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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이야기

1. 시골집 가는 길

by 뺑덕갱

저녁노을에 발그레하게 익은 구름이 따끈한 하늘에 궁둥이 붙이고 떠나갈 줄 모른다. 휑한 겨울 밤하늘에 슬금슬금 가짜 별들이 하나 둘 기어 나와, 기계 눈깔 들이대고 동네를 기웃댄다. 철새의 파닥거리는 날갯짓도 울음소리도 사라진 지 오래다. 힘없이 밀려난 별들만이 가물거리는 밤이다. 먼 시골집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있던 똘똘한 별들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어느 날, 강원도 양덕원이라는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엄마는 성이라고 불렀다. 그분은 우리 집에서 하루를 머물며 밤이 늦도록 엄마와 하하 호호하셨다. 손님은 떠나기 전, 집 근처 강에서 얼음을 탈 수 있으니, 방학이 오면 꼭 놀러 오라는 말을 남겼다.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이 오자마자, 엄마를 졸라 보물처럼 아끼던 빨간 스케이트를 짊어지고 그곳으로 길을 떠났다.


서울에 살았던 나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이 익숙해 있었다. 엄마가 알려 주신 대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 내렸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비좁고 허름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선 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아마도 지름길을 알려주었던 것 같다.


시장 안쪽은 곱창 꾸러미처럼 길게도 이어져 있었다. 가게마다 놓여있던 커다란 곰 솥에서 희뿌옇게 김이 연실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추운 날씨에도 골목길은 훈훈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내장 다발과 혀가 쭉 빠진 소머리며 웃고 있는 돼지머리가 평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비좁고 너저분한 길바닥에는 수세미와 걸레같이 생긴 내장들이 커다란 대야에 넘쳐날 듯 담겨 있었다. 엄마가 새로 사주신 털 부츠가 더러워질까 싶어 까치발로 그곳을 지나갔다. 시장길을 빠져나왔을 때 벙어리 장감은 어느새 내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나는 마장동 우시장 한 귀퉁이를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터미널 안에는 군인 아저씨들이 많이도 오갔다. 나는 창구에서 양덕원 가는 버스표를 샀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버스가 빨리 출발하기만을 기다렸지만 버스는 '우르릉 우르릉' 폼만 잡고 한참을 서있었다.


버스가 복닥대는 터미널을 빠져나오자 낯설었던 그 시장이며 마장동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어져 갔다. 털털이 버스는 대전 할머니 댁을 오갈 때 탔던 고급 진 고속버스는 아니었지만, 안내양 언니가 복도를 가운데 두고 좌석 이쪽저쪽을 번갈아 지나가며 승객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었다. 언니가 내 좌석 근처에 왔을 때쯤, 알록달록한 사탕이 반쯤 들어있던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고, 나를 그냥 지나칠까 걱정하며 앉아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던 집들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험하고 못생긴 시골길이 시작되었다. 얼마를 갔는지 하얗게 얼어붙은 강의 꼬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점점 넓어지며, 마치 얼어붙은 큰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아마도 북한강을 끼고 양평을 지나갔던 것 같다.

나룻배를 품은 강은 이미 얼음에 꽁꽁 묶여 황량한 길바닥이 되어 지나갔다. 겨울나무에 내려앉은 얼음 꽃이 부시게 반짝거렸다. 차 창문을 스치는 수양버들 손 자락이 아픈 소리를 냈다. 얼음골에 갇힌 작은 섬 하나가 버스를 빙빙 돌며 다가왔다 멀어지면, 강 언저리와 맞닿은 산자락이 딸려왔다 강 저편으로 또 멀어져 갔다. 산 그림자에 안긴 빙판 위로 눈을 품은 겨울바람이 갈팡질팡 맴돌다 공중으로 하얗게 부서져 내리면 또 다른 바람이 훅 끼어들어 채갔다. 깊은 산골로 버스가 접어드니 먼 산머리에 걸린 구름은 동동거리다 흩어지고, 얼음 위로 미끄러져 내린 겨울 햇살은 당근 빛 온기를 품고 버스를 한동안 따라왔다.


그들을 담았던 차창 밖의 그 겨울은 열두 살의 내 기억 속에 사진처럼 남아있다. 겨울 빙판 위를 떠돌던 바람, 죽은 듯 굳어버린 강, 눈 감은 산자락, 그들을 감싸 안은 겨울 햇살, 그 해에 만났던 겨울 풍경은 한 편의 그림책과도 같았다.


이국적인 캐럴이 길거리마다 넘쳐나고 해마다 들락거렸던 명동거리 속 백화점, 그 한복판에 서 있던 대형 크리스마스트리, 산타할아버지에 대한 희망을 품었던 어릴 적 나의 겨울은 지나가고, 자연을 품은 겨울을 마주하게 되었다.


버스는 작은 마을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다시 떠나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탔다. 고속버스로 한 번에 할머니 댁을 오갔던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안내양 언니가 마을 이름을 외칠 때마다 고개를 쭉 빼고 주의 깊게 들었지만, 힘에 부친 버스의 엔진 소리에 언니의 말소리가 묻혀, 생소했던 동네 이름들이 외국말처럼 들려왔다.


들녘에 노을이 내려앉을 때쯤, 언니는 양덕원이라고 외쳤다. 횡 한 들판에 덩그마니 서 있던 작은 구멍가게 앞에 버스가 멈춰 섰다. 버스에서 내리자, 가게 옆구리에 서 있던 꼬맹이 하나가 배시시 웃으면서 수줍게 다가왔다. 밤송이머리, 콧물에 헐어 버린 인중, 발그레하게 튼 양 볼, 꼬맹이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아이를 따라 버스가 온 길을 벗어났다. 꼬맹이는 엉덩이가 반질거리는 솜바지에 손을 찔러 넣고 앞장서서 갔다. '힐끔힐끔' 뒤돌아 훔쳐보다 눈이 마주치면 또 수줍게 웃고는 안 본 척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우리는 희뿌연 겨울바람이 머무는 얼어붙은 논과 밭을 가로질러 갔다. 시골 바람은 사나웠다. 그 아이는 울퉁불퉁 딱딱하게 얼어버린 논 바닥을 능숙하게 잘도 걸어갔다. 얼어버린 물고랑이 미끈댔다. 날카롭게 배어진 벼 뭉치 밑동을 밟기라도 하면 돌덩이를 밟은 것처럼 발목이 삑 딱 거리며 아팠다.


둑 아래로 작은 시내가 나왔는데, 징검다리가 얼음 속에 박혀 머리꼭지만 메롱 튀어나와 있었다. 꼬맹이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얼어붙은 시내를 발로 죽죽 밀며 건너갔다. 둔덕에 올라서자 큰 강이 나타났고, 군인들이 만들어 놓은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해를 넘긴 산세에 가려 어스름한 잿빛과 노을 자락이 뒤섞여 빙판 위로 번져 오고 있었지만, 얼어붙은 강은 왕보석처럼 번쩍번쩍 빛이 났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한참을 서서보다 스케이트를 꺼내 들었다. 꼬맹이는 말없이 너덜거리는 포대자루를 주어 와 그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양손으로 바닥을 당기며 얼음을 타기 시작했다. 노을은 아쉬운 듯 텅 빈 얼음을 거울삼아 검붉어진 빰을 비비고 있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스케이트 날이 얼음에 부딪치는 소리가 빙판 위를 맴돌다 허공으로 사라졌다. 빨간 스케이트가 기를 펴고 앞으로 '쌩쌩' 달려가면 시골 바람이 질까 싶어 종이칼처럼 내 빰을 스치고 뒤로 달려갔다.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가르는 소리 위로 까마귀 짖어 대는 소리가 맞은편 산 머리에 부딪쳐 제법 크게 들려왔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자, 거친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지나가고 또 다른 바람은 긴 머리카락을 공중으로 휙 잡아당겼다. 나는 잠시 빙판 위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마주한 산을 빗질하고, 언 강바닥을 촘촘히 쓸고, 횡 한 논과 밭을 품고 달려가는 바람을 보았다.


꼬맹이 모습이 어둠에 파묻혀 꼬물거렸다. 멀리서 유령처럼 누군가 다가오다 말다 서서 꼬맹이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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