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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니아니 May 26. 2022

#22 네팔의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대안학교 10년차 엄마의 리얼체험기



네팔 지역의 어우러히 마을은 불가촉천민(untouchable) 2만여 명 정도가 모여 사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인도의 힌두교도들의 카스트 계급안에 속하지도 못하는 하층민들 중에서도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힌두교가 자신들을 카스트라는 울타리에서 제외시키고 ‘불가촉’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사람들은 대대로 힌두교도들이 대부분입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인이 단 한명도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가 중심인 지역에서 기독교의 선교활동은 어찌보면 아무런 의미없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마을에 한국인 선교사님 한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조상 대대로 자신들이 천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을 깨고 누구나 동등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그 선교사님은 그들과 함께 마을에서 살고 생활했습니다.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지역민들의 생계를 위해 딸기 농사를 짓는 방법도 알려주었습니다. 가난과 무지에 찌든 마을 사람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습니다. 학교조차 없었던 그 마을에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는 부모들이 일터에 나간 후에 아이들이 와서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 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아교육에 꿈과 비전을 품고 있던 H가 네팔의 어우러히 마을 아이들을 만난 것은 대안학교 10학년 겨울방학때였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가치 수업’ 시간에 인권을 주제한 그룹 스터디가 있었습니다. 청소년, 새터민, 아동 인권 등을 조사해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H는 ‘소외된 아동들의 인권’에 대해 연구하고 발표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조사하고 토론을 준비하면서 문득 고모가 선교하고 계시는 네팔의 어우러히 마을 아이들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아동들의 인권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보잘것 없어 보였습니다. ‘네팔의 아이들에게도 인권이라는 것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이르자 H의 생각 속에는 어우러히 마을 아이들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마을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도울 방법에 대해 생각하다가 친구와 직접 네팔로 봉사활동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을에 가서 선교사님도 만나고 무엇보다 마을 아이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네팔에 계신 선교사님의 초청장을 받고 나서 출국날짜를 기다리는 동안 H는 ‘너에게 줄게’라는 단기 프로젝트를 구성하고 진행했습니다. 전교생들로부터 쓰지 않는 색연필과 색깔펜을 모으는 프로젝트 였습니다. 먼저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각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의 프로젝트의 목적과 가치를 설명했습니다. 반별로 가장 많은 색연필을 모아준 반에는 과자 한박스를 경품으로 걸기도 했습니다. 유치원때부터 쓰다 남은 각종 크레파스, 색연필, 연필, 색깔펜, 지우개, 색종이 등등이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H와 친구 C는 네팔로 가는 비행기에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네팔의 어우러히 마을의 첫인상은 마치 버려진 땅처럼 황량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히말라야가 가까운 네팔의 강추위는 두꺼운 패딩이 무색할 만큼 뼈속까지 찬기운을 몰고 들어왔습니다. 비행기에 내린 후에도 마을에 도착하기 까지는 꼬박 하루를 걸려 버스를 타야했습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거리에 어슬렁 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들 대부분이 여기저기 구멍이 난 얇은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고 신발도 없이 맨발로 땅을 걸어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겨울 외투는 고사하고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얇은 티셔츠 하나로 한겨울 네팔의 추위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워낙 고산지대 추위에 익숙해져서 얇은 옷을 입어도 생각보다 추위를 덜 탄다고 설명을 듣긴 했지만 두꺼운 패딩을 입고도 추위에 떨던 자신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H는 선교사님이 세운 교회에서 마을 아이들을 위한 아트수업을 시작했습니다. 5세부터 13세의 모든 마을아이들이 학교에서 열리는 아트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색칠 공부와 만들기 수업을 위해 미래 한국에서 준비해간 각종 색연필과 크레파스와 도안들이 아트 수업을 하는 아이들을 신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마을 아이들은 그날 난생 처음으로 다양한 색깔의 연필을 구경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8시에 시작되는 아트수업을 듣기 위해 한시간 반 전부터 학교 앞에 50명 정도의 마을 아이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등에 어린 동생을 업고 있는 소녀도 있었습니다.


교실과 책상이 좁아서 30명이 들어가기에도 빠듯한 공간에 5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두 들어와 앉았습니다. 4명이 앉기에도 비좁은 벤치는 7명이 끼어 앉아 있는데도 아이들의 표정은 다채로운 색깔펜과 다양한 그림 도안 때문인지 연신 밝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먼 나라에서 자신들을 찾아와 준 외국인의 얼굴도 신기하고 처음 경험하는  아트수업도 신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아트수업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습니다. 이 마을의 부모들은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대부분 누군가 입다가 버린 옷을 부모들이 주워다가 입힌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꿈’이 뭔지도 모른채 어른이 되고 자신들의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아이들 버려두고 일터로 나가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H는 이 아이들에게도 꿈을 펼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10박 11일 동안 마을에 머물면서 아이들과 함께 간단한 악기도 만들고 전통놀이도 함께 했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통하는 아이들과 몸짓으로 웃음으로 대화하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전했습니다. 마을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한국에 돌아온 H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네팔 어우러히 마을아이들을 후원하기로 결심하고 작은 NGO단체인 ‘로뎀나무’를 만들었습니다. 네팔에 다녀온 두 명의 소녀가 시작한 ‘로뎀나무’는 곧 다섯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네팔에 있는 동안 선교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몇 년이 지나면 학교 아이들에게 꼭 교복을 맞춰 입히고 싶다는 소망을 들었습니다. 그 마음속 비전이 ‘로뎀나무’ 아이들의 마음속 울림이 되었고 그렇게 해서 로뎀나무의 첫번째 프로젝트는 ‘교복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5세반 아이들부터 교복을 후원해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모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학교 신문과 잡지에 네팔 아이들의 상황에 대한 글을 기고했고 영상을 제작해서 부모님들에게도 기회가 될 때마다 로뎀나무의 가치와 비전에 대해 설명하고 펀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5세반 아이들만을 위해 시작한 교복후원 프로젝트에 놀랍게도 정말 많은 후원금이 모금되었습니다.  어우러히 마을 학교 아이들 전체에게 교복을 입힐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이 모아졌고 네팔의 학교로 후원금을 전달했습니다. 이듬해에 두 번째 어우러히에 방문했을 때에는 로뎀나무의 후배들과도 함께 했습니다. 학교 아이들이 모두가 교복을 입고 밝게 웃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H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3년 동안 로뎀나무 NGO 활동를 계속했습니다. 교복 이외에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유치원 가방들을 모아서 네팔에 보내주는 등 지속적인 후원활동을 했고 졸업이후에는 자신의 꿈을 좇아 유아 교육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두 명의 고등학생들의 사랑과 섬김이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네팔의 소외된 마을 아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전해주고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대학생이 된 H는 여전히 네팔의 아이들을 기억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고난 중에 있을 때 로뎀나무 아래에서 위로와 쉼을 얻었던 것처럼 소외된 이 세상의 많은 어린 아이들이 로뎀나무를 통해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열심히 꿈을 향해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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