 느낌이 참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남매 사이에도 '우리'가 싹트는 것 같다.


중단했던 수학 관련 연구를 계속했다. 물론 무언가 성과를 기대했다기보다 시간을 때우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불과 몇 시간도 안 되는 오전 동안에 몇 달간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던 문제들이 사소한 것들만 빼고 모두 풀린 것이다. 이런 예기치 않은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규칙 밖에 머물러 있던 여러 자유로운 생각들 중 하나였다. 이런 생각들은 기대하지 않게 되어서야 찾아온다기보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깨달음처럼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듯 쑥 들어왔다.
-85


인튜이션(intuition)이라고 하는 직관을 말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고민하던 문제가 어느 순간 풀리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깨달음과도 같은 이 느낌을 인튜이션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순간은 한 분야를 많이 공부한 사람이 우연히 다른 분야를 겪고 나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운명은 인생의 노래에 속한다. 그래서 운명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면서.
울리히가 대답했다. “훗날 더 많은 정보가 알려지는 시대가 오면 운명이라는 말은 아마 통계적인 성격을 띠게 될 거야.”
-86~87


울리히의 예감처럼 오늘날 운명은 통계적인 성격을 띨지도 모르겠다. 많은 것을 숫자로 환산하는 시대이다. 심지어 고통도 수치화한다. 머지않아 사랑도 숫자로 만들지 않을까? '나는 너를 70%만 사랑해'처럼 말이다. 아니면, '넌 내 운명 수치의 28% 밖에 안 되는 존재야!'


객관적으로 보면 과학의 발전을 포함해서 세상 모든 일은 내가 개입하든 말든 별 차이가 없어. 놀라워 보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야. 가령 내가 우리 시대를 십 년 정도 앞섰을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없이도 우리 시대는 좀 더 느린 다른 길을 통해, 내 덕에 기껏해야 조금 더 빨리 도착했을 지점에 오게 돼 있어. 반면에 내 인생에서 그런 변화가 내게 목표를 넘어서게 할 새로운 자극이 되어줄지는 의문스러워. 결국 사람들이 개인적인 운명이라 부르는 것을 일부 갖고 있어도, 무언가 아주 비개인적인 것에 이르게 돼 있어.
-88


엄청 슬픈 말이다. 덧없다는 표현처럼. 인생을 살다가는 의미를 찾다가 결국 죽음의 문턱에서 후회와 추억만을 남길 수 없다는 사실처럼. 개인의 삶도 거시적으로 볼 땐 인구가 한 명 줄어든 것일 테니 말이다.


앞서 우리가 운명에 관해 말했던 걸 생각해 보자면 운명도 두 개가 있는 것 같아. 삶의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활발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운명, 그리고 우리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운명, 이렇게 둘 말이야.
-91


경험할 수 없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중요한 운명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두 번째 운명을 찾아 헤매는 곳이 세상이 아닐까. 첫 번째 운명에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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