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아름다운 시절의 책읽기
대안학교 10년차 엄마의 리얼체험기
저에게 책읽기의 즐거움을 일깨워 주신 분은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국어 선생님이었던 그분이 수업시간에 들려주셨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어찌나 실감났던지 당장이라도 책을 펴들고 결론을 읽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책 이야기를 하실 때면 얼굴가득 미소가 퍼지는 듯 했고 안경 너머 눈빛은 유난히 더 반짝였습니다. 책 이야기로 빛났던 선생님의 눈빛을 떠올려보면 그 선생님이 얼마나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사춘기의 시작은 중학교 2학년의 어느날 엄청난 고뇌를 몰고 갑자기 찾아온 소용돌이 같았습니다. 지금도 그 서막의 시작의 기억이 또렷합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건가?’ 이런 철학적인 질문들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면서 저를 괴롭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없었고 마치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처럼 불안에 떨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가고 다시 집에 오고 다음날 다시 학교 가고 집에오는 지극히 단순함 그 자체였던 삶 속에 뭐가 그리도 고뇌할 게 많았는지 사춘기 시절의 저의 모습이 엉뚱하기도 하고 우숩기도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하루 아침에라도세상이 뒤바뀔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부모가 자신의 사춘기 시절의 마음 상태를 고스란이 기억할 수만 있다면 자녀들의 기상천외한 행동들이나 감정 상태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매일 고뇌과 고심속에 살아가던 제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꼈던 시간은 국어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이나 A.J. 크로닌의 <고독과 순결의 노래>와 같은 성장 소설을 자주 읽어주셨습니다. 그 시간이면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어지곤 했습니다. 그 외에도 <어린 왕자> <꽃들에게 희망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아낌 없이 주는 나무> 와 같은 책들은 그때 만났던 책들입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사춘기의 고독한 감성을 달래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속 주인공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이야기는 정말 특별했습니다. 주인공은 분명이 두 사람인데 마치 한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 두 주인공이 모두 저의 마음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상상이 되곤 했습니다. 사춘기 인생의 고민때문에 늘 걱정속에 빠져있던 저를 어느날 담임선생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oo아 너는 지금 아주 잘 살고 있고 잘 해나가고 있어. 지금처럼만 하면돼.” 어두운 터널과 같았던 제 마음에 선생님의 격려는 그 어떤 해답보다 명쾌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음 속으로 혼자만 끙끙 앓고 있던 고민을 어떻게 선생님이 아셨을까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덜 하게 되었고 대신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책들을 더 열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는 책에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 많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책 속으로 빠져드는 깊이 읽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책읽기가 그리워집니다. 어린 시절 특별히 책을 사랑하던 선생님과의 인연 덕분에 지금까지도 책읽기를 좋아하고 즐겨하게 된 것을 정말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책읽기의 즐거움과 가치를 알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어느 부모나 다 비슷할겁니다. 아이들이 품안에 있을 때는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많이 읽어 주다가도 점점 자라서 10대가 되면 더이상 책을 읽어줄 기회가 흔치 않습니다. 지금도 이따금 추억삼아 딸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도 하지만 그저 정겨운 주말 하루의 풍경일 뿐입니다.
결국 책과 친해지고 책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성장하면서 아이들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는 자신들의 몫인것 같습니다. 좋은 독서의 습관을 기르고 책읽기의 즐거움을 알아갈 수 있는 어린 시절의 독서 환경은 아이들의 평생의 책읽기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오면서 학교에서 읽던 책들을 저도 관심있게 봤습니다. 중학교 때는 학교의 독서 프로그램인 ‘다니엘의 서재’ 도서 목록이 있었는데 선생님들이 그곳에 단계별로 좋은 책들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흥미로운 책들을 꾸준히 찾아 읽던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독서의 수준이 높아졌고 거의 모든 수업과 활동에 참고자료용 책들을 읽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침이면 기숙사에서 나와 교실로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아침독서입니다. 30분 동안 책을 펼쳐놓고 오로지 책과 독대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독서에 집중했습니다. 우선 선생님들이 다 함께 독서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고 아이들도 각자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침 독서 시간의 분위기는 언제나 진지했습니다. 독서도 감기처럼 전염성이 강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누군가 옆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책에 손이 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매일 아침 책으로 하루를 시작하다 보면 다른 친구들보다 유독 책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의 독서량과 독서수준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놀라울 만큼 향상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해마다 학교에서 열리는 ‘독서캠프’는 책과 함께 펼치는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보통 일주일에서 한달동안 캠프가 진행되는데 캠프 때마다 특별한 주제가 정해지고 주제에 맞는 다양한 독서활동을 하게됩니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책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여러가지 활동들을 미리 계획하고 모든 아이들의 참여를 적극 유도합니다. 보통 독서캠프 하면 딱딱한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했던 캠프는 신나고 즐거운 축제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강당에서 웃고 뒹구는 캠프 사진을 보면 독서캠프인지 체육대회인지 언뜻 구분이 안될만큼 역동적인 시간이었지만 캠프가 끝날때마다 아이들을 책읽기에 대한 동기부여와 영감을 해마다 받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독서가 지루하고 많은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따분한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호흡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아이들의 인식 속에 넣어주려는 교사들의 소망이 가득 담긴 축제였습니다. 아이들이 졸업할 무렵까지 전교생들이 공식적으로 기록해야할 서평의 권수가 있습니다. 중학생은 60권, 고등학생은 40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기록해야 합니다. 서평쓰기는 학교의 졸업 요건이기 때문에 한번에 몰아서 쓰든 천천히 3년에 나누어 쓰든 상관은 없지만 어쨌든 모든 아이들이 써야하는 것입니다. 중학생들에게는 3년에 60권을 읽고 써야하는 서평의 양이 많게 느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꾸준히 책을 읽고 에세이를 써야하는 환경 속에 있던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중에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을 빚어온 책들을 소개하면서 ‘인생의 모든 순간 책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노장의 인생 이야기가 읽을 때마다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역시도 독자들에게 평생에 걸쳐 읽고자 하는 고전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 두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면 당장 많은 고전을 읽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자신이 정해둔 고전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 둘씩 다가오는 날이 있다고 말합니다. 학창 시절에 우리 아이들이 그런 보물과 같은 인생의 책을 발견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책을 사랑하며 평생 책과 함께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경이로운 삶일 것입니다.
둘째 아이가 5학년에 처음 입학했던 해에 담임 선생님은 박완서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을 가지고 국어시간에 슬로우리딩 학습을 해주셨습니다. 아이들이 그냥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 사전을 펼쳐놓고 책 속에 등장하는 단어의 뜻을 찾기도 하고 실제로 싱아풀을 찾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산을 오르기도 했습니다. 비록 싱아를 찾지는 못했지만 선생님과 아이들은 마을에 피어있는 진달래 꽃을 따서 화전도 만들었고 보리수 열매나 산딸기를 함께 따먹기도 했습니다. 책과 자연을 넘나들며 다채롭게 읽었던 한줄 한줄의 이야기가 지금도 아이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책읽기에 대한 기억은 재미있고 행복한 활동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때 함께 읽은 책의 내용으로 대화할 수 있었던 기억도 그때가 아니면 다시 할 수 없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고등학생 정도가 되면 아이들 스스로가 독서 동아리를 만드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이나 프로젝트 활동을 위해 읽어야하는 책들 이외에도 아이들 스스로가 팀을 만들어 꾸준히 서평을 쓰고 토론하는 일들도 자연스러워 졌습니다. 학교 잡지의 책소개 코너인 ‘별무리 북마크’에는 고등학교 동아리 친구들이 매번 직접 추천 도서를 선별해서 올려주었습니다.
고등학생 아이들이 소논문을 쓸때나 학술적 글쓰기를 통해 수준 높은 결과물들을 낼 수 있는 것도 어릴때부터 책을 가까이 하는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어린 시절 책과 함께 했던 그 소중한 추억들이 한층 더 귀하게 깨달아 질 날이 올것입니다. 아이들이 책을 들고 읽는 모습을 옆에서 볼때마다 가장 좋은 독서교육은 부모가 늘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을 더욱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