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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Jan 13. 2024

제3부 천년제국으로(범죄자들)(14)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3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19. 모스브루거 앞으로!


우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소. 그건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한 사실이오. 우린 그걸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렇게 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할 수도 있다’는 우리의 심리 상태를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뿐이오. 우리는 투표용지의 시대에 살고 있오. 매년 우리의 성적 이상과 미의 여왕을 벌써 투표용지로 결정하고 있어요. 우리가 경험과학을 정신적 이상으로 삼았다는 건 우리 대신 선택하라며, 이른바 사실이라는 것에 투표용지를 쥐여준 것이나 다름없소. 우리 시대는 비철학적이고 비겁해요.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할 용기가 없어요.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일어나는 대로 살라!’로 정리할 수 있소. 덧붙이자면 그건 인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순환논법 중 하나일 거요.
-264


민주주의의 가장 큰 단점은 이로운 의견이 다수에 의해서 선택받지 못하는 것이다. 공리주의는 다수의 행복을 중시한다. 다수가 선택하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100년 전의 카카니엔도 투표용지의 시대였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무질이 표현한 '일어나는 대로 살라'는 민주주의를 대변한다는 말이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20. 라인스도르프 백작이 자본과 문화에 의구심을 품다


“자네도 겪은 일이지만 내 집 앞에서 폭도들이 그렇게 고함을 친 덕분에 우리는 이제야 정말 ‘국내 행정 개혁과 관련한 백성들의 소망 수렴위원회'를 발족할 수 있게 되었네. 총리조차도 당분간 우리가 그 위원회를 맡아줬으면 하고 바라셨어. 우리의 애국운동이 제법 폭넓게 신뢰를 받고 있다는 이유를 들더군.”
울리히는 진지한 얼굴로, 어쨌든 위원회의 이름이 아주 좋고 확실한 효과가 나타날 거라고 장담했다.
-276


위원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할까? 수없이 많은 위원회가 존재하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위원회에 기대하는 갈망을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이 세분화되고 다양화된 시대에 개인은 의사결정에 어려움을 느낀다. 민주주의가 투표용지에 결정을 위임하듯 전문분야의 일은 위원회에 결정을 위임한다.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전문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결정이 개인이 내리는 결정보다 나을 거란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 뭔지 아나? 인간들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네. 문화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즉시 배척해 버리지. 예를 들어 교양 있는 사람은 절대 나이프로 소스를 떠먹지 않네.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런 건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네. 그냥 예절이라고 할 수 있지. 예절은 문화가 우러러보는 특권층에 뿌리를 두고 있네.
-286


우리는 문화라는 단어를 무척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문화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인간들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라는 점은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학습을 기반으로 한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많은 것들도 결국 문화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시 정신분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요?’ 추기경이 묻더군. 내가 대답을 못하자 추기경이 말했네. ‘각하는 정신 분석을 개수작이라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르죠. 그걸 갖고 논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들 하는 소리니까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 성당의 고해소보다 이 신식 의사들을 더 자주 찾아갑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 떼 지어 몰려갑니다. 육신은 약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의사들에게 자신의 은밀한 죄악을 털어놓고 상담합니다. 그러고 나면 만족감이 찾아오지요. 심지어 그 의사들은 환자들이 욕하는 것까지도 다 들어줍니다! 나는 그 불경한 의사들이 스스로 발명했다고 믿는 것이 따지고 보면 우리 교회가 초창기에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악마를 몰아냄으로써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료하는 방법 말입니다.
-288


과거의 종교인이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는 문장이다.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 행해졌던 일들이 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일까? 특히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악마를 몰아냄으로 사람을 치료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아마 라인스도르프에게 하소연하는 추기경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


다만 우리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달라진 수요에 제때 적응하지 못해, 악마니 오물이니 하는 말 대신 정신병이니 무의식이니, 혹은 오늘날 유행하는 여타 개념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모를 뿐입니다.
-288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언어로 귀결된다. 추기경의 언어에는 정신분석학 의사의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표현되는 언어는 관점을 대변한다. 현대에 공감을 얻는 언어는 아무래도 악마나 오물보다 정신병이나 무의식이란 언어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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