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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Dec 08. 2023

제3부 천년제국으로(범죄자들)(6)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3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2. 성스러운 대화. 변화무쌍한 속행


“그들이 오직 현상에만 머물고 달콤한 확신으로 날조된 판단에 개입하지 않는 한 그들은 신을 직접 체험할 인간으로서 신에 의해 선택된 거야. 당연히 이 순간부터는 묘사하기 힘든, 명사도 동사도 없는 지각 상태를 이야기하지 않고 대신 주어와 목적어를 갖춘 문장으로 우리에게 말해. 자신들의 영혼과 신을 마치 그 사이로 기적 같은 세계가 펼쳐질 두 개의 문기둥처럼 생각하거든. 그래서 그들은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 주님 속에 가라앉았다거나, 주님이 연인처럼 자기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주장하지. 혹은 신에게 잡혀 삼켜지고 눈멀고 강탈당하고 강간까지 당했다고 말해. 아니면 그들의 영혼이 주님에게로 넓혀지고 주님 속으로 밀고 들어가 주님을 맛보고 사랑으로 껴안고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말도 해. 여기에 세속적인 본보기가 있음은 실제로 명백해. 이런 묘사들은 이제 그 엄청난 발견을 닮은 게 아니라 단지 관능적인 시인이 하나의 견해만 허용되는 대상을 꼭 그렇게 치장해 놓은 천편일률적인 이미지와 비슷할 뿐이야. 어쨌든 이런 보고는 신중함을 몸에 익혀온 나를 안달 나게 해. 왜냐하면 그 선민들은 신이 말을 걸었다거나 자기가 나무와 동물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장담하는 순간에도, 무슨 메시지를 전달받았는지는 이야기하려 들지 않거든. 설사 어쩌다 입을 연다고 해도 그저 개인적인 문제를 털어놓거나 익히 아는 교회 소식을 전하는 데 그쳐. 정확성을 훈련받은 연구자들이 그런 환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정말 유감일 따름이지!”
-138~139


증명할 수 없는 미지의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자의 접근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하기란 어렵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동화가 풍자하듯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옷과 같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칫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시선을 받을까 두렵기 때문에 임금의 옷이 멋지다고 말하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녀는 충격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특별한 믿음이나 생각 없이, 그저 고독한 본성의 완강함과 몽상의 특별한 능력에 힘입어 공허한 놀람의 순간 이후 이 사건을 내면적으로는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처럼 다루었다. 이런 경향은 좋지 않은 소식을 믿지 않으려 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주는 충격을 완화하려고 할 때 모든 인간에게 비슷하게 나타난다.
-143


인간에게는 방어기제가 작동한다고 한다. 방어기제 이외에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망각이다.


그것은 불가능성과 부자연스러움의 위험을 지나(늘 지나쳐가지는 못할 수도 있다) 가능성의 극단으로 향하는 여행이다. 나중에 울리히는 이것을 ‘경계사례’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제한적이고 특수한 유효성을 지닌 것으로 수학이 진리에 이르기 위해 가끔 지극히 불합리한 영역을 활용할 때의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 울리히와 아가테는 신에게 빠진 신이나 영혼에 대한 믿음 없이, 심지어 피안이나 내생에 대한 믿음조차 없이 그 길을 걸었다. 그들은 이 세계의 인간으로서 그 길에 접어들어 그 길 자체를 걸었다.
-149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꼭 특별한 이유나 목적 없이도 그저 살아간다. 그것이 특별히 잘못된 것도 아니고 잘된 것도 아니다. 수많은 선택에 직면해서 어떠한 판단을 하는가에 따라 방향이 달라질 뿐이다. 대부분의 선택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많다. 자신에게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하기도 한다. 얻은 것과 잃은 것 사이를 방황하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존재가 인간이고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말하지 않은가.


“보통 기억은 인간과 함께 늙어가.” 그가 그녀에게 설명했다. “아무리 열정적인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마치 뒤로 잇따라 열린 아흔아홉 개의 문처럼 원뿔형으로 보이기 마련이지. 하지만 아주 강렬한 감정과 연결된 사건일 경우 개별적인 기억은 가끔 세월과 함께 늙어가지 않고 그 사건의 본질적인 층위를 고수하곤 하지. 네 경우가 그래. 마음의 균형을 약간 일그러뜨리는 그런 지점들은 거의 모든 인간들 속에 있어. 사람의 행동은 보이지 않는 바위 위로 흐르는 강물처럼 사건들을 타고 계속 흘러가. 그런데 네 경우는 그게 너무 강해서 거의 정지 상태처럼 된 거야. 하지만 결국 너도 너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어!”
-155


자신을 묶어두는 것은 자신이다. 트라우마를 떠올려봐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기억에 속박되어 사는지 알 수 있다. 그것에 대해 담대하게 헤쳐나가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너무 큰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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