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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하 Feb 15. 2019

네? Looks good 이라고요? 제가요?

빈에서 헌팅당한 이야기

Excuse me...


경보처럼 빠른 잰걸음으로 걷고 있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한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동양 남자다. 한중일 3국 중 하나일 텐데, 순간적으로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스캔을 완료한 후 결론을 냈다. 


‘한국인이다.’






그날은 토요일, 다음 날이면 잘츠부르크로 떠나야 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슈테판 성당 앞 케른트너 거리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평소만큼의 관광객과 여행객, 그리고 주말을 즐기기 위해 시내로 나온 빈의 시민들이 모두 뒤섞여서 그만한 인파를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었다. 친구와 나 두 사람이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시내 카페는 만석이었다. 평년보다 웃도는 기온에, 수많은 인파까지...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결국 우리는 일찍 숙소로 들어가기를 택했고 숙소에서 낮잠을 자며 휴식을 취했다. 


“나 야경사진 찍으러 나갈 건데, 같이 나갈래?”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내가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묻자 친구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친구는 체력이 나보다 약한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BMW(Bus, Metro, Walking)를 주로 이용했고, 친구는 자차 운전자였기 때문에 걷는 체력은 내가 절대적으로 우위일 수밖에 없었다. 


예쁜 야경사진 많이 찍어오라는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를 나서는 내 한쪽 어깨에는 카메라가 걸려있었고, 내 외투 안주머니에는 비엔나 패스카드, 비상용으로 사용할 유로화 잔돈, 그리고 여권사본이 들어간 지갑이 들어있었으며... 한 손에는 휴대폰과 이어폰이 쥐어져 있었다. 



숙소를 나와 걸어서 5분여 거리에 위치한 트램 정류장에서 D라인 트램을 타고 빈 슈타츠오퍼(국립 오페라 극장) 앞에 내릴 계획이었는데, 나는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하이든의 현악 사중주에 홀려 정류장을 착각한 나머지 두 정거장이나 먼저 내려버리고 말았다. 


잘못 내린 것을 확인한 후 뒤이어 오는 트램을 다시 탈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걷는 거야 원래도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날 밤이 내가 사랑하는 도시 빈에서의 마지막 밤이니... 빈과 나, Just two of us의 시간을 가져보자 마음을 먹고 걷기 시작했다. 해가 완전히 진 상태라서 조금 무서웠기 때문에 경보에 준하는 파워워킹으로 걸었다는 건... 안 비밀이다. ^-^; 


예쁜 야경 사진도 찍고, 빈 상인들이 상가 문을 닫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보고, 이어폰을 낀 귀에는 슈베르트와 하이든의 음악이 속살거리고... 마지막 밤을 즐기기엔 더없이 좋은 순간이었다. 



열심히 걸어 빈 미술사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 앞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열심히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야경 사진을 한 컷 찍고 발길을 계속 재촉하려는데 누군가가 내 한쪽 어깨를 톡톡 쳤다. 


“Excuse me...”


뒤를 돌아보니 멀끔하게 생긴 동양 남자였다. 멀끔하게 생긴 게 중국인도 아닌 것 같았고 일본인도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돌아서면서 한쪽 귀의 이어폰을 빼자 무척 쑥스러워하며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영어 하실 줄 아냐.’, ‘실롄줄은 알지만 첫눈에 반해서 이렇게 말을 걸었다.’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그의 유창한 영어 억양을 듣고 나는 그가 한국인이라고 확신했다.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영어 억양이 아니었다. (옷차림도 중국인이나 일본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얼굴까지 붉혀가며 말을 붙이는데... 나름 엄청 용기를 낸 것 같아 보였지만 그의 헌팅에 응해줄 생각은 1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곁에는 친구들로 보이는 남자 두어 명이 같이 있었고, 나는 혼자였다. 게다가 어두운 밤. 그리고 그곳은 서울도 아닌 빈이었다. 홀로 여행자 모드의 1단계 경보 램프가 내 안에서 ‘반짝’ 하고 켜졌다. 


무엇보다... 그 순간의 내 차림은 평범한 여행객 차림이었다. 카키색 야상 점퍼에, 청바지, 일교차 때문에 목이 상할까 싶어 두른 스카프. 가방조차 메지 않은 후줄근한 옷차림. 그가 첫눈에 반하기엔 냉정하게 무리라고 판단될 차림... 그런데 내가 Looks good이라고? 첫눈에 반했다고?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그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영어를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사실 영어를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누가 봐도 헌팅이고, 얼굴 붉혀가며 말하는 남자를 보면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눈치로 다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Sorry.”

 

웃으며 거절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가 돌아선 내 팔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봤다. 그는 내 팔을 붙잡은 채 애절하게 말을 이어갔다. ‘영어 알아듣는 거 아니냐.’, ‘왜 못 알아듣는 척하고 돌아서느냐.’ 뭐 그런 얘기들이었다. 


아뿔싸! 영어 좀 못하는 척할걸... 조금 어눌하게 ‘쏘리’라고 했으면 그냥 떨어져 나갔을 텐데, 당시 나는 영어 회화 학원을 3년 넘게 다니고 있었다. (지금이야 실력이 많이 퇴보했겠지만...) 그리고 학원 내에서 강사들에게 발음이 좋고 실력이 좋다고 예쁨 받는 학생이기도 했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완벽한 북미식 억양 ‘쏴리’로 맞받아 쳤으니, 내가 그의 말을 모두 다 알아듣고 이해했다는 걸 들킨 것이다. 


내 팔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뿌리치고 나는 다시 오페라 극장 앞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다시 잰걸음으로 걸으며 생각해봤다. 만약 내가 ‘Sorry’가 아닌, 한국말 ‘죄송합니다.’나 일본어 ‘なに? (뭐죠?)’로 맞받아쳤으면 어땠을까.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헌팅남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그렇게 얼굴이 새빨개져서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걸었는데 내가 정말 매몰차게 거절해서 상처 받았을 것 같아서... ^-^;; 하지만 사랑은 타이밍 아닌가. 밝은 대낮에, 성당 안에서 만났으면 나도 운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2017년 10월 14일 저녁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에 빈 미술사 박물관 앞에서 카키색 야상 점퍼 입은 여자한테 말 거셨던 남성분! 혹시 이 글 보고 계시다면 사과할게요. 그땐 미안했어요! 그때 제가 혼자 다니는 게 처음이라 무서워서... ^-^; 우리가 진짜 인연이라면 서울이든 어디든 또 만날 일이 있겠죠. 그때는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얘기해요! ^-^



 이 얼굴이 어딜 봐서 첫눈에 반할 얼굴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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