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과류 제품 이름 때문인지 '설렘'을 '설레임'으로 잘 못 쓰는 경우가 있다. 단어의 표기법을 알고 쓰든 모르고 쓰든 그 의미는 같을 것이다. '설렘'이란 단어를 들을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난 '잊고 사는 감정'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설렘'은 경험과 가장 많은 연관성이 있다. 어떤 일이든 처음 한 것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첫사랑, 첫 키스, 첫 여행, 첫 직장, 첫 공연, 첫 시합 등 경험하지 못한 것을 시도할 때 드는 감정이 설렘이다.
설레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새로 도전하는 일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 '일상'이란 단어가 아름다우면서도 지루한 이유는 일상에서 설레는 일을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은 평소엔 별로 감흥이 없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서 설레는 경우도 있다. 난 탁구라는 종목이 그랬다. 평소 운동이라도 조금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점심시간에 탁구를 쳤다. 당시엔 탁구를 쳤다기보다는 공을 맞춰 네트를 겨우 넘기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몇 년을 무료하게 탁구를 치다가 우연히 회사근처에서 개최하는 탁구 대회를 알게 되었다. 마음속에 뭔가 모를 뜨거운 것이 꿈틀거렸다. 탁구채를 새로 구입하고 러버도 새로 샀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당시에 난 펜홀더 라켓으로 탁구를 쳤다) 접수비를 납부하고 대회날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엔 마음이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대회 당일. 넓은 실내 체육관에 펼쳐진 탁구대들을 보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3명이 예선 리그를 치르고 1명이 탈락하고 2명이 본선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첫 경기는 그야말로 졸전이었다.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공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다행히 상대도 처음 출전한 사람이라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겨우 1승을 올렸고 두 번째 경기는 상대도 안 되게 패했다. 첫 출전은 본선 1차전에서 탈락했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출전한 첫 대회의 경험은 싱겁게 끝났다. 한 번 실패로 좌절할 순 없어서 지역에서 열리는 구청장배 대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성인이 되어 이사 온 동네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던 나는 집 근처에 있는 탁구장을 찾아갔다. 회사 점심시간 때 동료들하고만 탁구를 치기 때문에 다양한 상대를 만날 수 없다는 단점을 극복하고도 싶었다. 토요일 점심 이후에 찾아간 동네 탁구장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키가 작은 여성 탁구 동호인이 탁구장에 들어왔다. 혼자 뻘쭘하게 앉아 있을 때 같이 치자고 제안해줬다. 가볍게 목례 후 랠리를 시작했다. 랠리의 시작과 동시에 좌절감이 찾아왔다. 평소와 다르게 탁구공이 네트에 계속 걸렸다. 긴장을 한 탓이리라. 더욱 집중해서 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여성 동호인은 호쾌하게 웃으며 혹시 핌플 하고 쳐본 적이 없냐고 물었다. 자신은 한쪽 면을 숏핌플로 붙였다고 했다.(셰이크핸드 방식은 탁구라켓의 양쪽 면에 러버를 붙인다. 핌플 러버는 오돌톨하게 돌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돌톨하게 튀어나온 부분 길이에 따라 숏핌플, 롱핌플로 나뉜다) 몇 년 동안 탁구를 쳤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탁구를 못 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접수해둔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 매주 토요일엔 동네 탁구장에서 평일 점심시간엔 회사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동네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사람의 성격이 다르듯 다양한 구질을 만날 수 있었다. 지역 대회를 준비하며 동네 탁구장에서 얼굴을 익히며 구청장배 대회에 함께 나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미 개인으로 접수했다고 하니, 변경할 수 있다며 함께 출전했다. 같은 이름을 달고 나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경기를 할 때 뒤쪽에서 응원을 해주고, 나도 경기가 없을 땐 다른 동호인을 응원했다. 예선 경기는 비교적 쉽게 통과했다.(이 때도 처음 출전한 상대를 만났다) 하지만, 본선 1회전에는 중학생을 상대로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하고 패했다. 상대는 내 왼쪽 수비가 약한 걸 알고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평소에도 뻣뻣한 몸 때문에 왼쪽 수비가 잘 되지 않았는데, 역시 그 부분을 공략하니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출전한 첫 지역대회도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대회를 치르고 난 변화를 결심했다. 펜홀더 방식을 버리고, 셰이크핸드 방식으로 전환했다. 처음엔 어색하더라도 뻣뻣한 몸을 바꾸는 것보다는 쉬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난 셰이크핸드 방식으로 바꾼 후 탁구가 재미있어졌다. 유연성을 찾아볼 수 없는 몸을 과도하게 뒤틀지 않아도 되고, 평면 러버라도 성질이 조금 다른 러버를 붙이고 경기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젠 연중행사처럼 지역구 대회에 출전하지만, 처음 출전 때처럼 설렘의 감정은 없다. 입상을 목표로 매번 출전한 대회에서 난 16강 혹은 8강에서 좌절을 맛보며 계속 탈락했다. 칠전팔기라고 했던가, 지역구 대회에서 3위를 하는데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탁구가 일상이 되어버렸는지 이젠 설렘이 사라졌다. 대회에 출전해도 재미가 없고, 오히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졌다. 첫 출전의 설렘이나 입상의 감격은 일시적인 감정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낄 뿐이다. 추억거리 하나를 만들었다는 것엔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세월을 추억하려고 해도 그다지 생각나는 일이 별로 없는 걸 보면 그런 추억의 소중함도 충분한 가치가 있으리라. 이젠 대회나 상장보다 주말에 동호회 사람들과 만나서 막걸리 내기를 하며 탁구 치는 것이 더욱 좋다. 건강을 위해서 탁구 친 후 마시는 한 잔의 막걸리는 그야말로 꿀맛이다.
설렘 이후 남는 것들 혹은 얻는 것들은 소중한 추억과 만나면 반가운 사람들이 아닐까.
유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